[ESC] ‘흑리단길’에 가서 ‘필수’를 맛보다

[푸드]by 한겨레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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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시는데 휴일은 쉬어도 되지 않냐”고 말하는 이와는 겸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 휴일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점’을 먹고 또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그러고 나면 드디어 술 마시기 좋은 시간이 찾아온다. 해는 떠 있지만, 어슴푸레 어둠이 찾아들 무렵, 이때야말로 제대로 술 마실 시간이다. ‘짧은 낮술과 긴 밤의 술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그럴듯한 구실도 있다.


늘 가던 동네는 지겹고, 마침 여유도 있는 일요일이었다. 마침 함께 술 마실 친구는 오랜만에 자신의 모교 근처에 있다고 했다. ‘새로운 동네에 방문하자’는 속셈으로 서울 동작구 흑석동으로 향했다. 지하철 7호선 흑석역 3번 출구 인근에는 소위 ‘흑리단길’이라 불리는 낡았지만 젊은 골목이 있다. 옛날 골목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젊은이들이 속속 모이다 보니 촌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네다. 요즘 ‘힙지로’라 불리는 을지로의 축소판이다. 옛 시골길 같은 작은 길을 따라 피자집, 맥주 가게, 각종 음식점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요즘 이 골목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 ‘필수’로 향했다. ‘Feels u’라는 글자가 적힌 낡은 대문, 술 종류를 쓴 커다란 유리창, 옛날 이발소에 걸려 있던 빙글빙글 도는 네온사인까지 낯익고 생경했다. ‘확실히 요즘 젊은이가 만든 곳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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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한 벽과 허름함 바닥재는 낡았지만, 새로웠다. 어두운 실내, 편안한 분위기, 이곳을 가득 채운 젊은이들의 생기만으로도 술 퍼마시기에 충분했다. 부챗살 스테이크, 한우 육회, 봉골레파스타 같은 기름진 음식부터 돼지고기 김치찌개, ‘얼큰한 순두부 프랑스 토마토 스튜’ 같은 소주용 안주까지 고루 갖춘 메뉴판은 유독 사랑스러웠다. 친구는 “소주 안주에는 역시 한식”이라며 ‘돼지 꼬리 바삭 구이’를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오늘은 젊은이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문한 메뉴가 ‘해물 로제 떡볶이’. 가게를 둘러보니 30대는 우리뿐인 듯했다.


돼지 꼬리 구이는 동남아시아의 이국적인 음식인 듯, 생경하고 세련된 맛이었다. 부드러운 식감의 돼지 꼬리 구이 위에 나물과 구운 대파를 듬뿍 얹어 먹었다. 비린 냄새 같은 거슬리는 향은 거의 없었다. 구수하고 달곰한 맛만 입안에 남았다. ‘음식을 허투루 만들지 않는 집이구나.’ 이윽고 나온 ‘해물 로제 떡볶이’는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국밥처럼 푸짐한 국물, 막 떠먹어도 느끼하거나 위가 부대끼지 않는 소스와 쫀득한 떡까지, 역시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안 주였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낯선 동네에서 느끼는 새로운 열기는 늘 설렌다. 늘 먹던 식재료를 비틀면 이렇게 신선하고 새로운 안주가 탄생한다. 익숙한 사람과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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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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