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의 강인하고 자유로운 여성상, 열여섯부터 싹트다

34년 정상을 유지해 온 배우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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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수는 16세에 데뷔한 후 30년 넘게 정상권을 유지하며 발랄하고 씩씩하며 진취적인 여성을 주로 연기하며 여성 배우의 황동 영역을 넓혀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혜수의 연예계 데뷔는 광고로 시작되었다. 1985년 중학교 3학년 때 출연한 초콜릿 음료 네슬레 마일로의 CF로 광고 속 태권도 장면에 적합한 모델을 찾던 제작진에게 섭외되었다고 한다. 미동초등학교 시절부터 국가대표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으로 뽑혔고, 당시 태권도 2단의 유단자였던 김혜수가 적격이었다. 이어서 김혜수는 ‘변함없는 사랑, 변함없는 에이스’를 모토로 내건 해태제과의 에이스 크래커 광고에도 출연하는가 하면, 한국 가요 사상 최초의 뮤직비디오인 조용필의 ‘허공’을 촬영하게 된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을 주목하고 있었던 이황림 감독이 ‘깜보’(1986ㆍ이 영화는 박중훈의 데뷔작이기도 하다)의 주연으로 낙점하면서 영화배우로서의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이때 감독이 김혜수를 성인 배역으로 캐스팅하기 위해 대본 일부를 수정하는 등 공을 들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대견하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경험의 한계 때문에 성인 역의 어려움도 많았지만, 전 연기자라면 무슨 역이든 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이에 맞는 역할만 할 순 없잖아요.”(영화월간지 로드쇼 1990년 1월호)

슬럼프를 몰랐던 ‘동국대 나온’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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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는 16세 때 성인 역할을 맡아 영화 '깜보'(1986)로 데뷔한다. 합동영화사 제공

16세 어린 나이의 데뷔작임에도 김혜수는 밤무대에서 일하며 가수를 꿈꾸는 나영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며, 박중훈과 함께 제23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하이틴 스타는 청소년 배역부터 맡기 마련인 통례를 생각하자면 이례적인 데뷔였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신인’의 발견은 단연 이목을 끌어 김호선 감독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 2’(1986)나 정소영 감독의 ‘그 마지막 겨울’(1988), 이규형 감독의 ‘어른들은 몰라요’(1988) 등의 작품에서 김혜수는 잇달아 성인 배역을 연기하게 된다. KBS의 TV 문학관 ‘젊은 느티나무’에서도 연기로 호평을 받은 김혜수는 이듬해 KBS 사극 ‘사모곡’(1987)의 여주인공 보옥 역으로 기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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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사모곡'(1987)에서 김혜수는 15세 연상인 길용우와 부부 사이를 연기했다. KBS 제공

배우들이 모여 드라마의 대본 읽기를 하는 첫날 주변으로부터 “어머, 저런 어린애가 어떻게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해?”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김혜수는 기죽지 않았다. “그래 혜수야, 한 번 제대로 해보는 거야!”(영화 월간지 스크린 1990년 4월호)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임했다. 이 드라마의 성공이 ‘순심이’(1988), ‘세노야’(1989)의 연이은 히트로까지 이어지면서 김혜수는 드라마의 시청률을 보장하는 톱스타로 인정받게 된다.


영화 ‘타짜’(2006)의 대사 “나 이대 나온 여자야!”가 유명해지면서 세간에 퍼진 오해와 달리, 김혜수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89학번으로 진학했다. 배우 생활을 계속할지, 아니면 영문학을 전공할지, 장래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던 김혜수는 연기 경험을 통해 강단에 서겠다는 생각으로 연극영화과를 선택했고, 영화 ‘오세암’(1990)을 기점으로 배우의 길에 쭉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대학 시절에는 단편영화 ‘가변차선’(1992)의 조감독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연출을 맡았던 선배 양윤호 감독과는 젊은 부부의 사랑과 고민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미스터 콘돔’(1997)을 같이 한다. 졸업반 무렵에는 이명세 감독의 ‘첫 사랑’(1993)을 선택했다. ‘사모곡’에서는 15살 연상인 길용우, 드라마 ‘꽃 피고 새 울면’(1990)에서는 26살 많은 노주현과 부부로 호흡을 맞추는 등 데뷔 초부터 성인 연기자의 완숙함을 보여 왔던 김혜수로서는 그 동안 드러내지 못했던, 풋풋한 청춘의 이미지를 표현해낼 기회였다.

“틀에 박힌 고정된 이미지를 깨는 것은 연기자, 감독 공동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첫 사랑’에서 제가 연기하는 박영신의 모든 것에는 평소 저의 이미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크린 1993년 1월호)

‘첫 사랑’의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이명세 감독은 김혜수를 떠올리며 영화를 준비했다고 한다. 제작사 측에서는 최진실을 주인공으로 내정해뒀지만, 김혜수를 고집하는 이명세 감독의 뜻은 완고했고, 이 때문에 빗발치는 팬들의 항의전화로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고 한다.


‘첫 사랑’의 흥행은 참담한 실패였지만 김혜수는 이 영화로 제1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때 수상과 동시에 사회를 맡으면서 시작된 청룡영화상과의 인연은 제40회(2019)에 이르기까지 26년을 이어오게 된다. 이 감독과는 ‘남자는 괴로워’(1995)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 김혜수는 ‘첫 사랑’ 때와는 달리 신입사원 박상민이 첫 눈에 반하는 선배 회사원을 맡으며 다시금 성숙한 면모로 돌아온다.

고정적인 여배우 역할을 거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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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우먼을 연기한 2013년 드라마 '직장의 신' 출연 당시의 배우 김혜수. 건강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연기 내공을 쌓으며 다채로운 역할을 소화해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기 방영되던 MBC 아침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1986~1994)에서 옥탑에 세 들어 사는 신세대 신혼 여성으로 출연하고, 항공사 승무원들 간의 사랑을 그린 ‘짝’(1994~1998)으로 27세에 생애 첫 MBC 연기대상을 타는 등 탤런트로서는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영화배우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시기였다. ‘닥터 봉’(1997)과 ‘찜’(1998) 말고는 흥행 실패작이 대부분이었고,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 영화들은 대개 배우의 ‘상쾌하고 건강한’ 이미지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기획들이 많았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은 수절하는 사극 속 여성이거나 미혼여성과 유부녀, 여대생과 직장여성 등 고정된 성역할과 인식만큼이나 제한적이었고, 좀처럼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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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달밤'은 영화에서는 흥행에 실패하곤 했던 김혜수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김혜수는 말 잘하고 똑똑해서 좋다. 가끔 영화관에서 ’까르르‘하며 터지는 일반인보다 한 옥타브 높은 웃음소리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주의를 둘러보게 만드는 것 빼곤 김혜수를 만나는 건 항상 흥미롭고 즐겁고 특별하다. 그런 그녀가 건강함과 화려함 속에 감춰진 약하고 어둡고 섬세한 여인으로 돌아왔다. 만년 스타에서 자신 안의 새로운 모습을 궁금해하고 탐구하는 연기자가 되어가고 있다.’(김지운 감독 저 ‘김지운의 숏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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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YMCA 야구단'에서 김혜수는 진취적인 신여성을 연기했다. 명필름 제공

영화배우 김혜수의 전성기는 한국 영화가 중흥기를 맞는 2000년대에 찾아왔다. ‘신라의 달밤’(2001)과 ‘YMCA 야구단’(2002)이 각각 서울관객 160만명과 56만명이라는 준수한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옴니버스 영화 ‘쓰리’(2002)에 포함된 김지운감독의 단편 ‘메모리즈’에서 공포에 잠식된, 기억상실증 주부를 맡아 이전과는 결이 다른, 심리적으로 어둡고 광기어린 연기로 진일보한 면모를 선보였다.


김혜수 하면 떠오르는 건강하고 씩씩한 이미지를 스스로 탈피하고자 한 노력은 파격적인 베드신을 감행한 ‘얼굴없는 미녀’(2004), 한 몸에 두 인격이 깃든 안과의사로 분한 공포영화 ‘분홍신’(2005)의 분열증적인 연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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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는 영화 '타짜'에서 노름판을 뒤에서 흔드는 사기꾼 정마담을 연기하며 '이대 나온 여자'라는 대사를 유행시켰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리고 최동훈 감독의 ‘타짜’를 만났다. 범죄 영화의 팜파탈 역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김혜수 특유의 도도하고 고혹적인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배역에 녹아 들었고, 영화가 대중적인 반향을 얻으면서 한국 영화 속 팜파탈의 기준을 바꿔놓았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혜수를 정마담 역으로 기용한 감독의 판단은 옳았던 셈이다.


이때의 일화로 고니(조승우)가 돈다발에 불을 지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촬영할 때, 김혜수는 배역에 감정적으로 몰입한 나머지 옷에 불이 붙은 줄 모른 채 연기를 계속해 위험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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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는 영화 '도둑들'에서 금고털이범을 맡아 연기의 폭을 넓힌다. 쇼박스 제공

본인의 말마따나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끄는 콘텐츠가 적은” 한국영화계의 현실 속에서 김혜수는 중심을 잃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몇 안 되는 여배우이다. ‘타짜’의 노름 사기 설계자 정마담이나 ‘바람피기 좋은 날’(2007)의 자유분방한 여성 이슬, ‘관상’(2013)의 기생 연홍은 남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고, ‘모던 보이’(2008)의 신여성 조난실, ‘도둑들’(2012)의 금고털이범 팹시는 사랑 앞에서도 스스로의 신념과 자부심을 포기하지 않으며, ‘국가부도의 날’(2018)의 한시현 한국은행 팀장은 남성 관료들 틈바구니에서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이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대개 여성연기자의 배역은 가족 드라마의 아내나 요부, 멜로 장르의 연인과 같이 남성 주인공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김혜수는 이러한 통념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설 줄 아는, 남성들의 각축장 속에서도 끌려 다니지 않고 존재감을 잃지 않는, 강인하고 자유로운 여성상을 창조해냈다. 34년의 연기 인생을 통해서 김혜수는 한국영화의 여성상에 한 줄기의 모더니즘을 제시한 것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2020.04.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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