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기 품은 얼음 골짜기... 37도 폭염 날릴 피서 명당 어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밀양 얼음골, 맨발로 걷기 힘들 정도로 시린 계곡과 냉기 터널. 자연이 만든 극강 청량 피서지.
경남 밀양 얼음골
![]() 경남 밀양시 얼음골 계곡이 동천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
![]() 경남 밀양시 얼음골 계곡이 동천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
“여름엔 이틀에 한 번꼴로 여기 와… 전국 다 다녀봤는데 여기 같은 곳이 없어.”
한낮 기온이 38도까지 치솟은 지난달 28일, 경남 밀양시 재약산(1,189m) 중턱에서 만난 피서객 정기택(58)씨가 이같이 귀띔했다. 수백 m를 오른 그의 이마엔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나무 그늘진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니 선선하다 못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재약산에는 한여름 폭염 경보에도 온도계가 1도 안팎을 가리키는 자연이 선사한 피서지, 밀양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이 있다. 얼음골은 올해 7월 전국 평균 기온이 27.1도로 역대 가장 더웠던 1994년(27.7도)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면서 방문객이 폭증했다. 지난달 얼음골 방문객은 1만4,923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50% 늘었고, 2년 전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여름엔 얼고, 겨울엔 녹는 마법의 골짜기
![]() 재약산 얼음골의 너덜지대(애추·테일러스 지형)를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
![]() 얼음골 결빙지 앞 온도계가 1.65도를 가리키고 있다. |
얼음골은 낙동강의 지류인 단장천에 합류하는 동천과 맞닿아 있는 재약산 중턱(750m)에 있는 골짜기다. 이름처럼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고 냉기가 흐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골짜기엔 회색의 거대한 바위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빙하기를 지나며 산의 일부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다 균열이 생기며 떨어져 나온 돌들이 마치 흐르는 강처럼 쌓이게 됐다.
‘너덜지대’라고 부르는 이 바위 무더기가 계절을 역행하는 얼음골의 비밀이다. 학술용어로는 애추(테일러스·talus) 지형이다. 지표면에 노출된 부분 중 가장 온도가 많이 떨어지는 결빙지에서는 늦게는 7, 8월까지도 바위에 맺힌 고드름을 볼 수 있다. 통상 봄이 오는 3월 즈음부터 얼기 시작해 삼복더위를 겪으며 점차 사라진다. 올해는 평년 대비 빨리 녹아 사라졌지만, 얼음이 녹은 후에도 한 자릿수 온도를 유지한다. 이날도 얼음골 결빙지 앞에 놓인 온도계는 1.6도를 가리켰다.
얼음골의 원인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겨우내 바위에 축적된 냉기가 봄과 여름 동안 서서히 방출되고, 이 과정에서 외부 공기보다 차가운 바위에 물방울이 맺히고, 얼어붙는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넓고 깊은 너덜지대에 형성된 공기층으로 단열효과를 일으켜 열교환이 천천히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공기방울이 찬 포장재 ‘뽁뽁이’나 스티로폼이 단열재로 쓰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역으로 추운 겨울에는 얼음골 바위 틈새에서 오히려 따뜻한 증기가 솟아난다.
![]() 지난달 28일 시민들이 밀양 얼음골 계곡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다. |
냉기가 흐르는 얼음골 결빙지 주변 계곡에는 일찌감치 '명당'을 선점한 피서객들이 자리했다. 바위에 걸터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불볕더위를 이내 잊게 된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든다.
진입로를 오르기 전만 해도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더웠지만, 얼음골에 다가갈수록 ‘긴팔 옷을 챙겨올 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를수록 더위가 멀어진다. 가족과 함께 피서를 온 김모(53)씨는 “한여름에 춥다고 느낄 정도의 냉기가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전국의 명산을 여러 군데 가봤지만 여기(얼음골) 같은 곳은 없었다”고 감탄했다.
너덜지대 지하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계곡물은 너무 차가워 오히려 물놀이에 적합하지 않다. 경남 창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얼음골을 찾은 박시현(19)씨는 계곡물에 손을 담그자마자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얼음골 계곡은 수온이 낮아 2분 이상 손발을 넣고 있기 어렵다. 어릴 적 근처 할머니댁을 방문하며 얼음골에 자주 놀러왔다는 그는 “여름에 이렇게 차가운 계곡은 또 없어 친구들에게 소개해주려 데려왔다”고 말했다. 얼음골 계곡의 수온은 연중 8도를 넘지 않는다. 낮은 수온으로 수질도 깨끗하다.
![]() 얼음골 결빙지 냉기 나오는 곳 앞에 피서객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
결빙지에 도착하면 의외의 모습에 당황할 수 있다. 철제 울타리가 둘러진 가운데 돌무더기가 놓여진 게 전부다. 그런데 이곳에서 얼음이 얼고, 끝없는 냉기가 분출된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실제 면적은 8만7,816㎡(약 2만6,564평)에 달한다. 천연기념물 보호를 위해 제한된 구역만 둘러볼 수 있다. 짧은 산행을 완수한 피서객들이 냉기가 나오는 구멍 앞에 옹기종기 앉아 더위를 식힌다.
비가 온 이후에만 볼 수 있는 폭포도 있다. 결빙지를 지나 산행을 이어가면 ‘숫가마불 폭포’와 ‘암가마불 폭포’를 볼 수 있는데, 현재는 낙석으로 출입이 통제됐다. 강수량이 적으면 물이 마르거나, 떨어지자마자 공기 중으로 흩뿌려져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폭포가 아니다. 암가마불 폭포가 더 깊숙한 곳에 있고 아름답다.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즐기지 못한 물놀이는 하산 후 동천에서 하면 된다. 얼음골 계곡의 물이 흘러내려오는 지점은 물이 시원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 단위 피서객이 물놀이를 하기 적합하다.
자연이 빚은 화강암 연못, 시례 호박소
![]() 밀양시 시례 호박소와 호박소 계곡. |
![]() 시례 호박소에 투명한 물이 고여 있다. |
얼음골에서 2k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피서 명당이 있다. 동천을 사이에 두고 재약산과 마주보고 있는 백운산(891.3m)과 가지산(1,240.9m) 사이의 ‘시례 호박소’다. 시례는 호박소가 있는 밀양시 산내면의 옛 지명이다. 호박소는 예전 방앗간에서 쓰던 절구인 '호박'을 닮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시례 호박소는 화강암으로 빚은 거대한 그릇을 연상시키는 영롱한 연못이다. 수십만 년 동안 폭포수와 계곡물에 의해 깎여 만들어졌다. 백옥 같은 화강암 위로 물이 흐른 검은 무늬들이 반짝인다. 자연이 빚어놓은 아름다운 풍경에 탄성이 나온다.
얼음골이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로 승부를 본다면, 시례 호박소는 빼어난 경치 덕에 시야부터 청량해진다. 조선시대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에 대해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아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묘사했다.
![]() 시례 호박소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확연히 어두운 부분이 눈에 띈다. 수심이 깊은 지점이다. |
![]() 호박소 계곡 하류가 동천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
계곡의 수심이 낮아 착각하기 쉽지만, 연못의 수심은 5m에 달한다. 주민들이 연못의 수심을 가늠하기 위해 명주실 한 타래를 묶은 돌을 호박소에 던졌지만 못 바닥에 닿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깊은 수심으로 연못과 계곡 상류는 대부분 입수 금지 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눈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중·상류와 다르게 동천 합류 지점에 가까운 하류는 인기 물놀이 장소다. 상류에 오염원이 없어 물이 한없이 깨끗하다. 발만 간신히 담글 수 있는 곳부터 성인 가슴팍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까지 수심도 다양해 전 연령층이 더위를 식히기 좋다. 큼직한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웅장한 경치를 즐기며 물놀이를 할 수 있다. 폭이 좁고 구획이 나눠져 있어 재미가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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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