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보다 뛰어난 겸재의 혜안...산수화 같은 내연산 절경
<94>포항 청하∙송라면 기청산식물원과 내연산
포항 내연산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으로 꼽히는 연산폭포 부근 바위봉우리를 드론으로 본 모습. 겸재 정선은 '내연삼용추도'에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4개의 폭포와 암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
바다만 좋은 줄 알았더니 진짜배기는 산과 숲이었다. 7번 국도에서 포항 청하면 소재지로 들어서는 길목에 아담한 마을 숲이 반긴다. 잎이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지만 헐벗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상수리를 비롯해 14종 400여그루의 아름드리 나무에서 뻗은 잔가지가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름하여 ‘여인의숲’이다. 조선 고종 때 마을에서 주막을 하던 김설보 여사가 거금을 희사해 조성했다고 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단오절 축제 때면 그네뛰기와 씨름대회가 열렸고,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맬 정도로 규모가 큰 숲이었다. 안내판에는 주택과 전답에 잠식돼 ‘지금은 초라한 수준’이라고 소개하지만 2011년 ‘아름다운숲’ 전국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멋진 운치를 자랑한다. 이 정도는 맛보기다. 청하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학교 숲과 식물원이 있고, 같은 권역인 송라면에는 겸재의 진경산수를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내연산이 있다.
포항 청하면 초입의 '여인의숲'. 원래 모습에서 많이 훼손된 상태라지만 아름다운 운치는 여전하다. |
50년 숲 철학 담긴 기청산식물원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청하면은 인근 송라면과 함께 포항과 구분되는 독립된 현이었다. 현재의 면사무소와 청하초등학교는 청하읍성 관아가 있던 자리다. 면사무소 화단에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이 1733년부터 2년간 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그린 ‘청하성읍도’에 등장하는 나무다. 성읍도는 성(城)보다 읍(邑)에 방점을 둔 작명이다. 청하읍성은 현재 절반가량 그 윤곽이 확인되지만 초등학교와 주택가 축대로만 남아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겸재의 그림이 조감도처럼 사실적이어서 이를 바탕으로 복원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유지여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청하면 사무소 앞의 수령 500년 회화나무. 겸재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나무다. |
청하면사무소 입구에 겸재의 그림 '청사성읍도' 사본이 세워져 있다. |
청하읍성은 청하초등학교 담장과 주택가 축대로 남아 있다. |
인근 청하중학교 교문은 현대적 디자인에 고풍스러운 글자체를 입어 세련됨이 돋보인다.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동문들이 기증했다니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래된 솔숲이 학교를 감싸고 있다. 관에서 조성한 솔밭이라는 의미의 ‘관송전’이다. 조선 세종 때 청하현감 민인이라는 인물이 홍수와 바람을 막고 목재를 대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수령 100년 안팎의 500여그루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은 자연학습장 겸 휴식처다. 지난 2000년 ‘아름다운숲’ 전국대회에서 학교 숲 부문 대상을 받았다.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동문들이 세운 청하중학교 교문. |
청하중학교를 에워싸고 있는 관송전. 조선 세종 때부터 가꿔 온 솔밭이다. |
중학교 담장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기청산식물원이 있다. 기청산은 산이 아니다. ‘키 기(箕)’ 자에 이상향을 의미하는 청산(靑山)을 합한 말이다. 키질을 하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맹이만 남는다. 기청산수목원은 이삼우(80) 원장이 50여년간 옹골차게 가꿔 온 무릉도원이자 유토피아다.
이 원장은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스물다섯에 귀향을 선택했다. 식물과 농업을 좋아하니 농부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만한 학벌이면 웬만한 기업이나 공직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시대였고, 모두가 농촌을 떠나던 시절에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한편으론 불효이기도 했다. 교사로 재직하며 부업처럼 농사를 짓다가 1968년 청하중학교 재단의 농장 관리인으로 부임한 것이 전환점이 됐다. 부친의 사과밭을 인수해 그만의 조경 철학을 구현한 것이 오늘날의 기청산식물원이다.
포항 청하면의 기청산식물원. 이삼우 원장이 자신의 조경 철학을 담아 50여년간 일궈 온 공간이다. |
이삼우 기청산식물원 원장이 나무마다 얽힌 그의 철학을 풀어내고 있다. |
2,500여종의 나무와 풀이 어우러진 산책로마다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초입에 터를 잡은 소나무 한 그루는 ‘연아송’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무를 팔아 식물원을 운영하던 시절, 곧고 잘 생긴 소나무는 모두 팔렸는데 휘어진 이 나무는 가져가지 않았단다. 불쌍한 마음에 그대로 두었더니 활처럼 휜 모양이 피겨의 여왕 김연아의 포즈와 꼭 닮아 ‘연아송’으로 이름 붙였다.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나무가 관람객에게 사랑받는 나무로 거듭난 것이다. 안내판에는 ‘굽은 솔이 선산을 지키고, 눈 먼 자식이 효자 노릇한다’는 문구가 적혔다.
참느릅나무 여러 그루가 늘어선 식물원 중앙에는 긴 벤치가 놓여 있다. 이 원장은 사람에 인격이 있듯이 나무에도 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느릅나무의 성정을 ‘고결하면서도 카랑카랑하다’고 했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 등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으로 해석한다. 가지보다 뿌리가 튼실해 홍수나 바람에 강하고 꾀꼬리를 비롯한 온갖 새를 불러 모으니, 보는 것보다 듣는 게 즐거운 ‘귀 조경’에 으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아끼는 나무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조경하는 사람은 절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했다.
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선 참느릅나무와 잎이 떨어지지 않은 감태나무가 어우러진 이곳은 기청산식물원에서 사색의 공간이다. |
이삼우 원장이 농사를 시작하던 해에 광양에 있는 서울대 농과대 연습림에서 씨앗을 받아 키운 낙우송. 대왕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식물원의 대왕나무로 불리는 낙우송 아래에 수많은 기공 뿌리가 죽순처럼 자라고 있다. 오백나한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
그러고 보니 식물원에 딱히 ‘포토존’이라 할 만한 공간이 없다. 단일 수종으로 가지런히 정리된 풍경이 없다는 말이다. 이 원장은 단순림을 닭튀김이라 한다면, 혼합림은 영양가가 골고루 섞인 밥상이라 했다. 자극적인 풍광은 없지만 그만큼 순하고 편안한 공간이라는 의미다.
겨울 식물원은 삭막하지 않을까 여겼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색 바랜 나뭇잎과 본래의 수형을 드러낸 나목이 어우러져 화려하지 않아도 아늑하고 포근하다. 살구색으로 빛이 바랜 감태나무 잎이며, 우유을 섞은 듯 희미한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울릉줄사철, 한겨울에 더욱 돋보이는 대숲이 관람객을 사색하기 좋은 공간으로 이끈다.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봄의 기운도 감지된다. 양지바른 화단에 관상수로 심은 납매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음력 섣달에 피는 꽃이어서 납매(臘梅)라 하지만, 꿀처럼 달콤한 향기로 벌을 불러 모으기 때문에 납매(蠟梅)라고도 부른다.
기청산식물원의 납매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1월 초 역대급 혹한에 올해는 개화가 좀 늦은 편이라 한다. |
장작불을 피워 관람객이 직접 끓여 먹는 기청산식물원의 감태나무잎 차. 찻값은 기본 1,000원이다. |
식물원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출구 쪽에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운영 방식이 독특하다. 공중에 커다란 무쇠 솥이 걸려 있는데, 관람객이 직접 장작불을 피운 후 감태나무 잎을 끓여 마신다. 감태나무 차는 나무 향이 깔끔하고 마시고 나면 입안에 단맛이 살짝 여운으로 남는다. 스산한 겨울날에는 발갛게 달아오르는 장작불이 마음의 한기를 녹인다. 1,000원 차 값에 ‘불멍’은 덤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겸재의 진경산수, 내연산 12폭
송라면의 내연산은 겸재 정선이 청하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여러 번 찾았던 곳이다. 실제 풍광을 화폭에 고스란히 옮기는 그의 진경산수 화풍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내연삼용추도’ 2점과 ‘내연산폭포도’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어쩌면 지방행정관이 아니라 화가로서 청하현을 선택한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내연산 초입의 보경사. 신라시대에 창건한 평지 사찰이다. |
내연산 초입의 고모당신과 산왕대신 비. 고모당은 보경사 보살로 소원대로 호랑이에 물려가 죽었다는 전설의 인물로, 지역에서는 내연산을 지키는 산신으로 떠받든다. |
내연산 12폭포 중 제1폭포. 오랜 가뭄에도 불구하고 이곳부터 청아한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채운다. |
내연산은 속살이 예쁜 산이다. 태백산맥의 끄트머리로 바깥에서 보면 남북으로 길게 연결돼 있어서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해발 930m 정상까지 이어지는 골짜기가 들어갈수록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 중에서 경치가 빼어난 12개 폭포를 아울러 ‘내연산 12폭’이라 부르는데, 보통은 일곱 번째 폭포인 연산폭포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왕복 약 6㎞로 넉넉잡아 3시간가량 걸린다.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지는 폭포 위 전망대까지 왕복하면 1시간이 더 걸린다.
출발점은 신라시대에 창건한 천년 고찰 보경사다. 계곡을 따라 걷는 초입은 다소 심심한데, 첫 번째 폭포를 지나면 주변 풍광이 사뭇 달라진다. 지난해 10월 이래로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심한 상태인데도 얼음장을 녹이며 떨어지는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채운다. 그만큼 골짜기가 깊다는 의미다. 계곡과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네 번째 폭포에 다다르면 골짜기는 좁아지고 물소리는 더욱 청량하다. 잇따라 연결된 무풍폭포, 관음폭포, 연산폭포 좌우로 깎아지른 바위 협곡이 하늘을 찌른다. 겸재의 ‘내연삼용추’에 등장하는 바로 그 풍광이다.
제4폭포부터 제7폭포가 잇따라 연결된 이 구간은 내연산에서 최고의 절경을 자랑한다. 겸재의 그림에서 사다리가 세워진 곳에 현재는 출렁다리가 설치돼 있다. |
내연산 제6폭포인 관음폭포에서 제7폭포인 연산폭포로 이어지는 출렁다리. |
실물 묘사에 그림이 사진보다 나은 점이 있다. 바라보는 시점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연산을 찾은 겸재의 몸은 폭포 위 바위봉우리에 있었지만, 붓을 잡은 그의 시선은 훨씬 높은 계곡 상공에 머물러 있다. 암벽에 가려져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네 개의 폭포를 한 장의 화폭에 옮기니 산봉우리에서부터 물줄기가 쏟아지는 선경으로 표현된다. 드론을 띄워도 절대 따라 하기 힘든 구성이다. 그렇다고 도끼로 찍은 듯 그린 바위봉우리와 소나무가 결코 상상이나 과장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갈라진 수직단층 위에 꿋꿋하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는 실제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사실적이다. 그림에서 사다리가 놓인 자리에는 현재 짧은 출렁다리가 놓였고, 바위봉우리 위 선일대 맞은편에는 현대식 전망대가 설치돼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관음폭포 위 바위봉우리에 자리잡은 선일대. 곧추선 바위 단층에 꼿꼿이 소나무가 뿌리내린 모습이 겸재의 그림 그대로다. |
내연산 안내판에 세워져 있는 겸재 정선의 '내연삼용추도' 사본. 실제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4개의 폭포를 드론에서 본 듯 한 폭의 그림에 옮겼다. |
선일대 맞은편 봉우리에는 현대식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
선일대에서 내려다본 관음폭포 일대 내연산 절경. |
이런 절경에 방명록이 빠지지 않는다. 포항 문화관광해설사인 박창원씨는 연산폭포 일대 바위에 새겨진 400여명의 명단을 확인했다고 한다. 겸재도 ‘정선 갑인추(鄭敾 甲寅秋)’라는 기록을 남겼다. 갑인년인 1734년 가을에 방문했다는 표시다. 깊은 물 웅덩이 바로 위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어서 누가 찍어주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이름을 남긴 이들 중에는 추사의 부친 김노경, 이곳으로 귀양 온 부재학 류숙, 조선에 고구마를 처음 전한 조엄의 이름도 있다. 경상도 관찰사 이광정은 인근 흥해와 오천 현감을 대동한 것도 모자라 경주 기생 달섬도 동행했다는 표식을 자랑스럽게 남겼고, 몰래 다녀야 할 암행어사 이도재까지 이름을 새겼으니 내연산의 절경은 이미 오래 전 검증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견재 정선의 이름은 내연산 제7폭포 바로 옆 물웅덩이 위에 새겨져 있다. |
경상도관찰사 이광정은 관음폭포 앞 바위에 동행한 경주 기생 달섬의 이름까지 나란히 새겼다. |
포항=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