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섬, 억새의 섬... 제주에서 가장 큰 무인도

[여행]by 한국일보

<178> 제주 한경면 차귀도와 수월봉 지질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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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쪽 끝자락의 차귀도는 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다. 고산포구에서 차귀도유람선을 타면 1시간가량 섬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섬 밖에 섬이 있어 바다 풍경이 심심하지 않다. 제주 서쪽 끝자락 한경면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면 가까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 손에 잡힐 듯 동행한다. 제주에서 가장 큰 무인도인 차귀도다. 차귀도는 죽도, 와도, 지질이섬 등 작은 섬과 장군여, 썩은여, 간출암 등 해상 암초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 고산리 자구내포구(고산포구)에서 유람선으로 10분이면 가장 큰 섬인 죽도에 닿는다. 섬 안에서 약 1시간 산책을 마치면, 다시 유람선에 승선해 주변 기암절벽을 감상하고 포구로 돌아온다. 1시간 30분가량의 짧은 유람으로 섬 속의 섬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배로 10분, 섬 산책 1시간, 차귀도 유람선 투어

제주의 날씨 예보는 대체로 맞고 대체로 틀리다. 흐리다 해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부서지고, 맑다 해도 하늘 한쪽 귀퉁이에 짙은 구름이 덮이곤 한다. 첨단 장비를 동원한 일기예보도 빗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니, 오랜 기간 몸에 밴 감각으로 날씨를 가늠해야 했던 시절엔 말할 것도 없다. 그 변덕이 때로는 삶을 위협하는 수준이니 제주는 신들의 섬이고 전설의 고향이다. 제주 전역을 관장하는 한라산 설문대할망을 비롯해 조그만 마을마다 서낭신이 깃들어 있다. 차귀도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 21일 한경면 날씨는 하루 종일 흐리다고 예보됐지만, 자구내포구에 도착하니 오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유람선이 옥색 바다를 가르고 수평선과 비슷하게 낮은 섬들 위로 파란 하늘이 열렸다. 참 운이 좋다고 여겼지만 거기까지였다. 30분 뒤 출발하는 배에 몸을 실었을 땐 해가 짙은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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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는 와도(앞), 죽도(뒤의 큰 섬), 지질이섬과 주변 암초를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유람선으로 10분이면 죽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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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 언덕에 민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70년대 말까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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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따라 누운 차귀도 억새. 이미 이삭이 모두 떨어진 상태다.

죽도(대섬) 선착장에 내리면 곧장 짧은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대나무 숲을 통과하니 완만한 곡선의 구릉이 펼쳐진다. 언덕 위 갈림길에 허물어진 민가의 외벽이 보인다. 섬에는 1970년대 말까지 7가구가 보리·콩·참외·수박 등의 농사를 지었지만,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가 됐다. 옛 집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해발 37m의 산 정상이다. 유람선이 출항한 고산포구에서 오른쪽으로는 수월봉까지 얕은 해안 언덕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풍력발전기가 밀집한 신창해안도로가 낮게 이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차귀도 풍광은 온통 은빛이다. 일부 키 작은 대나무 군락을 제외하면 섬 전체가 억새에 덮여 있다. 산책로도 억새길 사이로 연결된다. 제주 본섬에는 이제 막 솜털이 부풀어 오르고 있지만, 차귀도의 억새는 이미 이삭을 훌훌 털어낸 상태다. 방패막이가 없으니 억새가 고스란히 거센 바닷바람을 감당해야 하는 탓이다. 더러는 빗질을 한 듯 가지런히 눕고, 더러는 산발한 것처럼 헝클어진 억새 물결이 거대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바람의 섬이 빚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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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 옛 집터 부근에 바람 따라 누운 억새가 헝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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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라는 이름과 달리 차귀도 큰 섬은 억새가 점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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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로 뒤덮인 차귀도 풍경.

차귀도에 전해오는 전설도 제주의 거친 날씨와 무관치 않다. 옛날 중국 송나라 왕이 호종단이라는 신하를 보내 제주의 지맥을 끊어 왕의 기운을 없애라 했단다. 임무를 거의 마무리하고 산방산에 들른 호종단은 마지막으로 바다로 뻗은 용 머리 지형에 칼을 꽂았다. 일을 마친 호종단이 고산포구를 통해 돌아가는데, 하늘 높이 맴돌던 독수리가 갑자기 돛대에 앉았다. 잠잠하던 바다에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가 거칠게 일어 배와 호종단 일행을 순식간에 삼켰다는 이야기다. 호종단의 귀향을 막은 독수리는 섬으로 내려앉아 돌로 굳어졌는데, 지질이섬 모양이 꼭 독수리 머리를 닮았다.


섬 산책로는 해안을 따라가다 서쪽 언덕 꼭대기의 하얀 등대를 돌아온다. 고산리 주민들이 1957년 세운 무인 등대다. 능선이 부드러운 등대 언덕은 ‘볼래기동산’이라 부른다. 주민들이 등대를 만들 때 돌과 자재를 들고 언덕을 오르면서 제주어로 ‘볼락볼락’ 가쁘게 숨을 쉬었다 해서 지은 이름이다. 지금도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차귀도 등대는 관광객의 쉼터이자 인증 사진 배경으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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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로 뒤덮인 언덕 위의 차귀도 등대. 1957년 고산리 주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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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한 마리가 차귀도 등대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있다.

1시간의 섬 산책을 마치고 다시 유람선에 오르면, 배는 위에서 내려다봤던 작은 바위섬을 돌아본다. 화산퇴적층이 파도에 깎여 빚어낸 자연의 작품이 눈길을 잡는다. 까만 화산탄과 속이 붉은 화산쇄설물도 보인다. 작지만 제주의 특징을 고루 간직한 섬이다. 유람선 선장의 해설이 곁들여진다. “오른쪽으로 장군석 바위가 보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할망의 500아들 중 막내라고 합니다. 나머지 499명은 한라산 영실에 가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위섬 곳곳에 낚시꾼의 모습도 보인다. 차귀도 앞바다는 제주에서도 소문난 바다낚시터다. 참돔, 돌돔, 벵에돔 등이 잘 잡힌다고 한다. 고산포구로 돌아오면 해안가에 오징어를 널어 말리는 모습이 흔하다. 유람선 주차장에도 반건조 오징어를 판매하는 매장이 늘어서 있다. 한경면 주변 바다는 예부터 오징어잡이로 유명한 곳이었다. 건조 작업하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요즘은 전부 냉동 오징어야. 여기서 작업해서 이렇게 말리는 거지.” 너무 솔직한 반전 답변이다. 하기야 국적 없는 바다에서 원산지가 무슨 의미인가. 차귀도 해풍에 말렸으니 차귀도 오징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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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서 본 차귀도의 장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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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 지실이섬. 섬에 얽힌 전설처럼 꼭 독수리 머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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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 지실이섬 바위 위에 낚시꾼이 올라 앉아 있다. 보기는 시원하지만 몹시 위험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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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도가 바라보이는 고산포구에서 한 주민이 오징어를 널어 말리고 있다.

차귀도유람선은 공식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지만 날씨와 승객 수에 따라 탄력적이다. 여행·레저 앱이나 인터넷에서 예매(1만5,000원)한 후 배를 타기 전 인적 사항을 기재하고 운항차가 적힌 목걸이 팻말을 받아야 탑승할 수 있다. 포구에 도착했는데 유람선 매표소가 보이지 않아 살짝 당황스럽다. 매표소는 ‘차귀도 달래배낚시’라 적힌 건물 안에 있다.

이토록 섬세한 화산퇴적층, 수월봉 지질공원

고산포구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수월봉은 차귀도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돼 있다. 약 1만8,000년 전 뜨거운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형성된 고리 모양 화산체의 일부이다. 지질 역사로는 아주 최근에 탄생한 신생아다.


수월봉에서 분출한 화산재는 기름진 토양이 돼 신석기인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인근에 ‘고산리유적’ 전시관이 있다. 1987년 발견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다. 식물 줄기를 점토와 반죽해 만든 토기, 화살촉, 양편석기 등이 전시돼 있다.


수월봉 정상까지는 찻길이 나 있어서 기우제를 지내던 수월정까지 쉽게 갈 수 있다. 높이 77m에 불과하지만 풍광은 광활하다. 앞쪽으로 차귀도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맞은편으로 고산평야가 드넓게 이어진다. 제주에서 가장 넓고 풍요로운 들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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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 정상에서는 차귀도와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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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 아래로 내려가면 정교한 화산퇴적층 절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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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에서 고산포구까지 해안 산책로는 지질 탐방코스이기도 하다.

전망만 보고 돌아선다면 수월봉의 진면목을 놓치는 격이다. 진짜 보물은 봉우리 아래 깎아지른 해안절벽이다. 고산포구까지 ‘수월봉 지질트레일’이 이어진다. 정교한 선으로 이루어진 화산퇴적층의 구조를 가장 가까이서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길이다. 조밀하게 층을 이룬 선들 사이에 화산탄이 총총히 박힌 모습이 흉내 내기 어려운 자연의 조각품이다. 오랜 시간 바람과 파도의 교감으로만 빚을 수 있는 걸작이다.


수려한 경관에 아름답고 눈물 어린 이야기도 배어 있다. 산책로 중간에 ‘녹고물’이라는 샘이 있다. 옛날 ‘수월’과 ‘녹고’ 남매가 홀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오가피를 캐러 왔다가 누이인 수월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자 녹고는 17일 동안이나 울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 눈물이 바로 녹고물이다. 차귀도에 노을이 질 무렵이면 남매의 애틋한 전설이 사무치게 아름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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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면 신창해안도로의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에서도 차귀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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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면 신창해안도로는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다.

수월봉 인근 용수리 포구에서 북측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창풍차해안도로라 불린다. 제주에서 손에 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다. 땅도 바다만큼 낮고 평탄하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달리면 바다에는 차귀도가 모습을 바꿔가며 따라오고, 진행 방향에는 해상풍력단지의 바람개비가 색다른 풍광을 연출한다.


용수리 포구는 1845년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곳이기도 하다. 그해 8월 31일 상하이에서 라파엘호에 승선해 조선으로 향하던 일행은 풍랑을 만나 20여 일 표류한 끝에 9월 28일 이곳 용수리 해안에 도착했다. 포구 언덕에 일련의 과정을 전시한 기념관과 성당이 세워져 있다. 정갈하게 가꾼 성당 앞마당 너머로 차귀도의 뒷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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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면 해안의 싱게물공원. 풍력발전 바람개비를 연결해 바다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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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게물공원의 원담. 전통 고기잡이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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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경면 해안 여행지도. 그래픽=김문중 선임기자

용수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약 4㎞ 이동하면 ‘싱게물공원’이 있다. 싱게물(싱계물)은 제주어로 ‘새로 발견한 갯물’이라는 의미다. 중산간 용암대지에서 땅속으로 스며든 지하수가 해안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다. 돌담으로 남탕·여탕을 구분해 목욕탕으로 이용되던 싱게물 주변 바다에 현재는 대규모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섰다. 등대와 풍력발전기를 연결해 바다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바다에 돌담을 둘러 전통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던 원담도 걸을 수 있다. 새까만 화산암에 담긴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볼수록 이국적이다.


제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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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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