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의 기차여행, 버스여행] 사람·바람·바다의 안식처...윤선도의 이상향 보길도
기차와 렌터카로 완도 보길도 여행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가 조성한 부용동원림에서도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이다. 넓은 창으로 품위있게 꾸민 연못과 정원, 주변 산세가 그림처럼 담긴다. ⓒ박준규 |
지난 한 해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들었다. 여행도 예외가 아니었다. 굳이 위안을 찾자면 해외여행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국내 여행지가 새삼 주목을 끌었고, 사람이 몰리지 않는 다양한 ‘언택트’ 관광지가 새로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럿이 몰려다니기보다 지친 마음에 편안한 휴식을 선사할 여행지를 선호하는 경향은 올해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진정되면 가 볼만한 곳으로 완도군 보길도를 소개한다.
보길도에 가려면 완도 화흥포항에서 여객선으로 노화도 동천항까지 가서 육로로 이동해야 한다. 화흥포항~동천항을 운항하는 대한호. ⓒ박준규 |
보길도까지 가는 교통편은 다소 복잡하다. 서울센트럴시티에서 고속버스로 완도터미널에 도착해 셔틀버스로 화흥포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여객선(화흥포항~동천항)으로 노화도까지 간 후 다시 셔틀버스를 타면 보길도 청별항에 닿는다. 노화도와 보길도는 해상교량으로 연결돼 있다. 보길도에서는 택시나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운행 횟수가 적은 마을버스로 여행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고, 택시 요금도 만만치 않다. 서울에서부터 5번 환승에 최소 6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고속열차나 비행기로 광주까지 가서 렌터카를 이용하면 조금 더 편리하다. 광주에서 완도 화흥포항으로 이동해 여객선에 차를 싣고 노화도 동천항으로 가면 약 4시간이 걸린다.
윤선도의 무릉도원 부용동원림과 김양제 고택
고산 윤선도(1587~1671)를 빼고 보길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산은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에 1등을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했다. 1616년(광해군 8)에는 성균관 유생으로 소를 올렸다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에, 이듬해에는 경남 기장으로 유배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됐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갔다.
1628년(인조 6)에는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고,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 역임했다. 그러나 1634년 또 다시 정적의 모함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됐다. 해남에 머물던 고산은 병자호란으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산 깊고 물 맑은 보길도에 은거하며 풍류를 즐겼다.
난이 평정된 뒤에는 임금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죄로 다시 경북 영덕으로 유배되기도 했지만 이듬해에 풀려나 10년 동안 정치와 인연을 끊고 보길도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문을 즐겼다. 1657년(효종 8) 71세의 나이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송시열과 맞서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효종 사후에는 예송논쟁으로 다시 유배된 후 1667년 풀려나 보길도에서 85세로 생을 마감한다.
남인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서인 세력에 맞섰다가 20여년의 유배와 19년간 은거 생활을 했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탁월한 문학적 역량으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고, 그의 이상향이라 할 보길도에 부용동원림(세연정·낙서재·곡수당·동천석실)을 조성했다.
부용동원림 전시실에 윤선도와 보길도의 인연이 상세히 정리돼 있다. ⓒ박준규 |
부용동원림의 세연지와 명당으로 꼽히는 세연정. ⓒ박준규 |
윤선도가 거처했던 낙서재. ⓒ박준규 |
그중에서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의 3칸짜리 정방형 정자 세연정은 명당 중에 명당으로 꼽힌다. 윤선도가 거처했던 낙서재, 그의 5남이었던 윤직미의 처소인 곡수당은 산수화 풍경처럼 고요하다. 고산이 차를 마시며 시를 짓던 동천석실은 선계에서 부용동을 조망하듯 경치가 일품이다. 석실 앞에 도르래를 걸었던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도 있다. 과거로 돌아가 고산과 차담을 나누고 싶을 정도로 운치있다. 세연정 입장료 2,000원.
고산의 5남 학관 윤직미의 처소인 곡수당과 일삼교. ⓒ박준규 |
동천석실은 선계에서 부용동을 조망하듯 경치가 일품이다. ⓒ박준규 |
반면 윤선도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던 우암 송시열의 유적도 있다. 우암이 1689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관직이 삭탈되어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 선백도마을에서 잠시 쉬며 새겼다는 ‘글씐바위(암각시문)’다. 소안도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글이다. 올해 전라남도에서 선정한 '언택트관광지 50선'에 이름을 올린 곳이다.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암각시문). ⓒ박준규 |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보물 같은 장소도 있다. 고산에 이어 보길도에 자리 잡은 김서온의 10대손 김양제 고택은 바깥에서 봤을 때 평범한 집이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밀의 정원 같은 비경을 품고 있다. 흰동백을 비롯해 100종이 넘는 수목이 자라는 정원이 웬만한 식물원 못지않다. 2채씩 서로 맞닿은 고풍스러운 한옥과 세월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부도를 보면 윤선도의 세연정에 버금가는 명소라 할만하다. 이 고택은 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김양제 고택은 흰동백을 비롯해 100종이 넘는 수목을 보유하고 있다. ⓒ박준규 |
고택과 고목, 부도가 조화를 이룬 김양제 고택. ⓒ박준규 |
'물멍'하기 좋은 마음의 휴식처, 보길도의 해수욕장
보길도는 조선시대에 장시간 배를 타고 가는 유배지였고 지금도 교통이 불편하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고 자연자원이 잘 보존돼 있다. 특히 해수욕장이 그렇다. 중리해수욕장, 통리해수욕장, 예송리해수욕장, 공룡알해변 등 4곳의 해수욕장이 개성 만점 매력을 발산한다.
중리해수욕장은 완만한 경사의 부드러운 백사장이라 맨발로 걷기에 제격이다.ⓒ박준규 |
예송리해수욕장은 갯돌이 해변 전체에 깔려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박준규 |
중리해수욕장과 통리해수욕장은 완만한 경사의 부드러운 백사장이라 맨발로 걷기에 제격이다. 예송리해수욕장은 해변 전체에 깔려 있어 그 자체로 볼거리다. 동글동글 예쁜 돌은 억겁의 세월이 창조한 예술품이다. 파도에 갯돌이 부딪힐 때마다 나는 ‘자그락자그락’ 소리가 경쾌하고 청아하다. 요즘 유행하는 ‘물멍(물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에 최적의 장소다.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을 걸으면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나뭇가지 흔들거리는 소리가 잠자던 감각을 일깨운다.
갯돌에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자그락자그락 돌 구르는 소리...예송리해수욕장은 '물멍'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박준규 |
보옥리 공룡알해변엔 굵도 둥근 자갈이 널려 있다. 맘 편한 휴식처다. ⓒ박준규 |
보옥리 공룡알해변의 몽돌은 예송리해수욕장의 갯돌과는 또 다르다. 공룡알처럼 굵고 둥글둥글해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날 정도다. 몽돌이면 어떻고 갯돌이면 어떤가. 맘 편한 휴식을 선사하는 보길도 해변은 코로나19 시대에 딱 어울리는 ‘언택트’ 관광지다.
박준규 대중교통여행 전문가 http://traintrip.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