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비단 1500미터 차르르~ 예가 임진적벽이렸다
자박자박 소읍탐방
<80>연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
연천 임진강 주상절리가 저녁 햇살에 붉게 물들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돌단풍과 담쟁이덩굴이 수직 절벽을 발갛게 장식한다. 개성의 '송도팔경' 중 하나인 임진적벽은 한탄강 지질공원에서도 가장 웅장한 풍광을 자랑한다. |
땅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다. 한탄강 지질공원은 국내 최초로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질공원으로 북한 평강군에서 발원한 한탄강과 연천의 임진강 합수부를 포함한다. 철원 포천 연천을 아우르는 이 지역은 2015년 국가지질공원에 이어, 지난 7월 국내에서 네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약 54만~12만년 전 여러 차례의 화산폭발로 용암이 흘러 형성된 한탄강은 현무암 절벽, 주상절리와 폭포 등 독특한 지형과 아름다운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연천에는 한반도 최초 인류부터 이 땅에서 번성하고 소멸한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포개져 있다.
물굽이마다 보석처럼 쏟아져 내리는 주상절리
연천 한탄강 지질공원의 출발점은 전곡리선사유적지다.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 대지 위에 자리 잡은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1977년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비롯해 현재까지 6,000여점의 석기와 토기 등이 발견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고고학과 지질학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일대는 현재 넓은 잔디밭과 산책로를 갖춘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전곡선사박물관을 중심으로 바비큐, 활쏘기, 석기 만들기 등 다양한 구석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인 전곡리선사유적지는 넓은 잔디밭과 산책로를 갖춘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
연천 한탄강 지질공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치는 재인폭포. 장마 때 물에 잠기면서 올해 풍광은 예년만 못하다. |
적당히 비가 내린 2018년 7월 재인폭포 풍경. 하얀 물줄기와 초록의 물웅덩이가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
연천읍 재인폭포는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경관으로 꼽힌다. 줄타기 명인이자 광대인 ‘재인’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북쪽 지장봉에서 흘러내린 작은 하천이 높이 18m에 달하는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으로 쏟아진다. 천연기념물 어름치와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줄기 아래에 초록 물웅덩이가 신비로움을 자아내는데, 올해는 주변 수목에 흙먼지가 묻어 있고 일부는 말라 죽어 풍광이 예전만 못한다. 지난여름 폭우 때 하류의 한탄강댐이 물을 가두면서 폭포 전체가 잠기는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천에서 으뜸으로 꼽는 관광지라 일대를 국화 화분으로 장식하고, 폭포를 정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출렁다리를 개설해 가을의 정취를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다.
백의리층은 주상절리, 판상절리, 베개용암 등 여러 지층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지질 자연학습장으로 꼽힌다. |
백의리층의 주상절리. 절벽 상층부에서 쏟아지듯 매달려 있다. |
백의리층 판상절리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분홍장구채가 곱게 꽃을 피웠다. 한탄강 지질공원 일대에서 관찰되는 멸종위기종이다. |
백의리층의 쏟아질 듯한 주상절리. 다양한 형태의 보석이 박힌 것처럼 보인다. |
인근 백의리층은 한탄강의 지층과 특징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약 200m 짧은 탐방로에서 쏟아져 내릴 듯한 주상절리와 판상절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마그마가 응고하면서 생기는 다각형 기둥인 주상절리는 흔히 6각형으로 가지런한데, 이곳 주상절리는 오각형 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인 게 아니라 절벽 상단에서 부챗살처럼 퍼지며 흘러내릴 듯한 모양이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아래로 너와를 포개 놓은 것 같은 판상절리, 뜨거운 용암이 지표면과 만나 깨지고 그을린 클링커(clinker), 치약을 짜 놓은 것처럼 둥그렇게 생긴 베개용암, 그리고 맨 아래의 자갈층(백의리층)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이다.
베개용암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우라지베개용암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아우라지는 포천에서 흘러온 영평천이 한탄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붙은 지명이다. 베개용암은 포천 창수면에 있지만 전망대는 연천 전곡읍 땅이다. 강 건너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데, 베개를 차곡차곡 쌓은 모양 같기도 하고, 통나무가 결대로 갈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베개를 쌓아 놓은 것같은 아우라지베개용암. 강 건너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
60m 높이의 바위봉우리인 좌상바위는 평평한 용암대지로 이루어진 한탄강에서 단연 돋보인다. |
아우라지베개용암에서 조금 내려오면 약 60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좌상바위가 있다. 중생대 백악기 말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으로 커다란 투구를 엎어 놓은 모양이 압도적이다. 일대에서 단연 돋보이는지라 좌상바위는 오랜 기간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신선이 노닐던 선봉바위, 풀무 모양을 닮았다 해서 풀무산, 한국전쟁 당시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자살바위 등으로 불렸다. 무엇보다 궁평리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져 이 마을 좌측에 있는 커다란 바위라는 뜻에서 지금은 좌상바위로 불린다.
이곳에서 카약을 타고 약 4km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지질공원의 비경이 펼쳐진다. 협곡 위는 평평한 들판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지만 강에서는 수직의 바위 절벽만 보인다. 한두 차례 급류가 있지만 대체로 물살이 잔잔해 유영하듯 미끄러지며 태곳적 자연으로 빠져든다. 연천군은 본격적으로 한탄강 카약 탐방 프로그램을 시행하기에 앞서 16~25일 사이 5일간 하루 3회 무료 체험을 실시한다. 체험 인원은 회당 20명으로 ‘연천카약(cafe.naver.com/yckayak)’에서 신청할 수 있다.
연천군은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을 알리기 위해 카약 투어 프로그램을 시범 실시하고 있다. 찻길로는 닿을 수 없는 한탄강의 비경으로 빠져든다. |
좌상바위에서 카약을 타고 내려가면 한탄강의 비경 속으로 빠져든다. 인공구조물처럼 보이지만 대지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탄강 협곡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좌상바위에서 카약을 타고 내려가면 발길이 닿지 않은 태곳적 한탄강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
임진적벽은 한탄강 지질공원에서 가장 웅장한 경관을 자랑한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도감포)에서 임진강 쪽으로 조금만 거슬러 오르면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은 수직의 주상절리가 약 1.5km 이어진다. 가을이 되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돌단풍과 절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곱게 물들어 전체 구간이 이름처럼 적벽(赤壁)으로 변신한다. 특히 해질 무렵이면 저녁 햇살에 일대가 붉은 기운에 휩싸인다. 과거 개성의 송도팔경 중 ‘장단석벽’으로 이름을 올린 장관이다. 임진적벽은 군남면 땅이지만, 바라보는 곳은 미산면 동이리다. 내비게이션에 ‘임진강 주상절리’ 혹은 ‘동이리 주상절리’를 입력하고 찾아간다.
송도팔경의 하나인 임진적벽이 저녁 햇살에 발갛게 물들었다. 병풍을 펼친 것 같은 절벽이 1.5km 가량 이어진다. |
연천 핫플레이스…사진 찍기 좋은 3개의 고구려성
유네스코는 ‘지질학적 희귀성과 중요성뿐만 아니라 생태ㆍ역사ㆍ문화적 가치도 함께 지닌 지역’을 지질공원으로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강의 고구려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가장 부합한다. 연천에는 쌍둥이처럼 닮은 3개 고구려성이 있다. 고구려하면 흔히 떠올리는 호방함이나 웅장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아담한 성으로, 요즘 연천에서 인증사진을 찍는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고구려의 임진강 유역 방어 진지인 호로고루. 동쪽만 막은 낮은 보루가 최근 연천의 인증사진 명소로 뜨고 있다. |
임진강 절벽 위에 쌓은 호로고루. 흙을 다지고 석축을 쌓은 다음 다시 흙으로 덮었다. |
여행객들이 호로고루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여행객들이 늘어나자 연천군은 호로고루로 오르는 길에 돌계단을 설치했다. 이 지역에서 나는 현무암이 아니어서 조금은 아쉽다. |
먼저 장남면의 호로고루. 임진강의 다른 이름인 호루하에 있는 옛 보루(古壘)라는 의미이니 따로 성(城)이라는 명칭이 붙지 않는다.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과 '성'을 의미하는 '구루'가 합친 말이라는 설도 있다. 호로고루는 551년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한강 유역을 상실한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약 28m 높이의 수직 단애가 천혜의 성벽을 이루고 있는 가오리 모양의 긴 삼각형 대지 위에 터를 잡았다. 두 면을 임진강과 샛강이 둘러싸고 있어 실제 보루는 동쪽에만 쌓았다. 흙을 여러 번 다진 다음 돌로 성벽을 쌓고 다시 흙을 덮은 형태로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적절하게 결합했다고 설명하는데, 겉보기는 한쪽 끝이 살짝 둥근 길쭉한 둔덕 모양이다.
아래서 보면 부드러운 능선 위로 하늘만 펼쳐져 풍경이 단순하면서도 시원하다. 사진 명소로 이름난 이유다. 이런 지형에선 하늘, 특히 구름의 모양이 멋진 사진을 연출하는 핵심 요소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번져도 예쁘지만, 때로 농담이 짙은 먹구름도 환상적이다. 노을이 붉게 번지는 저녁은 말할 것도 없다.
호로고루에서 본 임진강 풍경. 임진강 물류의 중심인 고랑포가 있던 자리였지만 현재는 강 언덕 위에 고랑포역사공원만 남아 있다. |
연천 고랑포 뒤편의 경순왕릉. 경주 이외 지역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다. |
고려 왕과 충신들을 배향하는 숭의전. 고려에 대한 조선 왕조의 미안한 마음과 예우가 감지되는 시설이다. |
호로고루에서 내려다보이는 강 주변은 최대 2만여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랑포구였다. 마포에서 소금을 실은 배와 개성의 인삼을 실은 배가 오르내리는 임진강 물류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고랑포구역사공원’에서나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고랑포구 뒤편에는 경순왕릉이 있다. 경주 이외 지역에 남은 유일한 신라 왕릉이다. 경순왕(927~935년 재위)은 국가의 운세가 기울자 왕건에게 순순히 나라를 물려준 후 978년 개성에서 세상을 떴다.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기를 원했을 테지만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고려 조정은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운구를 막았다고 한다.
미산면 당포성은 삼각형 대지 위에 동쪽 성벽만 남은 모양이 딱 호로고루의 축소판이다. 다만 보루 위에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조금은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당포성 인근에는 숭의전이 있다. 조선 태조가 묘(廟)를 세우고 정종 원년(1399)에 왕건을 비롯한 고려 여덟 왕을 제사 지낸 곳이다. 문종에 이르러서는 고려조의 충신 15인을 함께 배향하고 ‘숭의전’이라 이름한 후 고려 왕족의 후손들에게 관리를 맡겼다. 신라에 항복을 받아낸 고려도 결국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포성은 호로고루의 축소판이다. 보루 가운데에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
은대리성 보루는 연천의 3개 고구려성 중에서도 가장 낮다. 길쭉한 보루 위로 드넓은 하늘이 펼쳐진다. |
전곡읍의 은대리성 역시 한탄강과 차탄천 사이 용암대지에 낮게 쌓은 평지성이다. 길쭉하게 이어진 보루가 자연스럽게 하늘과 경계를 이뤄 역시 피사체가 돋보이는 사진 명소다.
연천=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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