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여성해방의 꿈, 이제야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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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나혜석 전집’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여성해

한국최초의 여성서양화가 나혜석은 문필가로, 민족주의자로, 여성행방론자로, 다면의 삶을 살다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이는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다. 과거는 현재의 관점에서 늘 새롭게 해석된다. 지성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잊혔던 인물이 새롭게 발견되고 독해되어 지성사를 더욱 역동적이며 풍요롭게 한다. 예를 들어, 광복 직후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가 발굴됨으로써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도 민족독립을 염원하는 등불이 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우리 현대 지성사에서 현재와 과거의 대화로서의 역사의 의미를 일깨워준 대표적인 인물로는 나혜석을 꼽을 수 있다. 나혜석은 근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만 기억됐을 뿐 적잖이 잊힌 존재였다. 그런데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70년대 초반 나혜석을 재발견했다. 이후 나혜석의 삶과 예술은 새롭게 조명되고 해석됐다. 여성학자 김은실은 나혜석의 문제제기가 우리 사회에서 1990년대에 들어와 여성들의 역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국문학자 이상경 역시 나혜석이 화가이자 작가였고 민족주의자였으며 또 시대를 앞서 여성해방론을 주창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나혜석은 우리 현대사에서 여성해방과 성평등을 선구적으로 추구한 선각자였다. 김은실의 말처럼 영국에 버지니아 울프가, 프랑스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있었다면, 우리 현대 지성사에선 나혜석이 존재했다. 나혜석은 선각자로서의 영광을 누린 동시에 그 고독을 감내해야 했다. 이 기획에서 나혜석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나혜석의 삶과 활동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여성해

1920년 나혜석은 변호사 김우영과의 연애결혼으로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혜석은 1896년 경기 수원에서 태어났다. 1910년 서울 진명여학교에 입학해 1913년 최우수로 졸업했다. 1914년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해 화가의 꿈을 키우면서 에세이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18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나혜석의 삶에서 주목할 것은 독립운동에의 참여였다. 1919년 3ㆍ1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이로 인해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한 다음 1921년 경성일보사에서 우리나라 두 번째로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의 활동은 눈부셨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수상했고, 화제의 에세이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나혜석의 삶에서 전기를 이룬 것은 1927년에서 1929년까지의 유럽과 미국 여행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파리, 베를린, 런던,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에 체류했다. 그림을 공부하고 여성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구 문화와 문명을 체험하며 배웠다. 파리에 머물렀을 때 그는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과 만나 알게 됐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나혜석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귀국한 나혜석은 전시회를 열고 여행기를 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1930년 김우영과 이혼했다. 이런 개인적 변화에도 그는 꾸준히 글과 그림을 발표했고, 1933년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했다. 이 때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에 전통적 인습에 구속 받는 정조 관념을 비판하는 ‘이혼 고백장’(1934)과 ‘신생활에 들면서’(1935)를 잇달아 실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나혜석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지만 과거와 같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수덕사 등 여러 사찰들에 머물렀고, 양로원에 맡겨졌다. 나혜석이란 이름은 서서히 잊혀졌다. 광복을 이룬 지 3년이 지난 1948년 그는 서울 원효로에 있는 시립 자제원에서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세기 전반을 대표했던 ‘신여성’의 삶의 마지막으로선 너무 쓸쓸하고 안타까웠다.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여성해

나혜석의 그림 '자화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혜석을 우리 지성사에 복원시킨 이는 이구열이다. 그는 1974년 ‘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발표해 나혜석의 삶과 예술을 새롭게 조명했다. 이구열은 말한다.


“정월(晶月) 나혜석은 (...)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이 땅의 근대 문화 개창기에 깃발 하나를 꽂고 나왔던 혜성이었다. 그러나 (...) 급기야 사회에서 이탈당하고, 그러면서도 끝끝내 독자(獨自)를 빛내려고 안간힘을 썼건만 지탱할 수 없었던 한스런 유성이기도 했다. (...)정월의 비운의 생애는 이 땅의 최초의 여성 유화가라는 명예로만 그치지 않았다. (...) 신문학 운동에 참가한 다감한 시인이었고, (...) 글을 많이 쓰고 잘 쓴 문필가였다.”


이구열의 선구적 저작 이후 나혜석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되고 구체화됐다. 첫째 나혜석의 업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서지학자 김종욱은 나혜석의 작품들을 모은 ‘라혜석: 날아간 청조(靑鳥)’(1981)를 펴냈고, 이상경은 나혜석 작품들을 편집하고 교열한 ‘나혜석 전집’(2000)을 출간했다. 국문학자 서정자는 ‘원본 정월 라혜석 전집’(2001)과 그 개정증보판(2013)을 나혜석기념사업회 간행으로 내놓았다.


둘째 나혜석의 문화적 복권이 이뤄졌다. 문화관광부는 2000년 ‘2월 문화인물’로 나혜석을 선정했고, 나혜석기념사업회는 1999년부터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을 연속 개최했다. 2005년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시는 나혜석을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를 조성했다. 이러한 나혜석의 복권에는 나혜석기념사업회 회장인 유동준의 역할이 컸다.


셋째 선구적 페미니스트로서의 나혜석이 재발견됐다. 나혜석은 누구였는가.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근대 작가였고, 근대적 신여성의 효시였다. 무엇보다 그는 여성운동의 선각자였다. 서정자의 말처럼 그는 여성해방을 꿈꾸고 추구한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작가’였다. 1990년대 이후 국문학자와 여성학자들은 나혜석의 삶과 예술과 실천을 재평가함으로써 그의 위상을 우리 현대사 속에 올바로 위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페미니스트로서의 나혜석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는 ‘이혼 고백장’과 ‘신생활에 들면서’, 그리고 입센의 희곡 ‘인형의 가(家)’ 우리말 번역의 마지막에 실린 노래 가사인 ‘인형의 가(家)’(1921)다. 나혜석은 말한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 기뻐하듯 /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 의무같이 /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 사명의 길로 밟아서 / 사람이 되고저.”

 

이처럼 나혜석은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존중 받기를 열망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남성과 평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자각이자 실천이었다. 이상경은 말한다.


“여성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 여성의 육체적 조건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여성의 입장에서 공론화시켜야겠다는 것, 그것이 물의를 일으키고 욕을 먹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여성의 역사에서 의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근대 조선여성으로서의 나혜석이 지닌 자의식이었다.”

선각자의 고독과 미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여성해

'나혜석 전집' 표지.

나혜석이 남긴 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다음의 구절이다.

“사 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신생활에 들면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나혜석은 시를 덧붙인다.

“펄펄 날던 저 제비 / 참혹한 사람의 손에 / 두 쭉지 두 다리 / 모두 상하였네. (...)그러나 모른다 / 제비에게는 / 아직 따듯한 기운 있고 /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 다시 중천에 떠오를 / 활력과 용기와 / 인내와 노력이 / 다시 있을지 / 뉘 능히 알 이가 있으랴.”

자신의 말처럼 나혜석은 선각자였다. 그러나 이 선각자는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에 거부당했고, 더 없는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났다. 선각자의 고독을 온 정신과 온몸으로 견뎌낸 이가 바로 나혜석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가 고투했던 여성해방과 성평등이 이제 새로운 시대정신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각자는 비록 고독한 삶을 살았더라도 그가 꿈꾼 미래는 결국 실현되는 법이다.


21세기 현재, 어느 나라에서든 인권, 자연과의 공존, 그리고 성평등은 결코 양도할 수 없는 시대적 가치들이다. 당당한 인간으로 살고 싶어 했던 나혜석의 꿈을 어떻게 현실화하고 구체화할 것인지는 우리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에 부여된 중대한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18.12.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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