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건설노동?” 애숙씨는 이 주문으로 8년을 버텼다

[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20>건설노동자 김애숙

“남자들 세계였지만 여자가 못할 일 아냐

동료들에게 일로 인정받을 때 가장 보람”

한국일보

8년 차 건설 현장 형틀목수 김애숙씨를 지난달 25일 경기 안산시 안산건설기능학교에서 만났다. 안산= 최주연 기자

“어영부영하면 말 나와요.” “뭘 해야 할지 몰라도 무조건 움직여요.” “가만히 있으면 다들 속으로 ‘놀러 왔구나’ 생각해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여자라서’다. 그것도 ‘여성 불모지’였던 건설 현장의 여성 노동자. 김애숙(47)씨는 8년 차 형틀목수다. 형틀목수는 건물을 지을 때 콘크리트를 부을 거푸집을 만드는 사람이다. 건물의 틀을 잡는 역할을 하니 허허벌판 때부터 현장에 투입된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


지금도 건설 현장에 여성 노동자가 드물지만, 애숙씨가 처음 발을 디딘 2016년엔 더했다. 그래도 ‘여성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로 인정받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건물에 따라서는 6, 7m 이상 높이에서 외나무다리 같은 ‘아시바(작업 발판의 일본어투 표현)'를 타고 다니면서 18~20㎏짜리 목재를 두세 개씩 지고 다니기도 해요. 처음에는 매일 어깨에 멍이 들었죠. 이제는 끄덕 없어요.”


맞다. 여자가 하기에 힘든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여자가 할 수 있겠어?’란 의구심의 눈초리가 그래서 억울하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다른 여성 노동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것도 그래서다. 일도 힘든데, 불신과 차별의 시선까지 견뎌야 했기에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연대하게 된다. 형틀목수로 7년 4개월. 어느새 애숙씨는 그가 늘 함께 부대끼는 자재들만큼이나 강해졌다.


애숙씨는 스무 살 때부터 노동자로 살았다. ‘비인’이 그의 고향이다. 오스트리아가 아닌 한국의 비인이다. 비인면은 충남 서천군에 있다. 조금만 잘못해도 지게 작대기를 들고 쫓아와 때리던 아버지가 무서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고향을 떴다.


안산에 있던 한 필기구 회사 공장이 그의 첫 직장이다. 월급은 적어도 여성 노동자들이 많고 일도 수월했던 첫 일터에서 15년을 일했다. 경영 사정으로 회사가 공장을 지방으로 옮기면서 그도 새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반도체 공장, 자동차 부품 공장을 전전한 끝에 찾은 일이 형틀목수다.


‘여기에서 살아남으려면 나 어떻게 해야 하지?’ 초짜 형틀목수 시절 애숙씨가 현장에 갈 때마다 했던 자문이다. 노동도 힘들었지만, 여자 탈의실은 꿈도 못 꾸고 아무데서나 용변을 처리하는 남성 노동자들을 보고 견뎌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일 아침 어떻게 출근하지’ 싶은 시절을 이겨내고 그는 살아남았다. 지금은 어느 현장에서나 여성 노동자로서는 선임이다.


남자들이 선점한 건설 현장에서 버텨낸 힘은,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 그는 매일 아침 현장에 나가기 전 외는 주문이 있다고 했다.


[실패①] ‘여자가 무슨 형틀목수’라는 편견
한국일보

그는 요즘 안산건설기능학교에서 '경사 형틀(계단 작업)'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다. 그가 실습 자재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안산= 최주연 기자

애숙씨를 만난 곳은 경기 안산건설기능학교다. 애숙씨는 7년 전 이곳에서 형틀목수 일을 처음 배웠다. 요즘은 계단 제작(경사 형틀)을 훈련하는 중이다. 형틀목수로서 작업 영역을 넓히려는 것이다.


그가 몸에 차고 있던 못주머니를 빼고 기능학교 한편에 있는 교실에 앉았다. 안전모를 벗자 가을인데도 머리칼이 땀에 젖어 있었다.


-땀이 흥건하네요.


“여름에는 말도 못해요. 하하.”


-못주머니에 못만 있는 게 아니네요.


“그렇죠. 시노(끝이 휜 쇠 막대기), 망치, 줄자, 연필, 마카(펜), 칼, 종류별 못까지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요.”


-무게도 상당하겠어요.


“재어 본 적은 없는데 5㎏은 족히 될 것 같아요. 하루에 8시간은 이걸 차고 있죠. 처음에는 어깨가 너무 아프더라고요.”

한국일보

그가 몸에 차고 있는 것이 못주머니다. 시노(끝이 휜 쇠 막대기), 망치, 연필, 마카, 여러 종류의 못, 줄자 등을 늘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안전모와 안전화도 필수품이다. 안전화는 못 같은 날카로운 물질에 찔리지 않도록 발을 보호한다. 안경도 자외선이 차단되는 것을 써야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안산= 최주연 기자

-어떻게 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됐나요.


“산악회에서 만난 언니가 두 달 만에 등산을 나왔기에 이유를 물어보니까 요즘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애숙아, 너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일을 쉬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묻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죠. 언니가 위치를 알려주면서 일단 거기 가서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처음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온 거예요.


“네, 이곳에 와서 알았죠. 하하. 제가 여기 뭐 하는 데냐고 물어보니까 선생님이 ‘(지금) 주차장 지어야 한다’면서 바로 교육을 시작하더라고요. 뭘 더 물어볼 새도 없었어요.”


-어땠나요.


“그때 교육생이 한 20명쯤 됐는데 여자는 저 혼자였어요. 그런데 기능학교 다닐 때는 힘든 게 별로 없었어요. 분위기도 좋았고요. 제가 막내였기 때문에 (다른 교육생) 아저씨들이 잘 가르쳐주고 챙겨줬죠.”


-얼마 만에 실제 현장에 투입됐나요.


“저는 같은 과정을 두 번 이수하고 나갔어요. 교육 기간이 한 달인데, 저는 두 달을 배운 거죠. 기능학교에서 배워도 현장에 나가면 힘들다고 하기에 적응을 못할까 봐 걱정이 돼서요.”


-실제 나가 보니 어땠어요.


“당시엔 여자 형틀목수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이해를 못했죠. ‘이번에 온 형틀목수가 여자라고? 아니, 여자가 무슨 형틀목수를 해.’ 이런 반응이었죠. 처음엔 저한테 다들 말도 안 걸었어요. 하하.”


-일이 힘들기도 해서 그렇겠죠.


“형틀목수가 쓰는 자재들이 다 무겁거든요. ‘투바이’, ‘오비끼’, ‘다리끼’ 같은 목재들은 처음엔 물을 먹어서 엄청 무겁거든요. 그걸 메고 다니면서 일을 해야 하니까 여자가 형틀목수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겠죠.”


-온통 남자뿐이라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여자가 엄청 눈에 잘 띄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많이 들었던 말이 ‘무조건 움직이고, 뭐든지 하라’는 거였어요. 그렇잖아도 여자와는 일을 안 하려고 할 텐데, 어영부영한다는 말까지 나오면 안 된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예상은 했지만, 만만치 않구나 싶었죠. 그래서 자재도 한 개만 드는 게 아니라, 내가 들 수 있는 만큼 여러 개를 일부러 메고 다녔어요. 키도 156㎝밖에 안 되지만. 하하. ‘여자라서 약한 척한다’는 말 듣기 싫어서요.”


[실패②]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한국일보

안산건설기능학교는 그가 처음 형틀목수 일을 배운 곳이다. 안산= 최주연 기자

-실수도 많이 했겠죠.


“처음엔 엄청 많이 했죠. 못을 아래에 박아야 하는데 위에다 박고, 가운데에 설치하라고 했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엉뚱한 곳에다 하고. 반장이 와서 ‘이거 설치하라고 했더니 왜 안 해놨어요?’라고 하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기다 했는데요’라고 하기도 여러 번이었죠. ‘오비끼 가져오라’고 하는데 처음엔 뭐가 뭔지 헷갈려서 ‘뭘 가져가야 하지’ 고민하다가 가져가면 ‘이건 오비끼가 아니잖아요!’라는 호통도 많이 듣고요. 그때마다 울 수도 없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거예요. 하하.”


-언제쯤 되니 할 만하던가요.


“3개월쯤 되니까 그런 실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죠.”


-처음으로 ‘일 잘한다’고 인정받은 게 언제인가요.


“6개월이 지나서예요. 일당이 5,000원 더 오른 계기였죠. 시멘트 바닥에 못을 박을 때는 일반 못이 아니라 ‘공구리못(콘크리트용 못의 일본어투 표현)’을 써야 하거든요. 공구리못 중 제일 긴 게 90㎜짜리예요. 70㎜짜리를 박아도 되는데 그날은 현장에 90㎜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걸로 100개쯤을 박았죠.”


-그냥 못도 그만큼 박기가 힘들 것 같은데.


“게다가 90㎜ 공구리못은 남자들도 힘들다고 안 박으려고 하죠. 20개 정도 박을 때까진 별 느낌이 없는데 100개 이상 박으면 팔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죠. 그날 반장이 ‘못질 잘하네! 일당 올려줄게’라는데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집에 가서 얼음찜질을 하면서도 신이 났어요.”


-경력에 따라 일당도 오르나요.


“처음엔 양성공 단가, 6개월 지나면 준기능공, 1년 넘으면 팀장이 평가해서 기능공 단가를 줘요. 저는 2019년에 기능공이 됐죠. 첫 일당이 15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25만 원을 받아요.”


-그럼 기능공이 됐을 때도 참 좋았겠네요.


“부담감이 있었어요. 나도 남자들하고 똑같이 일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힘은 남자를 따라갈 수가 없잖아요. ‘여자한테 왜 기능공을 줬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하는 걱정도 들었죠. 실제 (남자들이) ‘왜 여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돈을 받느냐’고 따지는 일이 있으니까요.”


-여성 노동자들이 특히 화장실이나 탈의실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던데요.


“공사 현장이 처음엔 허허벌판이거든요. 아무것도 없어요. 화장실이 지상에 있긴 하지만 멀고요. 그러니까 휴식이나 식사 시간까지 참는 거죠. 작업하다가 언제 거기까지 다녀오겠어요. 옛날엔 그나마 있는 여자 화장실도 남자들이 써서 못갈 때도 많았죠. 요즘은 'TBM(툴박스미팅ㆍ작업 전 모임)' 시간에 ‘남자가 여자 화장실 쓰는 것도 성희롱’이라고 엄청 주의를 줘요. 탈의실도 기대하기 힘들고요. 요즘엔 그냥 차 안에서 갈아입어요.”


-첫날 일하고 돌아갔을 때 어땠는지 기억 나세요.


“그래도 오늘 하루 잘 끝났구나. 오늘 하루 잘 해냈으니, 내일도 버텨보자.”


-건설 현장에도 여러 일이 많은데 왜 형틀목수를 했나요.


“여기(안산건설기능학교)가 형틀목수 기능학교였어요. 그러니까 고르고 말고 할 수가 없었죠. 실제 현장에 가보니까 도배, 방수, 타일, 전기, 배관 같은 여러 일이 있더라고요. 타워(크레인) 기사도 현장에서 처음 봤어요. 타워 기사 중에도 여성이 많아요.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젊었을 때 건설 일을 배웠더라면 타워 기사를 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할 엄두가 나지 않아요.”


[실패③] ‘저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한국일보

건설경기 악화, 정부와 건설노조의 마찰로 그는 석 달째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여성 노동자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의 걱정이다. 안산= 최주연 기자

-필기구 제조 공장에서 15년이나 일했죠.


“셋째 언니가 다니고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 하고 싶은 일을 찾기보다는 무조건 아버지와 떨어져서 지낼 수 있는 게 우선이었어요. 그래서 안산에 있던 필기구 공장에 오게 됐죠. 15년 8개월 일했어요.”


그는 그간 거친 일터마다 일한 기간을 꿰고 있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필기구 회사를 그만둔 뒤, 반도체 공장에 들어갔지만 “손이 빠르지 않다”고 3일 만에 잘렸고, 그 다음엔 휴대폰 부품 회사에 들어가 내장 메모리에 스티커를 붙이는 야간 작업을 1년 2개월간 했다. 주간 노동을 하고 싶어 들어간 자동차 부품 회사에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해 3년 5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그 바람에 실업급여도 받지 못했다. 작업을 하다 손바닥 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는데도 고작 3일 쉬게 하고 출근하라고 했던 회사다. 크고 작은 부당한 대우가 쌓여 어느 날 그가 폭발했다. 그는 작업팀장에게 “우리는 사람 아니에요? 아무래도 여기서는 사람이 아닌가 봐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만뒀다.


-일한 기간이 꽤 되는데 자격증도 있나요.


“가스 기능사와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요. 첫 직장 그만둔 뒤에 혹시 몰라 배워뒀죠. 거푸집 자격증도 있어요. 형틀목수를 하면서 땄죠. 혹시나 ‘여자라서 그런 자격증도 못 따는 거야’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실제 형틀목수 일을 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거든요. 남자 형틀목수들도 대부분 없죠. 현장에서는 필요 없는 자격증이지만, ‘자격 없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따뒀어요.”


-건설 현장에선 작은 실수가 사고로 이어지기도 할 테니 무척 조심스러울 것 같아요.


“아시바 위에 올라가서 안전벨트 하나에 의지해서 작업도 해야 하고,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과 소리를 질러가면서 소통해서 일해야 하니 호흡도 잘 맞아야 해요.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어도 머리에 뭐가 부딪히면 엄청 아파요. 몸도 여기저기 자주 다치고요. 집에 가서 씻을 때가 돼서야 ‘여기에 왜 멍이 들었지’, ‘왜 머리가 띵하지’ 하죠. 물기 먹은 코팅 합판에 미끄러져서 구르기도 많이 굴렀고요. 그래도 제가 통뼈인가 봐요. 아프긴 하지만 괜찮더라고요. 하하.”


-현장에서 서러운 일은 없었나요.


“1년 전 위암 진단을 받아서 수술을 했어요. 다행히 초기라서 항암 치료는 하지 않았죠.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오래 쉴 수가 없었어요. 한 달 있다가 현장에 나갔는데 아무래도 전처럼 힘을 못 쓰겠더라고요. 당시 반장이 대놓고 다른 사람한테 저를 두고 욕설을 하는 걸 들었어요. 그때 ‘내가 저런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현장에 있어야 하나’ 싶었죠.”


-작업 내내 현장에서 괴로웠을 텐데 어떻게 했나요.


“다행히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그 반장이 먼저 현장을 나갔어요. 저는 끝까지 버텼고요.”


-이 일이 주는 보람은 뭔가요.


“하다 보면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터득해요. 그런 게 재미있죠. 새로운 기술을 하나씩 배울 때마다 기쁘고요. 동료들이 ‘오늘 수고했어. 네 덕분에 작업 수월하게 했다’고 인정해 줄 때도 엄청 보람을 느끼죠. 일로 인정받은 거니까. 그런 보람 덕분에 계속 출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몸을 쓰는 일 해보니까 어떻던가요.


“힘들어요. 저녁이면 늘 ‘힘들다. 아, 힘들다’ 하면서 집에 들어가요. 그래도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나오죠. 이제는 다른 일을 하기도 어렵고, 내 일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패란] 안주하는 게 곧 실패
한국일보

“지금 나를 버티게 해주는 건 바로 나.” 그는 오늘도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안산= 최주연 기자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15만4,000여 명(8.5%)이었던 건설 현장 여성 노동자는 올해엔 26만2,000여 명(12.5%)으로 늘어났다. 그래도 아직 건설 현장 노동자 열 명 중 아홉은 남성이다.


-다른 여성 건설 노동자를 만나면 어떤가요.


“제가 전국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소속이거든요. 여성 건설 노동자 모임을 많이 해요. 수련회를 하거나 토론회도 열죠. 그들도 저와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 느끼는 공감대가 있어요. 여성이 드문 현장에서 일하는 소수자로서 연대하게 되는 마음이 있죠. 존재만으로 위로가 돼요.”


요즘은 일할 수 있는 현장까지 줄어 고충이 더 커졌다. 그는 8월부터 벌써 석 달째 쉬고 있다. 건설경기가 나빠진 탓이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를 ‘건폭(건설 폭력배)’으로 몰아붙이고 검경까지 수사에 나서면서 건설사들이 건설노조 소속 노동자들을 꺼리는 분위기도 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맨날 현장에서 몸 쓰던 사람이 쉬려니까 오히려 힘들죠. 이 시기에 과연 여성들이 얼마나 많이 살아남을지 걱정도 돼요. 건설 노동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은 사람도 많아요.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가 언젠가는 끝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어요. 새로운 기술도 배우고요.”


-이런 때도 혹시 남성보다 여성이 더 일을 찾기가 어려운가요.


“건설 경기가 안 좋아지면, 여성 노동자를 더 쓰지 않으려고 해요. 저도 오랫동안 함께 일한 남성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도 했는데 팀장들이 꺼리나 보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건설 현장은 아직도 남자들 세계구나 싶어요.”


-일 시작할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요.


“엄마한테는 처음부터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았어요. 뒤늦게 아시고 나서 저를 볼 때마다 ‘그만두라’고 하셨죠. 제가 그랬어요. ‘엄마, 건설 현장에 여성이 별로 없지만 내가 열심히 하다 보면 앞으로 많이 늘어날 거야. 그간 남자들이 많이 했을 뿐이지, 여자가 못하는 일이 아니야.’ 엄마가 몇 해 전 돌아가셨는데, 걱정하셨던 게 마음에 많이 남아요.”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죠.


“믿을 건 나밖에 없으니까요.”


-일이란 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도구죠. 어려서부터 엄마가 ‘먹고살 수 있는 직업만 있으면 혼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세상이니 꼭 누구(배우자)를 찾아서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꾸준히 일해왔죠. 자연스럽게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그간 해온 실패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실패’란 단어를 김애숙만의 언어로 정의해본다면 뭘까요.


“저 어제도 실패했어요! 분야별 건설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기능대회가 있었거든요. 형틀목수는 오각기둥 만드는 게 과제였는데 4시간 안에 완성해야 해요. 제가 정말 잘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부족했어요. 10분 만 있었어도 완성했을 텐데, 1등은 몰라도 2등은 했을 것 같은데! 너무 아까워요. 어쨌든, 실패란 하나만 생각하는 게 실패 아닌가 싶어요. 제가 첫 직장에서 15년 8개월 일했다고 했잖아요. 너무 안주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새로운 일들에 도전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 같거든요. 용접 일을 한다거나, 타워크레인 기사가 된다거나. 아예 형틀목수를 그때 했을지도 모르고요.”


-그 경험에서 얻은 ‘삶의 도’는 뭔가요.


“제가 매일 아침 저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두 팔을 교차해 자신을 토닥거리며) ‘애숙아, 훌륭하게 잘 버텼어. 오늘도 힘내보자!’ 요즘은 거기에다 ‘곧 좋은 날이 올 거야!’까지 더해요. 원래는 ‘애숙아, 오늘도 파이팅!’이라고 했는데, 형틀목수를 하면서는 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스스로 쓰다듬어주게 되더라고요. 나를 위로하고 응원할 사람이 나밖에 더 있나요.”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 그간 있었던 고비를 여러 번 물었다. 그런데 그는 “힘든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아마 힘든 일이 엄청 많았을 거예요. 욕먹은 일도 수없겠죠. 그런데 잘 생각이 안 나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마음에 두면 내일 아침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일이 주는 고난은 잊고 스스로를 위안하기. 그가 매일 새 마음으로 건설 현장 바닥에 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힘이다. 한번 그의 주문을 따라 해 볼 일이다. 내 두 손으로 나를 토닥이면서.


안산= 김지은 선임기자 luna@hankookilbo.com

2023.11.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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