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망할 텐데”라면서도 봉준호 데뷔 지원한 차승재

[컬처]by 한국일보

충무로 뚝심 제작자 차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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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재 싸이더스 전 대표가 2004년 12월 영화 '역도산'의 개봉을 앞두고 포스터 앞에서 환히 웃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던 차승재(현 아시안필름마켓 위원장) 전 싸이더스 대표는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회장,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 등과 더불어 한국 영화의 중흥을 이끈 충무로 2세대 프로듀서였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의 르네상스기에 한국영화의 양적ㆍ질적 성장을 주도한 영화인들은 대개 주한문화원이나 영화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영화적 감각과 꿈을 키우고 충무로에 들어온 영화광 출신이었다. 그러나 차 전 대표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영화보다는 문학에 깊이 심취해있던 독서광이었고, 영화계 입문 이전에는 남다른 장사 수완을 발휘한 사업가였다.


어린 시절 만화책에서 출발한 독서 습관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읽고, 고등학교 1학년 즈음엔 현대문학이나 문학사상 같은 문학지를 탐독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문학소년’까지는 아니었고 창작에는 재주가 없었다고 자평하지만, 다년간 독서하고 연극 공연을 찾아 다니면서 축적한 문화적 경험은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잠재성 있는 각본을 감별해내는 안목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부에 흥미를 잃은 채 불량학생으로 나날을 보낸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청소년기의 차 전 대표는 서울 현저동의 산동네에서 살았는데, 이 동네에서 일어난 ‘위조상품권 대량제작 사건’은 훗날 그가 제작하는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에 모티프를 제공하게 된다.

카페와 옷장사로 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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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청춘의 초상을 그려낸 '비트'는 흥행에 성공하며 싸이더스의 물적 토대를 다졌다. 싸이더스 제공

한국외국어대 불어교육과 81학번으로 들어와 1986년에 졸업한 26세의 차 전 대표는 바로 사업 전선에 뛰어든다. 어학 특기생으로 추천받아 금호상사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아, 38만8,000원을 한 10년 받다가 그만 두는 게 직장생활이구나”하는 생각에 취직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결혼준비 자금으로 모아둔 2,000만원에 일수까지 보태 방배동에 카페를 열었는데, 겁 없이 시작한 장사는 한 달 매출 800만원을 찍으며 1년 반 동안 성업했고 업종을 바꿔 남대문시장에서 보세옷장사를 했는데 그의 사업 운은 쭉 승승장구했다.


영화계와의 인맥은 이 시기쯤부터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차 전 대표는 학과는 달랐지만 ‘박봉곤 가출사건’(1996)과 ‘화산고’(2001)를 연출하게 되는 김태균 감독과 자주 술잔을 기울이는 절친한 사이였는데, 카페를 운영할 때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로 들어가 있던 김 감독은 카페에 동기들을 자주 데리고 와 놀면서 안면을 트게 했다.


이 당시 친구로 사귀게 된 사람들이 ‘그대 안의 블루’(1992)의 이현승 감독, ‘비트’(1997)와 ‘무사(2001), ’봄날은 간다‘(2001)를 거쳐 ‘살인의 추억’(2003)과 ‘역도산’(2004)에 이르기까지 차 전 대표가 제작한 다수의 영화에 카메라를 잡는 김형구 촬영감독, 그가 기획을 맡은 ‘101번째 프로포즈’(1993)의 메가폰을 쥐는 오석근 감독 등이었다. 이명세 감독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의 현장 일을 돕기도 했다.


친척의 권유로 옷가게를 처분한 돈을 부동산에 투자한 차 전 대표는 사기를 당해 3개월만에 2억2,000만원을 날리게 된다. 삽시간에 빈털터리가 된 그는 영화인 친구 아홉 명이 합숙하던 세 칸짜리 집에 얹혀 지내다가 오석근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1991)에서 제작부 일의 대략을 경험하고, 장현수 감독의 ‘걸어서 하늘까지’(1992)에 제작부장으로 참여하면서 충무로에 첫 발을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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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기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빼어난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싸이더스 제공

영화사 신씨네를 운영하던 신철 대표,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 영화세상의 안동규 대표 등 당시 ‘트로이카’로 통하던 제작자들은 대학을 나와 영화계에 투신한 인재들이었지만 현장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까지 제작부장이란 실상은 주먹으로 현장 일을 밀어붙이는 해결사 같은 것이었고, 대학까지 나온 고학력 인력은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세 사람은 말이 잘 통하면서 현장에 능숙했던 차 전 대표와 손잡고 일했다.


‘미스터 맘마’(1992)의 제작실장으로 신씨네에 들어간 차승재는 ‘101번째 프로포즈’부터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고, 영화세상에서는 양귀자 소설가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 기획시대에서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를 작업하게 된다. 장정일 소설가의 원작 소설을 받아든 차승재는 “장선우씨가 감독을 하고 문성근씨가 주인공을 하면 구색이 맞”고 “작품도 꽤 수준있게 나올 거라 생각”했고, 이 판단은 옳았다.

참신한 신인 발굴해 도전적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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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차승재 대표는 "망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봉 감독의 데뷔를 밀어줬다. 싸이더스 제공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서울 관객 38만명의 흥행을 거두었다. 유인택 대표는 수익으로 남은 4억원 중 5,000만원을 차승재에게 주었는데, 이 돈이 1995년 독립하여 영화사 싸이더스의 전신인 우노필름을 설립하는 밑천이 되었다.


차 전 대표는 ‘미스터 맘마’의 조감독이었던 김상진 감독을 끌어들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박중훈 주연의 ‘돈을 갖고 튀어라’(1995)는 코미디 장인 김 감독의 데뷔작이자 우노필름의 창립작이 되었다. 거액의 돈이 돈세탁되는 과정을 다룬 이 코미디물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겹치며 호재를 맞았다. 이어서 김 감독, 박중훈과 다시 합을 맞춘 ‘깡패수업’(1996)은 왜색 논란으로 심의가 보류되는 위기를 겼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정우성 주연의 ‘비트’(감독 김성수)가 서울 관객 34만명이 넘는 흥행을 기록하면서 우노필름을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된다. ‘비트’로 차 전 대표는 황금카메라상 제작공로상을 받았다.

“싸이더스라는 회사가 예전부터 흥행만을 위해 영화를 해온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에겐 어떤 암묵적 동의가 있는데, 설렁설렁 쉬운 건 하지 말자는 것이다. 센 것, 힘든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있는 편이다 보니 저항선이 없는 기획을 내보면 직원들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그런 시도를 계속할 거다. 한국시장이 굉장히 좁기 때문에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특정한 장르나 스타일로만 가긴 어렵다.”(씨네21 2001년 9월 6일 자)

제작 기반이 안정되면서 차 전 대표는 참신한 신인 감독들을 대거 발굴하는 동시에,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소재를 다루는 도전적인 시도로 한국 영화의 저변을 확대해나갔다. 모든 시도가 성공으로만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잠수함 영화인 민병천 감독의 ‘유령’(1999), 오승욱 감독의 ‘킬리만자로’(2000), 장준환 감독의 컬트 걸작 ‘지구를 지켜라’(2003),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2005), 한재림 감독의 ‘연애의 목적’(2005)은 성공한 사례를 답습하거나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제작자 차 전 대표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획들이었다.

“당시 영화계는 가족적인 분위기여서 시사회를 하면 감독들이 다 왔다. 끝나면 꼭 소주 사줘야 했다. 아무튼 얘네들이 ‘지구를 지켜라’ 본 직후 이구동성 “대박”이라는 거다. 김성수도 박찬욱도 좋다 그러고. 그러다 망했으니 이들을 믿을 수 있겠나. 그러다 3주 뒤 ‘살인의 추억’이 개봉했는데, 똑같은 놈들이 와서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 ‘야이 놈들아’하며 타박을 줬는데 이번엔 친구들이 맞췄다. 거의 600만명 정도 봤다. 한 마디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해였다.“(매일경제 2019년 10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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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재 대표는 봉준호 감독이 데뷔작으로 흥행 참패했음에도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을 적극 후원한다. 싸이더스 제공

‘모텔 선인장’(1997)의 조감독을 했던 초년의 봉준호 감독을 눈 여겨 본 차 전 대표는 감독으로 준비한 각본이 있으면 들고 와보라고 제안했다. 이때 받은 각본이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였다. “이거 하면 망한다”고 지적했지만 봉 감독은 이 영화를 고집했고, 결과는 전국 관객 5만2,000명의 참담한 실패였다.


그럼에도 차 전 대표는 봉 감독을 포기하지 않았고 다음 영화를 제안했다. 이때 봉 감독이 준비한 아이템은 얼치기 유괴범에게 납치된 아이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유괴범을 농락하는 이야기였다. 난색을 표하며 무게감 있고 진지한 작품을 원하는 차 전 대표에게 봉 감독은 다음 아이템으로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김광림 극작가의 희곡 ‘날 보러 와요’의 영화화를 제안한다.


두 배의 값을 치르고 원작자인 김 극작가에겐 흥행에 따른 인센티브를 약속하는 걸로 판권 문제를 해결한 차 전 대표는 이 작품을 온전히 봉 감독의 손에 맡겼다. 그렇게 탄생한 ‘살인의 추억’은 525만명이라는 흥행 성공으로 당시 궁지에 몰려있던 싸이더스를 회생시켰고, 거장으로 거듭날 봉 감독의 앞길을 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2020.05.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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