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 ‘구름계곡’에 번지는 연둣빛 봄… 사람이 떠나니 자연이 돌아왔다

한국일보

고창 운곡람사르습지에 연둣빛이 번지고 있다. 잎보다 먼저 핀 버들강아지 군집이다. 운곡습지는 30년 가까지 버려진 농경지가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서 산중 습지로 되살아난 곳이다.

녹색의 본뜻이 오염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녹색성장’ ‘녹색발전’ ‘녹색산업’은 본질적으로 형용모순이다. 어떤 형태로든 자연 훼손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자연보호’는 또 얼마나 오만한 표현인가. 인간은 잠시 자연을 빌려 쓰는 것일 뿐, 궁극적으로 자연이 인간을 보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고창의 운곡람사르습지는 사람이 떠난 자리가 ‘자연스럽게’ 회복 중인 골짜기다. 인간의 간섭이 없을 때 자연이 어떻게 되살아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잠시 빌려 쓴 오베이골, 다시 원시의 늪으로

람사르 협약은 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습지를 보존하기 위해 맺은 국제 협약이다. 1971년 카스피해 연안 이란의 람사르(Ramsar)에서 맺은 협약으로, 정식 명칭은 ‘물새 서식지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이다. 람사르 습지는 최소한 이곳만은 자연에 양보해야 한다는 절박한 공감대로 확보된 보호 구역이다. 국내에는 23개 지역의 습지와 갯벌, 늪이 등록돼 있다.


고창 아산면의 운곡습지는 10년 전인 2011년 4월 람사르 습지에 이름을 올렸다. 30년 가까이 버려졌던 농경지가 사람의 발길이 끊기자 자연스럽게 원시 습지로 복원된 곳이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산중 습지로, 완만한 계곡을 따라 형성돼 있다.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이후 조성한 탐방로는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만큼 접근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한국일보

운곡람사르습지 탐방안내센터에서 습지 입구 생태공원까지 운행하는 전동 '수달열차'.

한국일보

운곡습지 아래 운곡저수지에서 물새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한국일보

운곡저수지는 영광원전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소형 댐이다. 이 댐 건설로 주변 9개 마을 주민들이 농경지를 버리고 이주했다.

계곡 아래 운곡저수지 초입 탐방안내센터에서 시작한다. 이곳부터 차가 들어갈 수 없다. 우선 저수지 상류에 조성한 생태공원까지 전동 셔틀을 타거나 걸어야 한다. 약 3.4㎞ 거리다. 두 량의 전동차를 연결한 ‘수달열차’는 평일 6회(주말은 상황에 따라 증편) 왕복하며 요금은 편도 2,000원이다.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가는 평평한 길이기 때문에 걸어도 힘들지 않다. 단단한 황토로 포장한 도로에 전동차 외에 가끔씩 업무용 차량이 지나다닐 뿐이어서 걷기길이나 다름없다. 호수를 조망하기 좋은 몇몇 지점에 벤치가 놓여 있고, 일부 구간에는 대숲이 울창해 싱그러운 봄 기운을 만끽할 수 있다.


운곡저수지는 1984년 영광원자력발전소에 필요한 물을 대기 위해 건설한 소형 댐이다. 직선으로 약 20㎞ 떨어진 발전소까지 지금도 도수로를 통해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을 위한 댐 건설로 습지가 복원된 것은 한편으로 아이러니다.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주변 9개 마을이 물에 잠기고, 골짜기에서 농사를 짓던 158가구 주민들은 삶터를 떠나야 했다. 다섯 골짜기라는 뜻에서 오방골 혹은 오베이골이라 불리던 산골 마을이다. 습지로 복원된 계곡은 바로 오베이골 주민들이 농사를 짓던 논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집은 호숫가에 있는, 선산 김씨 문중에서 지은 운곡서원 건물 3채가 전부다. 1797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슬레이트 지붕에 파란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원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일보

운곡저수지 상류에 유일라게 남아 있는 운곡서원. 슬레이트 지붕이어서 전통서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일보

운곡람사르습지에 설치된 생태탐방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다.

생태공원에 도착하면 저수지 맞은편 길을 따라 운곡습지로 들어간다. 더는 찻길이 없고 오로지 걸어야 하는 길이다. 경치 좋은 관광지에 흔한 카페나 식당, 숙박시설은 물론이고 탐방로를 제외하면 인공 구조물도 거의 없다.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 야자 매트를 깔아놓은 탐방로 길모퉁이에 조류전망대가 하나 있다. 파랗고 잔잔한 수면에 유유히 헤엄치는 물새와 호수 주변으로 번지는 봄 빛깔이 선경인 듯 평화롭다.


본격적인 탐방로는 습지 위 목재 덱으로 이어진다. 덱 역시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힘들 정도로 좁다. 천천히 일렬로 걸어야 하는 구조다. 자연의 질서는 가지런하지 않다. 습지에 뿌리를 내린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엉켜 있다. 민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간간이 대숲도 형성돼 있다. 조금 높은 언덕에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고갯마루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계곡에 연둣빛이 번진다.

한국일보

탐방로에서 보는 운곡습지의 전형적인 모습. 물기가 축축한 땅에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엉켜 있다. 정돈되지 않았지만 효율적인 자연의 질서다.

한국일보

운곡람사르습지 탐방로 덱에 앙증맞게 청개구리 조형물이 올려져 있다.

한국일보

운곡람사르습지에 연둣빛이 번지고 있다. 꽃이 먼저 피는 버들강아지 군집이다.

한국일보

운곡람사르습지의 주종은 버드나무와 은사시나무다. 봄빛 오른 버들가지와 하얀 은사시나무가 대비된다.

호텔스 컴바인 배너 이미지1
한국일보

운곡람사르습지의 연둣빛 주인공은 버들강아지다. 연한 초록 꽃술 끝에 적색 꽃가루가 묻어 있다.

운곡습지에 가장 흔한 수종은 버드나무다. 잎보다 먼저 핀 꽃, 버들강아지 꽃술이 군집을 이루며 계곡을 뒤덮었다. 전체적으로 연한 초록이지만 가녀린 꽃술 끝에는 살짝 붉은 기운이 묻어 있다. 가장자리 산자락에는 은사시나무가 군락을 이뤘다. 하얀 가지가 하늘 높이 쭉쭉 뻗어 얼핏 자작나무숲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굵기와 높이는 자작나무를 능가한다. 수피에 다이아몬드 문양이 선명한 은사시나무 역시 버드나무과다. 개화는 다소 늦어 4월은 돼야 적갈색 꽃술이 늘어진다. 그때쯤이면 버드나무는 잎이 나고 초록이 한층 짙어진다. 제멋대로 피어난 산벚과 진달래까지 화사하게 계곡을 밝히면 본격적인 색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바닥에 항상 물이 고여 있으니 안개도 자주 낀다. 운이 좋은 날이면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처럼 환상의 ‘구름계곡’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한국일보

운곡람사르습지는 보기 드문 산중 습지다. 버려진 다랑논이 30년 세월을 거치며 자연으로 복원되고 있다.

한국일보

드론으로 본 운곡습지 풍경. 물기가 비치는 바닥에 뿌리 내린 버드나무 가지에 연둣빛이 번진다.

자그마한 물웅덩이에 쉼터를 겸해 조성한 생태연못을 지나면 탐방로는 서서히 오르막이다. 좁은 덱은 습지 가장자리를 들락날락하며 연결된다. 서두를 필요도 없거니와 빨리 걷기도 쉽지 않으니 오르막이라 해도 숨이 찰 정도는 아니다. 물기가 흥건한 바닥에는 옛 다랑논의 흔적도 보인다. 논두렁과 밭두렁은 지금도 물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나무만 무성해진 게 아니다. 2011년 조사에서 운곡습지에 서식하는 동식물은 500여 종이었는데, 지금은 멸종 위기 동물인 수달 황새 삵 담비를 비롯해 860여 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시각적 자극이 없으니 비로소 청각이 열린다. '돌돌 돌돌', 경사가 완만하니 물소리는 요란하지 않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 모를 온갖 새소리가 길동무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더 신비롭고 괴괴하다. 잠시 그 고요에 귀 기울이면 원시의 숲 한가운데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은희태 운곡습지 자연환경해설사는 숲의 소중함은 아이들이 더 잘 알더라고 했다. 자연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물으면 바로 ‘그냥 놔두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온단다. 어떻게 하면 돈 되는 자원으로 활용할까 궁리하는 기성세대에 비하면 미래가 희망적이다.

한국일보

연둣빛이 번지는 운곡람사르습지. 버드나무와 은사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가 무성한 오른편 사자락과 구분된다.

한국일보

버드나무 뒤로 은사시나무가 군락을 이룬 운곡람사르습지 골짜기에 봄이 번진다. 탐방로는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정도로 최소화했다.

장독대와 축대의 정체가… 세계 최대 고인돌유적지

운곡습지 탐방로를 따라 고갯마루를 넘으면 고창 고인돌유적지로 연결된다. 볕이 따스한 완만한 구릉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바위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고인돌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모양과 너무 달라 의심스러운데, 자세히 보면 아래 부분에 어떤 모양이든 작은 굄돌이 있다.

한국일보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고창 고인돌유적지. 바로 앞 하천 주변으로 440여 기가 밀집해 있다.

한국일보

고창 고인돌유적지도 한때는 마을이었다. 일부 고인돌은 장독대와 축대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인돌유적지로 알려지기 전까지 이곳에도 마을이 있었다. 더러는 가정집 장독대로 쓰이고, 논밭을 일구는데 방해가 되는 바위는 옮겨지고 훼손돼 원형을 잃었다. 그런데도 일대에서 확인된 고인돌이 440여 기에 달한다. 세계 최대 규모로 약 3,000년 전 선사시대 무덤으로 추정된다.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땅속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얹은 형태), 지상석곽식(굄돌 없이 낮은 판석을 덧대 지상에 무덤을 설치한 형태) 등으로 구분되는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유적지 바로 앞으로 흐르는 하천 주변 약 2㎞에 밀집돼 있다. 호젓하게 산책하면서 선사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게 공원처럼 정비해 놓았다. 고창군은 이 일대에 대규모 거주지가 형성돼 있던 증거라며 ‘한반도 첫 수도’라 홍보한다. 아무래도 너무 나간 것 같다.

한국일보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산리고인돌. 주민들은 오랫동안 '장독대 고인돌'로 불러왔다.

한국일보

무게 300톤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 고인돌. 운곡저수지 상류 생태공원에 위치한다.

한국일보

null

두 개의 고임돌에 널따란 바위를 올린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은 박물관에서 약 1㎞ 떨어진 지동마을 뒤편 언덕에 있다. 현재는 ‘도산리고인돌’이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지만, 마을에선 오랫동안 망군대(望君臺) 또는 망북단(望北壇)이라 불러왔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송기상이 청나라와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 일생 동안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의 절을 올린 곳이라는 의미다. 200년 전부터는 장독대와 나란히 있어 ‘장독대고인돌’로도 불렸다. 운곡저수지 상류 생태공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약 300톤) 고인돌도 있다. 언뜻 박힌 돌이 아닌가 싶은데 커다란 바위 아래 양쪽에 굄돌이 받치고 있다. 고인돌유적지에서 운곡습지를 거쳐 생태공원까지는 약 3.6㎞, 왕복 2시간을 잡는다. 시간을 거슬러 원시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고창=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호텔스 컴바인 배너 이미지2
2021.03.25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는 어때요?
ESTaid footer image

© ESTaid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