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너와 지붕 사이로 켜켜이 쌓인 화전민의 삶

[여행]by 한국일보

[자박자박 소읍탐방] 삼척 도계읍 신리 너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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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문화재 33호로 지정된 삼척 도계읍 신리의 너와집 강봉문가옥. 주변 비탈밭과 맞은편 능선이 어우러진 산골마을 풍경이 아득하면서도 푸근하다. 삼척=최흥수 기자

‘목기시대의 동화가 살아있는 / 신리 너와마을에 가면 / 자동차도 휴대폰도 나무가 됩니다 / 무쇠처럼 굳어버린 그대 가슴에도 / 파릇한 나뭇잎이 돋아납니다.’

김태수 전 삼척문화예술회관 관장이 쓴 ‘너와마을에 가면’을 읽어 내려가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석기시대ㆍ청동기시대ㆍ철기시대 다 있는데 ‘목기시대’는 왜 없을까? 한국의 웬만한 문화재가 나무로 지은 건축물이고 요즘도 나무로 만든 온갖 생활도구를 이용하는데 목기시대가 없다니. 목재는 쉽게 썩기 때문에 끊임없이 관리의 손길이 필요하다. 사라질 뻔한 집과 마을을 그렇게 칠하고 다듬어 가치를 입힌 게 삼척 도계읍의 신리 너와마을이다.

두 채 남은 너와집, 너와마을로 다시 태어나다

미리 말하자면 신리 너와마을은 ‘소읍(小邑)’과는 거리가 멀다. 여느 농촌처럼 옹기종기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마을을 형성한 것도 아니다. 56가구 100여명의 화전민촌 주민이 육백산(1243m) 남측 자락에 띄엄띄엄 흩어져 살고 있다. 지독한 산촌(山村)이자 산촌(散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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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지붕에 간간이 이끼가 피어 있다. 죽은 듯 살아 있는 집이다.

너와마을에 주민이 실제로 살았던 너와집은 현재 2채만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김덕태(53) 너와마을 영농조합 대표가 기억하는 어릴 적 신리는 거의가 너와집이었다. 자신도 여덟 살 때까지 너와집에 살았다. 마을에 벼농사라야 다랑논 몇 뙈기가 전부여서 초가집은 지을 수 없었고, 산간에 고립된 가난한 마을이니 외부에서 건축 자재를 들여오는 것도 언감생심이었다. 자연히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나무가 집을 짓는 주재료였다. 소나무와 전나무 기둥을 판자 모양으로 잘라 기와처럼 지붕에 얹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가로대를 덧대고 큰 돌멩이도 얹어 언뜻 마무리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엉성한 나무 기와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도 하지만, 습기 머금은 너와는 묵직하게 팽창해 비가 새지는 않았다. 되레 이 구멍으로 환기도 되고 습도도 적당히 유지돼 여름에는 집 안이 한결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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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 너와마을의 화전민 생활도구 전시장에 옛날 사진이 걸려 있다. 오래된 듯하지만 그리 오래 전도 아닌 정겨운 풍경이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정선 사북(그곳도 논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모시 줄기로 지붕을 얹은 집이 많았다고 한다)에서 시집 와 6년간 너와집에 살았다는 정명자(61)씨는 겨울이면 부엌까지 눈이 들이쳐 무릎까지 빠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웃풍이 심했지만 당연하게 여겼고, 그때는 방 바닥만 따뜻하면 되는 줄 알고 살았지요.”


신리에서 너와집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다. 이 사건으로 마을 주민 상당수가 희생되고, 정부의 이주 정책으로 많은 사람이 울진과 삼척으로 빠져 나가 빈집이 늘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남은 너와집도 하나 둘 함석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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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 너와마을의 옛 대교국민학교. 현재는 회의실과 ‘화전민 생활도구 전시실’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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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교국민학교 화단에 이승복 동상이 서 있다. 학교였음을 알아볼 거의 유일한 단서다.

신리는 오지 마을 치고 도로가 빨리 난 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대 소나무를 반출하기 위해 이미 도로가 났고, 마을에 제재소도 있었다. 1973년부터는 시외버스도 다녔다. 삼척 바닷가 원덕에서 태백을 잇는 버스가 30분마다 다녔는데, 중간 지점인 신리를 지날 때면 이미 만원이었다. 원덕뿐만 아니라 울진 주민까지 태백 통리역에서 기차를 탔기 때문이다. 버스가 다니기 전까지 주민들은 장을 보기 위해 도계까지 12km 산길을 걸어 다녔다.


신리의 풍경을 다시 한번 바꿔놓은 것은 1986년 아시안게임 직전이다. 마을 앞 도로로 성화가 통과했기 때문에 몇 남지 않았던 너와와 함석 지붕은 다시 슬래브로 바뀌었고, 그래도 남루함이 삐져나오는 곳은 담장을 쳐서 가렸다. 모처럼 산골마을까지 미친 중앙정부의 세심한(?) 행정이 너와집을 가리는 것이었으니 지금 기준으로 보면 헛웃음만 나올 일이었다.

굳어버린 마음에도 너와처럼 파릇한 나뭇잎이…

잊혀 가던 너와마을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건 2002년 행정안전부에서 추진한 정보화마을로 지정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100가구 이상이라는 지원 조건에 미달해 탈락하는 수모도 겪었다. 마을 명칭으로 전국에 스무 곳이 넘는 ‘신리’ 대신 당당히 ‘너와마을’을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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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지정된 ‘김진호가옥’ 너와집. 정보화마을에서 약 1km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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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방 안의 코클. 조명이자 부분 난방, 화로까지 겸하는 시설이다.

내비게이션에 ‘너와마을’을 입력하면 도계읍 신리 너와 정보화마을로 안내한다. 이곳에 10여채의 너와집이 주차장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배치돼 있다. 2003년 식당과 펜션으로 지은 것이다. 펜션 건물 중 한 채는 내부까지 실제 너와집을 그대로 재현했다. 부엌으로 들어서면 무쇠 솥을 얹은 아궁이 뒤에 외양간이 붙어 있다. 쇠똥 냄새 풍기고 외양간 먼지가 날아 다녀 비위생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가축을 가족으로 여긴 인류애가 녹아 있는 구조다. 아궁이 장작불 열기가 외양간 공기를 뭉근하게 데우고, 금방 끓인 쇠죽을 바로 제공하니 이보다 ‘인간적으로’ 대접받은 소가 또 있었을까.


방안으로 들어서면 아랫목 장판이 누렇게 화상을 입었다. 지붕과 벽의 마감이 치밀하지 못해 외풍은 피할 수 없었지만 바닥만은 설설 끓었던 흔적이다. 부엌 쪽 모서리에는 이름도 생소한 ‘코클’이 붙어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고콜’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방바닥에서 약 1m 높이에 단을 설치하고 위로 굴뚝을 만들어 관솔불을 피우는 시설이다. 방 안을 밝히는 조명이자 부분적인 난방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연기는 원통을 타고 정지(부엌)로 빠져나가고 관솔이 타고 나면 감자를 굽기도 해 화로의 역할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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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알이 맺힌 머루 송이. 9월 수확철이면 머루와인 체험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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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마을 영농조합에서 생산하는 머루와인 ‘끌로너와’. 연 1만5,000병 정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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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지붕의 머루와인 공장.

너와집 옆에는 두툼한 널빤지 같은 너와가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다. 너와 쪼개기 체험장이자 작업장이다. 너와집은 손이 많이 가는 집이다. 썩은 너와는 수시로 교체해야 하고, 5년에 한번씩은 지붕 전체를 갈아야 한다. 그래서 따로 자격증이 없어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너와 기술자다. 용인의 한국민속촌, 제천의 청풍문화재 단지의 너와집도 이 마을 작품이다.


체험장과 등을 맞댄 옛 대교초등학교 건물에는 화전민 생활도구 전시장이 꾸며져 있다. 망태와 소쿠리, 코뚜레와 설피, 떡을 빚는 틀까지 주민들이 실제 사용했던 도구들을 모았다. 소풍과 나들이 때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도 정겹다. 운동장 건너편에는 너와집과 대조적으로 서양식 오렌지색 지붕의 2층 양옥 건물이 서 있다. 마을의 자랑인 머루와인 체험장이자 판매장이다. 예부터 자생 머루가 많았던 점에 착안해 현재 너와마을 11가구가 무농약으로 머루를 재배하고 있다. 파릇한 머루 알이 9월이면 보랏빛으로 익는다. 이때면 머루와인과 식초 만들기 체험이 진행된다. ‘끌로너와(Clo Nurwa)’라는 브랜드로 연 1만5,000병 정도의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끌로’는 프랑스어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초기에는 송이 따기 체험도 했지만 마구잡이 채취로 산이 망가져 2년 만에 중단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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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마을의 물레방아. 제 기능을 못하고 삭아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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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마을의 통방아. 물의 힘으로만 곡식을 빻은 아주 느린 방아다.

정보화마을 시설만 둘러봐도 너와의 투박하고 푹신한 질감처럼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한걸음 더 들어가면 산골 화전민의 정서에 조금 더 동화된다. 마을에는 실제 주민이 거주했던 너와집 2채와 물레방아와 통방아가 남아 있다. 정보화마을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김진호 가옥(문의재로 1223-9), 거기서 또 2km 떨어진 산자락에 강봉문 가옥(문의재로 1423-66)이 있다. 약 150년 된 집으로 중요민속문화재 33호로 지정돼 있다. 둘 다 너와집으로는 제법 큰 규모다. 평상시 문을 잠가 놓아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뒷마당으로 돌아가면 지붕과 눈높이가 엇비슷해진다. 무채색 판자에 무심하게 초록 이끼가 낀 모습을 보면 죽어도 살아있는 집이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자국이 깊게 남았다가 스폰지처럼 숨을 쉬듯 원상태를 회복할 것 같다. ‘무쇠처럼 굳어버린 가슴에도 파릇한 나뭇잎이 돋아난다’고 표현한 이유를 알 듯하다. 강봉문 가옥에서 보는 비탈밭과 첩첩산중 능선은 특히 아득하면서도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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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마을 주민이 머루농장에서 잡초를 베고 있다. 제초제를 쓰지 않고 무농약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너와집처럼 손이 많이 간다.

강봉문 가옥 앞 개울에는 통방아도 남아 있다. 방앗공이의 반대쪽 끝에 판 커다란 통에 물이 고이면 그 무게로 공이가 들리고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내려가며 방아를 찧는 시설이다. 강봉문 가옥에서 살았던 강춘희(58) 이장은 한낮에 고추나 옥수수를 넣어놓고 저녁에 가보면 다 빻아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오로지 자연의 힘만 빌린 정말 느린 방아다.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물이 채워지고 곡식을 빻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신리 너와마을 여행 정보

▦태백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삼척 호산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하루 4회 너와마을을 거쳐가지만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수도권에서 가면 너와마을까지 자가용을 이용해도 삼척보다 태백에서 가깝다. 태백 통리에서 약 10km 거리다. ▦정보화마을 사업 초기에 냇가 주변으로 걷기 길을 조성했지만 이용자가 없어 유명무실해졌다. 체험장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너와집까지도 차로 이동하는 것이 편하다. ▦머루와인을 판매하는 너와마을 영농조합법인(nurwa.kr)은 ‘강원농촌 융복합산업 지원센터’로부터 6차산업 인증을 받은 곳이다. 와인 시음과 판매 외에 주민들이 자체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감자전, 청국장, 산채비빔밥 등 산촌마을 음식을 주로 판매한다. 5,000~7,000원 수준. 너와집 민박 예약과 농산물 판매 등 자세한 내용은 너와마을 홈페이지(neowa.invil.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척=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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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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