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왕위, 화초로 마음을 달래다

[컬처]by 한국일보

꽃을 사랑한 국왕들

한국일보

조선 문인 화가 신명연(1808~1886)이 그린 ‘국화’.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복잡한 현실 생활에서 떠나 자연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자연 속에 머무는 이상적인 생활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이를 대신해 사람들은 꽃이나 풀, 나무 같은 대상에 깊은 애정을 담아 정성스럽게 화초를 키운다. 공간이 허락된다면 집 한 켠에 작은 정원 등을 만들어 놓고 때때로 그 공간에 머물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과 식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와 함께 여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꽃을 직접 키우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물하거나 받는 것 또한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의미 있는 일이다.


조선의 국왕 중에서 유달리 꽃을 아끼고 사랑한 왕들이 있었으니 바로 태조(太祖ㆍ재위 1392~1398)와 세조(世祖ㆍ재위 1455~1468) 그리고 연산군(燕山君ㆍ재위 1494~1506)이다. 역사 속에서 잔혹한 모습을 보여 줬던 이 왕들이 꽃을 가꾸고 감상하며 때로는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누구보다도 그들에게 식물을 통한 마음의 위안과 치유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꽃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관심은 조선 건국 초기 실록의 기록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실록에는 그가 화원(花園)을 수리하게 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보이는데, 태조 2년(1393) 기록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남아 있다.

임금이 화원에 거동하여 환관 김사행(金師行)에게 명하여 팔각정(八角亭)을 수리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안경검(安景儉) 등이 화원의 공사를 그만두기를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간관(諫官)이 나라 임금의 발을 궁문(宮門) 밖에 내어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이 화원은 고려 왕조에서 만든 것인데, 그대로 깨끗이 소제하여 유람(遊覽)에 대비하는 것이 유독 옳지 못한 일인가?” 하면서, 좌습유(左拾遺) 왕비(王裨)를 불러 명하였다. “이제부터는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마땅히 계문(啓聞)하지 마라.”

꽃과 식물을 가꾸는 취미에 신하들이 간섭하는 것이 언짢다는 것을 표현하면서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도록 명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는 화원을 수리해 놓고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그곳을 찾아가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다.


태종실록에서도 태조의 꽃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406년(태종 7) 태종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덕수궁에 나아가 문안하고 매화 한 화분을 올리고 당시 태상왕이었던 태조에게 헌수(獻壽)했다. 태종이 이성계의 취향을 고려해 매화 분재 화분을 선물한 것인데, 태조가 꽃을 어느 정도 아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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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훼도병풍’. 매화와 모란, 복숭아꽃 등을 그려 장식한 병풍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러나 조선은 성리학적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였다. 왕도정치를 수행해 백성들의 안위에 몰두해야 하는 국왕에게 꽃 감상의 취미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건국 초 사헌부(司憲府)에서 태조에게 올린 상소문 중에도 화초를 완상(玩賞)하는 것은 사냥하고 개와 말을 기르는 것과 더불어 사람의 인성을 해치고 방탕하게 하는 것이니 삼가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상소문은 태조가 어원(御苑)을 지속적으로 수리하고 가꿨던 즈음에 나온 것이지만 태조의 꽃 사랑은 막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궁궐의 꽃과 나무를 관리하고, 제철 꽃들을 여러 전각에 봉헌하는 임무를 맡았던 곳은 상림원(上林苑)이었는데, 1466년(세조 12) 장원서(掌苑署)로 명칭이 바뀌었다. 장원서는 궁궐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과일과 화초의 공급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세조의 경우, 본인이 직접 꽃을 가꾸는 취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종종 승정원의 신하들에게 꽃과 함께 술 등을 하사해 꽃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1460년 윤11월(세조 6)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척촉화(躑蠋花) 두 분(盆), 어사화(御賜花)ㆍ매화나무ㆍ대나무 각 한 분을 승정원(承政院)에 내려주었는데, 또 주육(酒肉)을 내려주고 전지(傳旨)하기를, “이 꽃이 때 아닌 때 피어서 구경할 만하다.”

세조는 제철이 아닌 때 핀 철쭉(척촉화)을 신기하게 여겼던 것 같다. 당시에 어떻게 봄에 피는 꽃을 겨울에 볼 수 있었을까? 이는 다름 아닌 온실 덕분이다. 기록에 ‘토실(土室)’ 또는 ‘토우(土宇)’라고 표현된 이 용어는 바로 현대의 온실과 같은 기능을 했던 곳이다. 온실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화훼(花卉) 완상의 취미가 있는 일부 계층에서는 널리 사용됐다. 이는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의 시에서도 알 수 있다.

기이한 꽃이 어쩌다 겨울에도 피어나니
(奇花或有凌冬開ㆍ기화혹유릉동개)

왕후장상의 저택에는 이런 일이 더욱 많다네
(王侯第宅尤多矣ㆍ왕후제택우다의)

옥으로 된 화분에 심어서 움집에 갈무리하여
(貯之玉盆藏土室ㆍ저지옥분장토실)

깊디깊은 규방의 처녀처럼 보호한다네
(如護深閨處女季ㆍ여호심규처여계)

조선 초기의 온실은 강희안(姜希顏ㆍ1418~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대개 움집(土宇)을 만들 때 볕이 잘 드는 높고 건조한 땅을 가려 짓는다. (…) 움집에 들여놓을 때에는 또한 너무 빨리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서리를 두세 차례 맞게 한 후에 들여놓아야 좋다.’ 이와 함께 꽃을 빨리 피우는 방법, 화분에서 꽃과 나무를 키우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어 당시 화초 재배 기술이 일정 수준 이상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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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사랑했던 영산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의 국왕 중 꽃 가꾸는 취미와 관련해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왕은 연산군이다. 그와 관련해 실록에 나타나는 꽃은 연꽃, 작약, 들국화, 모란, 영산홍, 해바라기 등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연산군은 꽃의 생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정도로 꽃 가꾸기에 조예가 깊었던 것 같다. 집권 중기인 1501년(연산군 7)까지만 해도 꽃에 대한 그의 취미는 격무에 지친 신하들에게 제철 꽃과 술 등을 선물함으로써 신하들을 격려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등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산국화 화분 하나를 승정원에 내리고 이어 선온(술)을 내려주면서 어서(御書)하였다.


가을 바람은 곳곳마다 맑은데
(金風無處淡ㆍ금풍무처담)

황국의 향기 뜰에 가득하여라
(黃菊滿階香ㆍ황국만계향)

적막한 승정원 안에는
(寂寞銀臺裏ㆍ적막은대리)

내려준 술잔에 그 꽃이 뜨리
(須浮賜酒觴ㆍ수부사주상)

그러나 집권 말기로 갈수록 꽃을 가꾸고 감상하는 그의 취미는 취미의 수준을 넘어 각종 신기하고 품질 좋은 꽃들을 수집해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병적인 집착으로 변질됐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1505년(연산군 11) 1월 “영산홍(映山紅) 1만 그루를 후원(後苑)에 심으라”고 명한 일이다. 영산홍 꽃은 만개 시 봄에 피는 다른 어떤 꽃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함을 뽐내는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가 영산홍에 매혹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해에는 영산홍을 잘 키울 것을 전교함과 동시에 재배한 영산홍 숫자를 확인하게 하는 등 취미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팔도 관찰사에게 품질 좋은 모란을 비롯해 각종 화초를 봉진케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또 장원서 노비에게 편을 나눠 진귀한 화초를 찾아오라 명하니 도성 안 민가에 기이한 화초가 있으면 장원서의 노비가 가서 뿌리째 뽑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해 당시 도성 안 민가에서는 장원서 노비들을 고관 대하듯 했다고 한다. 재위 마지막 해였던 1506년(연산군 12)에는 각종 화초들을 심기 위해 당시 궁궐 근처에 있던 장의사(藏義寺)라는 사찰을 철거하고 넓은 화단을 조성하기도 했다.


무엇이든지 너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했다. 연산군의 경우는 국왕이 화훼 등 어느 한 가지에 지나치게 몰두할 경우, 그 폐단이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바로 태조대에 상소문을 올렸던 사헌부 관리들이 우려했던 바가 아닐까.


강희안은 꽃을 기르는 일은 ‘완물상지(玩物喪志ㆍ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본심을 잃는 것과 같음)’가 아니라 ‘관물찰리(觀物察理ㆍ사물에 깃든 이치를 살피는 것)’라 했다. 꽃과 나무를 기르면서 그 이치를 살피고 이로써 마음을 수양한다는 의미다. 연산군이 ‘관물찰리’의 자세로 화훼를 대했다면 그의 말로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식물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마음의 위안과 더불어 정서적으로 여유가 필요했던 조선의 국왕들이 꽃과 식물을 가꾸는 취미에 매료됐된 게 아닐까.


백은경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2020.01.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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