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세월 품은 700개의 무덤…신비한 침묵

[여행]by 한국일보

1500년 비밀 간직한 고령 대가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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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대가야읍 주산에는 국내 최대인 704기의 대가야 무덤이 있다. 박물관에서 출발해 고분 탐방로를 돌아오는 데는 1시간가량 걸린다. 고령=최흥수기자

대가야로 시작해 대가야로 끝난다. 경북 고령은 2015년 군청 소재지 지명을 고령읍에서 대가야읍으로 변경했다. 대가야 읍내로 들어서면 어디서건 주산(310m)이 눈에 걸린다. 높이 때문이 아니라 큰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 둥글둥글한 무덤 능선 때문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704기라니 그 숫자가 놀랍다. ‘지산동고분군’이라 불리는 대가야(42~562)의 역사 속으로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긴다.

700개의 무덤 1500년의 비밀

본격적으로 능선을 오르기 전 고분군 입구의 ‘대가야박물관’에 먼저 들렀다.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기 때문에 언제든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대가야박물관은 ‘국립’이나 ‘도립’이 아닌 ‘군립’ 박물관이다. 고구려ㆍ신라ㆍ백제에 비해 기록이 많지 않아 그만큼 덜 알려진 가야의 처지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고령의 선사시대 유적을 비롯해 대가야 문화의 정수를 보여 주는 금관ㆍ토기ㆍ무기ㆍ마구 등 2,000여점의 유물을 비교적 짜임새 있게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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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영역 표시 지도. 전북 무주에서 전남 고흥에 이르기까지 섬진강 수계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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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무덤 주변에 수양벚꽃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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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무덤 축조 과정.

널리 알려진 가야의 건국 신화는 금관가야의 난생( 生) 설화다.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에서 동자가 태어났는데, 가장 먼저 알을 깨고 나온 동자가 지금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고, 다섯 동자가 나머지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인용한 대목이다.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조금 다르다. 가야산 산신인 정견모주와 하늘 신 사이에서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인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성종 때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신라 최치원이 지은 ‘석리정전’에서 인용한 시조 형제 설화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마주하는 대가야의 범위를 표시한 지도가 인상적이다. 대가야는 북쪽으로 전북 무주부터 남쪽으로 전남 고흥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락국 중에서 가장 넓은 영역에 세력을 떨쳤다. 중심지인 고령은 대가야의 동북부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장악한 상황에서 바다와 연결된 물길을 찾아 섬진강 수계까지 진출한 결과다. 700개가 넘는 무덤 중 가장 큰 지산리 44호분과 45호분의 축조 과정도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는 1,500년이 넘은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돌을 쌓아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한 석곽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복제품이긴 하지만 무덤에서 나온 금관도 정교하다.


박물관에서 나오면 곧바로 지산동고분군으로 산책로가 연결돼 있다. 고령의 주산은 서울과 경주의 남산처럼 대가야의 상징적 산이다. 능선에는 대형 고분이, 경사면 구릉에는 중ㆍ소형 고분이 분포한다. 주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길은 등산이라 하기엔 싱겁고 산책이라 하기엔 버겁다. 걷기가 부담스러우면 박물관을 기준으로 북측보다 남측 능선을 택하면 한결 수월하다. 어느 길이든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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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고분군의 대가야 무덤은 주산 능선과 경사면 전체에 분포돼 있다. 고분 탐방로를 걸으면 대가야읍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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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객과 비교해 보면 무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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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능선도 탐방로도 둥글둥글, 모난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대표 무덤(44ㆍ45호분)이 있는 주산 방향으로 먼저 길을 잡았다. 출발부터 조금 오르막이지만 숨이 찰 정도는 아니다. 봉분도 둥글둥글, 원형 무덤 사이로 난 길도 곡선이다. 까칠하고 모난 마음도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말끔하게 이발한 봉분에는 노란 양지꽃과 진분홍 할미꽃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봉분을 호위하듯 별처럼 꽃잎을 드리운 수양벚꽃도 드문드문 보인다. 부드러운 무덤 능선에 등을 기댄다. 무덤 주인이 왕족인지 귀족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권위와 위세도 오랜 세월에 누그러져 아늑함과 부드러움만 남았다. 산책로 중간중간에 남겨 둔 커다란 소나무가 제법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햇빛을 피하기도 좋다.


1977년 발굴된 44호분은 지름 27m, 높이 6m의 규모로 지산동고분군에서 두 번째로 큰 무덤이다. 안에는 3기의 대형 돌방과 이 돌방을 둘러싸듯 배치한 32기의 소형 순장 돌덧널(석곽)이 들어 있었다. 이미 도굴된 상황이었는데도 금귀고리, 금동그릇, 은장식쇠창, 야광조개국자 등이 출토돼 원래는 훨씬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계는 고분의 규모와 구조,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가야 고분 중 최고의 지위를 가진 왕릉으로 추정한다. 44호분에서 위로 60m가량 떨어진 45호분은 중앙에 돌방 2기를 나란히 설치하고 주위에 11기의 돌덧널을 원을 그리듯 배치해 무덤의 주인 외에 12인 이상이 순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금제 귀고리와 목걸이, 호위무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쇠도끼와 화살촉 등도 함께 출토됐다. 지산동고분군의 704기 무덤 중 지금까지 발굴된 것은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12기가 전부다. 일제강점기에 상당 부분 도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많은 무덤이 어떤 역사의 비밀을 품고 있을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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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지산동고분군에서 가야 건국설화 그림을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토제 방울이 나왔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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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이 실제 발견된 곳 탐방로. 흙 한 뼘 걷어내기도 조심스럽다.

44호분으로 오르는 경사면에서는 지난달 흙으로 빚은 방울이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가야 건국설화 새긴 토제 방울 나왔다).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발굴된 토제 방울에는 거북, 관을 쓴 남자, 춤추는 여자,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 등을 형상화한 6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문화재청은 이 그림이 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 건국 신화의 내용과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방울이 발견된 곳은 봉분이 아닌 산책로였다. 고령군은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2017년 말까지 산책로 정비를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아직까지 공사를 끝내지 못하고 있다.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는 고대도시처럼 지산동고분군에선 벽돌 한 장 두께의 흙을 파내는 것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당장은 불편해도 대가야 조상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고령이 감수해야 할 처지다. 직경 5cm 방울 하나가 잊어진 역사를 되살리는 커다란 단서가 되는 마당에, 700기의 무덤이 어떤 역사의 비밀을 밝혀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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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중간중간에 그늘에서 쉬어갈 수 있도록 소나무를 남겨 놓았다.

대가야시장과 우륵박물관

지산동고분군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내려다보면 대가야읍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가야 궁성지로 추정되는 산자락에는 현재 고령향교가 자리를 잡았고 그 주변으로 상가와 학교,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읍내에 남은 대가야의 흔적은 왕이 마신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인 왕정(王井)이 유일하다. 100년 역사의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에 보호각으로 덮어 놓아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우물은 뚜껑 돌을 덮고 앞을 터놓은 형태로 그리 깊지 않지만 사시사철 일정량의 물이 샘솟는다. 퍼낼수록 새로 채워지는 게 샘의 이치인데, 보호에만 집중했는지 우물에 이끼와 수초가 잔뜩 끼어 마실 수는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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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초등학교 운동장의 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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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끼가 끼어 마실 수는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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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박물관 앞 가야금을 타는 우륵 동상.

읍내 외곽에는 우륵기념탑과 우륵박물관이 있다. 대가야 출신으로 신라에 망명한 우륵은 고구려의 왕산악, 조선의 박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힌다. 우륵박물관이 위치한 곳의 행정지명은 쾌빈리지만, 이전에는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진 고을이라는 의미의 금곡리 혹은 정정골로 불렸다. 현재 우륵이 지은 악곡은 전해지는 것이 없고 상기물(임실), 하기물(남원), 거열(거창), 달기(하동) 등 가야의 지명을 딴 12곡의 제목만 전해온다. 우륵박물관의 전시물도 생몰 연대조차 불분명한 우륵보다 그가 발명한 12현 가야금에 집중돼 있다. 궁중음악에 연주된 정악가야금, 19세기 말부터 보급된 산조가야금의 특징을 알기 쉽게 보여 준다. 국악과 전통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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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대가야시장은 장날(4ㆍ9일)이면 볼거리, 먹거리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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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쇠에선 지글지글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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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이요!” 하얀 튀밥을 토해내는 뻥튀기도 장날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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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이면 더 바빠지는 고령대장간도 대가야시장의 명물이다.

고령 전통시장 입구에는 ‘대가야시장’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소읍의 장터가 그렇듯 평상시 한산하던 시장도 장날(끝자리 4ㆍ9일)이면 한바탕 떠들썩해진다. 불판을 장착한 둥근 식탁에선 지글지글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뻥튀기 기계는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뽀얀 튀밥을 토해낸다. 쌀, 옥수수, 콩 등을 담은 ‘깡통됫박’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3대에 걸쳐 70년간 이어온 고령대장간도 지역의 명물이다. 장날이면 낫, 삽, 곡괭이 등 농기구를 고치려는 이들이 몰려 쇠망치와 담금질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대가야시장의 대표 먹거리는 ‘소구레국밥’이다. 쇠가죽에서 벗겨 낸 질긴 고기는 ‘수구레’지만 이곳 식당 골목에선 전부 ‘소구레’로 표기하고 있다. 쫀득쫀득해 씹기 좋을 만큼 삶은 소 껍질에 선지와 고기 부산물을 섞어 걸쭉하게 퍼 담은 국밥 한 그릇이면 속이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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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대가야시장의 대표 먹거리는 소구레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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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앞에서 쫀득쫀득한 수구레를 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딸기 향 달콤한 대가야 여행

역사에 대단한 흥미를 가진 게 아니면 박물관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 대가야 여행을 떠난다면 대가야박물관보다는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가 낫다. 대가야의 역사와 생활상을 주제로 꾸민 놀이공원이라 생각하면 쉽다. 투구 모양 전시관에서 대가야의 철기를 설명하고, 항아리 모양 전시실에서 토기를 알려주는 방식이다. 개나리와 벚꽃이 피어 봄 분위기 물씬 풍기는 지점마다 조형물을 설치해 사진 찍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왕관 모양으로 미로를 만든 숲길, 바닥분수와 물놀이장까지 갖춰 활동이 많은 아이가 뛰어 놀기에도 적당하다. 드라마 ‘프로듀사’를 촬영한 ‘대가야 왕가마을’은 가족 펜션으로 활용하고 있다. 펜션 뒤편 고분 전망대에 오르면 주산 능선의 크고 작은 고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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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의 봄을 부르는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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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초입부터 봄 단장이 한창이다.

고령은 20여년 전부터 딸기 주산지다. 도로변에 보이는 비닐하우스가 거의 딸기농장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체험농장만도 10여곳이다. 딸기 따기, 딸기 분말을 넣은 쿠키 만들기, 딸기잼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잼 만들기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체험이다. 30분 정도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잼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벽돌 화덕에 솥을 걸어 놓은 체험장에 들어서면 달콤한 딸기 향이 진동한다. 넓은 솥에 담긴 딸기를 손으로 짓뭉개는 과정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처음엔 뭉클한 촉감에 잠시 망설이다, 한번 손맛을 들이면 그칠 줄 모른다. 뭉근한 불에 끓을 때까지 주걱으로 젓다가 설탕을 넣고 끈적해질 때까지 다시 가열하면 즉석 잼 완성이다. 대가야 여행도 달콤한 딸기 향으로 추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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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봉이땅엔’ 딸기체험농장 화덕 위에 딸기를 담은 냄비가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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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딸기를 손으로 짓뭉개는 과정을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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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개고, 끓이고, 설탕 넣고, 다시 끓이고…30분이면 딸기잼이 완성된다.

고령 여행 정보

대가야읍에서 광주대구고속도로 고령IC가 가깝지만, 수도권에서 내려가면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성주IC를 이용하는 것이 빠르다. 성주 용암면에서 고령 운수면으로 넘어가는 67번 지방도의 벚꽃 가로수도 일품이다. 대중교통은 대구를 거치는 것이 편리하다. 대구지하철1호선 종점인 설화명곡역에서 고령시외버스정류소까지 606번 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11~14일 대가야생활촌과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를 비롯한 읍내 일원에서 대가야체험축제가 열린다. 대가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공연과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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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림면의 개실마을 전경. 여러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쌍림면 개실마을은 고령의 전통마을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조선 중엽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영남 사림학파의 종조 김종직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80%가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다. 딸기 따기, 엿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한옥스테이(농가민박)를 운영한다.

 

고령=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2019.04.0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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