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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해외 독립운동 후손들,
잊혀지는 현실 흐릿하게 셔터에 담았죠”

by한국일보

세계 돌며 독립운동 후손 기록한 김동우 작가

“해외 독립운동 후손들, 잊혀지는 현

[저작권 한국일보] 1일 서울 중구 반도카메라갤러리에서 김동우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뒤로는 쿠바 까르데나스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이윤상의 딸 레오나르 이 박의 모습이 보인다. 김 작가가 직접 쿠바를 찾아 찍은 작품이다. 홍윤기 인턴기자

사진 속 주인공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듯 흐릿한 형상이다. 자주빛 소파, 금빛 벽지 같은 이국적 오브제가 가득하지만 사진 한가운데 인물은 영락없는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그리움을 가득 머금은 깊은 눈을, 또 다른 이는 자긍심으로 가득한 단단한 입꼬리를 지녔다. 세계 독립운동 유적지 100여곳을 돌며 독립운동가 후손 30여명의 모습을 기록한 김동우(40) 작가의 사진 이야기다.


김 작가는 2017년 4월 별안간 아내와 나란히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길에 올랐다. 손에 쥔 거라곤 작은 신혼집을 판 돈과 사진기 한 대가 전부였다. ‘세계의 독립운동 흔적 쫓기’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떠난 건 아니었다. 그해 7월에 발을 디딘 인도 뉴델리의 레드 포트가 그에게 영감을 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 주둔 영국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대요. 포로 심문, 암호 해독이 가능한 병력이 필요하다면서요. 1943년 파병된 광복군이 영국군과 함께 훈련한 곳이 레드 포트였어요. 그렇게 먼 곳에도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죠. 해외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도요.”


각국에서 만난 동포들은 김 작가의 도전에 큰 힘을 실어줬다. 한인회와 선교사, 심지어 한식당 사장들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 작가의 작업을 도왔다. 준비 없이 떠난 2년 남짓의 여정에서 그가 독립운동가 후손을 30명 넘게 만날 수 있었던 이유다.

“해외 독립운동 후손들, 잊혀지는 현

멕시코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김익주의 손자 다빗 킴의 모습. 배경은 자택이다. 김동우 작가 제공

김 작가가 사진에 담은 첫 주인공은 지난해 1월 멕시코에서 만난 다빗 킴. 1905년 돈을 벌겠다며 멕시코로 떠난 한인 1,000여명은 경술국치로 귀국할 나라가 사라지자 현지에서 군사학교를 세우고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등 분투했다. 그중 한 명이 독립운동가 김익주이고, 그의 손자가 다빗 킴이다. “멕시코시티의 다빗 킴 자택에서 촬영했어요. 다빗 킴이 딸과 함께 앉아 있는데 둘의 모습이 굉장히 다른 거예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얼굴에서 한국인의 모습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다는 뜻이었죠. 지금 기억해두지 않으면 모두 잊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김 작가는 사진 속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표현했다. 3ㆍ1운동 이후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역사를 묘사한 방법이다. ‘기록’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사진 여러 장을 찍어 합성하는 방식은 피했다. 대신 카메라 셔터 속도를 12초로 길게 설정하고(보통 125분의 1초로 설정), 인물이 앉아서 조금씩 움직이게 하는 방법으로 대상의 농도를 조절했다.

“해외 독립운동 후손들, 잊혀지는 현

쿠바 마탄사스에서 만난 마르따 임 김의 모습. 독립운동가 임천택의 딸이다. 무릎에는 아버지가 써낸 책 ‘큐바한인이민력사’를 직접 재구성한 ‘쿠바의 한인들’이 놓여있다. 김동우 작가 제공

김 작가의 발길은 쿠바에도 닿았다. 쿠바 마탄사스에는 독립운동가 임천택의 딸 마르따 임 김이 살고 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재이민한 임천택은 1925년부터 쿠바 민성국어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1937년부터는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에 독립 자금을 지원했다. “임천택 선생의 아들 헤로니모 임은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더라고요.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쿠바 같은 먼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죠.”


후손들은 불쑥 찾아온 김 작가에게 매번 따뜻한 밥상을 차려 줬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이인섭의 막내딸 스베틀라냐 슬로보치코바는 흰 밥에 소고기뭇국을 차려 놓고 김 작가를 기다렸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최재형 증손녀 타트리야나 박은 간장으로 맛을 낸 한국식 국수를 내놨다. 후손들은 한국어엔 서툴렀지만 “손님이 찾아오면 따뜻한 밥상으로 대접하라”는 부모 혹은 조부모의 철학을 잊지 않고 있었다. 김 작가는 친척을 반기듯 포근하게 안아 준 그들에게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해외 독립운동 후손들, 잊혀지는 현

쿠바 까르데나스에서 촬영한 한인 후손회장 아델리아 가족의 모습. 세대를 거듭할수록 후손들의 얼굴에서 한국인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게 보인다. 김동우 작가 제공

지난해 11월 귀국한 김 작가는 사진에 짤막한 역사적 사실을 덧붙인 책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전시(9월15일까지)에선 김 작가 사진 70여점을 볼 수 있다. “책을 쓰려고 노트북을 켤 때마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힘들었어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고 그립다’고 말할 때의 그 분들 표정이 떠올라서요. 다시 떠나려고 모금을 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일본, 만주 등 아시아에 흩어진 독립운동사를 기록하고 싶습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