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세월 켜켜이 쌓인 청인약방…갖은 애환 ‘폭풍 수다’ 산막이옛길

[여행]by 한국일보

산골에서 만난 ‘오래된 미래’ 괴산 칠성면

괴산 칠성면 산막이마을에서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주차장 인근 차돌바위 나루로 이동하고 있다. 산막이옛길 탐방객은 대부분 호숫가로 난 4km 산책로를 걸어갔다가 유람선을 타고 돌아온다. 괴산=최흥수 기자

괴산은 충북에서도 유난히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이다. 읍내에서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재를 넘거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1,000미터를 오르내리는 산봉우리가 즐비하지만 크게 이름난 산이 없다는 건 아쉽다. 문경과의 경계인 이화령, 날아가는 새도 쉬어 간다는 조령 정도가 그나마 알려진 지명이다. 2011년부터는 ‘산막이옛길’이 괴산을 대표하는 여행지로 떠올랐다. 이왕 천천히 걷는 나들이, 산막이옛길이 위치한 칠성면의 ‘오래된 미래’로 한 발짝 들어갔다.

칠성면 터줏대감 61년 ‘청인약방’의 비밀

칠성면은 괴산에서 그나마 들이 넓은 축에 속한다. 군자산(948m)과 달천 사이 중산간에 분지가 제법 평평하고, 도정리ㆍ사은리ㆍ외사리ㆍ율원리 등의 마을이 농경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칠성이라는 지명에서 국자 모양의 뚜렷한 별자리 북두칠성이 연상된다. 지명의 유래 역시 일곱 개의 바위에서 찾는다.

칠성면 소재지 옛 시장 인근의 청인약방. 집은 200년 약방은 61년 된 칠성면의 터줏대감이다.

청인약방 주인 신종철(88) 할아버지가 “이곳이 마을에서도 최고 명당”이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칠성면 사무소에서 옛 시장 길을 통과하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보인다. ‘청인약방’이란 간판을 단 이 집 주변에 일곱 개의 바위가 흩어져 있다. 안내판에 바위와 관련한 전설이 친절하게 적혀 있다. 옛날 하늘나라의 일곱 신선이 죄를 짓고 바위로 변해 땅으로 떨어졌다. 뿔뿔이 흩어진 것을 가엾게 여긴 대왕이 북두칠성처럼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는 곳으로 바위를 모았다. 바로 이곳 ‘칠송암(七松岩)’이다. 2002년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이 바위가 고인돌임을 밝혔다는 안내판도 함께 세워져 있다. 칠성면의 근본을 밝히는 보물이지만 소나무도 없어지고, 그냥 보면 평범한 너럭바위에 불과해 솔직히 큰 감흥이 일지 않는다.


진짜 보물은 느티나무 아래, 외벽에 칠송암 전설이 그려진 청인약방이다. 신종철(88) 할아버지가 1958년부터 운영하고 있는데 처방전 없이도 판매가 가능한 감기약과 비타민 음료만 팔고 있다. 약방으로 이용한 지는 61년 됐지만, 이 집의 역사는 200년 가까이 된다고 한다. 원래 칠성면 송동 부락에 사는 성씨네 별당이었는데, 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구입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방 하나, 마루 하나에 부엌이 있는 단순한 구조다. 정(井)자형 마루의 일부는 못 하나 쓰지 않고 틀을 맞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청인약방 주위에 흩어져 있는 ‘칠송암’. 약방 외벽에 칠송암 전설이 그려져 있다.

약방 진열대에 옛날에 판매했던 오래된 약병과 상자가 놓여 있다. 지금은 처방전 없이 가능한 감기약과 비타민 음료만 판매한다.

신종철 할아버지는 1950년 6월 25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오고 있다. 첫 날 쓴 일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진열대에는 옛날에 팔았던 약병이 먼지가 쌓인 채 진열돼 있고, 한쪽 구석에는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는 일기장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첫 날의 일기는 “일제의 36년간의 통치하에서 1945년 8ㆍ15에 미ㆍ소의 덕택으로 이 단군의 배달민족은 완전 해방되었다. 그러나 원한의 38선이 생기어 작은 이 나라를 양단시키고 민족을 분열시켰다”로 시작한다. 일기의 형식을 빌렸지만 단순한 개인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먼지 쌓인 선반에는 일기장 외에도 3선 군 대의원으로서의 기록과 지인으로부터 받은 연하장이 여러 개의 대형 봉투에 담겨 있다. 거창하게 대한민국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괴산과 칠성면의 시대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료여서 청인약방 자체가 박물관인 셈이다. “젊은 시절 인천에 잠시 살았는데, 그때 청주에 있던 지인인 이 약방을 차려 줬지.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두 도시의 앞 글자를 따서 ‘청인약방’이라 지었어.” 신 할아버지는 약방 터가 마을에서도 가장 명당이라고들 한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면사무소에서 산막이옛길로 가는 길, 외사리 들판 한가운데에는 사라진 절간의 당간지주가 우뚝 솟아 있다.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기 양식으로 추정만 할 뿐, 사찰의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 했던가. 칠성면 터줏대감 ‘청인약방’과 신 할아버지의 환한 웃음을 오래도록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칠성면 외사리 들판의 당간지주. 절 이름도 모르는 채 남아 있다.

끝 마을의 애환이 녹아 있는 ‘산막이옛길’

산막이옛길은 ‘괴산호’ 주변 산자락으로 연결한 약 4km 산책로다. 1957년 괴산댐 건설로 사오랑마을과 산막이마을을 잇던 길이 물에 잠기자, 20여 가구가 살던 산막이마을 주민들이 힘겹게 오가며 생긴 길이다.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댐이라 자랑하는 괴산댐으로 인해 산으로 막혀 더 이상 갈 곳 없는 산막이마을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산골 끝 마을 주민들의 설움이 배어 있는 이 길은 2011년 관광객을 위한 걷기 길로 조성되면서 한 해 100만명 이상이 찾는 명소로 거듭났다.

산막이옛길 초입의 소나무 출렁다리. 짧은 산책로에 갖가지 이야기 거리를 더해 심심하지 않다.

괴산호 호수 주변으로 난 산책로는 큰 오르막 없이 비교적 순탄하다.

4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마흔고개’를 빼면 힘든 구간이 거의 없고, 걷는 내내 상쾌한 산바람과 시원한 호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걸어서 40여분 짧은 구간에 고인돌쉼터, 소나무 출렁다리, 노루샘, 호랑이굴, 매바위, 앉은뱅이 약수, 얼음 바람골, 호수 전망대와 다래숲 동굴 등 주민들의 애환을 갖가지 이야기로 풀어놓아 지루할 틈이 없다. 힘들지 않고 볼거리 가득하니 흔히 쓰는 말로 ‘가성비 갑’이다. 산막이옛길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주민들이 거의 빠져나갔던 마을에는 현재 카페와 숙박 업소가 다수 들어섰다. 가을이 포근히 내려앉은 마을 길 산책이 끝나면, 대부분의 관광객은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보다 유람선을 이용해 돌아온다.

가을이 곱게 내려앉은 산막이마을. 산막이옛길 맞은편 환벽정에서 본 풍경이다.

탐방객을 태운 유람선이 괴산호를 가로지르고 있다. 선박 뒤편 호숫가에 산막이옛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애초 산막이옛길은 이곳까지였지만 최근에는 상류까지 연결해 총 7km로 늘었다. 그 중간지점에 호수를 가로지르는 ‘연하협구름다리’가 놓였고, 산막이옛길 건너편 산자락으로 도로가 나 있어 차로도 갈 수 있다. 이곳부터는 갈은구곡이다. ‘충청도 양반길’ 3코스와 연결된다. 구름다리까지 가는 도로 중간에서 ‘환벽정(環碧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으면 호수와 산막이마을을 또 다른 방향에서 조망할 수 있다. 푸르름에 둘러싸였다는 이름대로 호수로 툭 튀어나온 언덕에 자리 잡은 정자각에 오르면 단풍이 물드는 산자락 사이로 푸른 물빛을 가르는 유람선과 마을이 이국적 풍경으로 펼쳐진다. 산막이옛길과 달리 찾는 사람이 많이 않아 호젓하게 가을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산막이마을 상류에 ‘연하협구름다리’가 놓여 있다. 괴산에는 유난히 ‘구곡(九曲)’이 많다. 이곳부터 갈은구곡이 시작된다.

미루마을에는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희귀 종족’이 산다

산막이옛길 아래 미루마을의 ‘숲속작은책방’은 자칭 국내 최초의 ‘가정식 서점’이다. 좋은 책을 함께 읽고 싶은 ‘글 짓는’ 아내 백창화씨와 오랫동안 시골 생활을 꿈꿔 온 남편 김병록씨가 운영하는 책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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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면 미루마을의 숲속작은책방. 입구에 ‘들어오면 누구나 꼭 책을 사가야 한다’는 안내문을 세워 놓았다.

마당 오두막에 편히 책을 보거나 쉴 수 있는 해먹이 걸려 있다.

“음료는 팔지 않고 책만 파는 서점입니다. 사진만 찍고 가는 관광객이나 부동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사양하고요, 책방에 들어오시면 누구나 책을 꼭 사가셔야 하는 원칙을 지켜 주시면…”. 한 번쯤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싶은 마당 예쁜 집 앞에 쓰인 안내문 치고는 다소 불친절하다. 미루마을은 57가구가 입주한 제법 규모가 큰 전원마을이다. 이 산골까지 발길을 할 정도면 시골생활과 전원주택에 관심이 많을 게 분명하다는 걸 알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마을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하루에 몇 번씩 이런 질문을 받다 보면 정말 대답하기가 싫어지는 걸, 녹음기처럼 같은 대답을 반복하다가 내 귀한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걸”(‘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중).

숲속작은책방의 책방지기 백창화ㆍ김병록 부부. 책이 있는 마을을 꿈꾸며 취촌한 자칭 ‘희귀 종족’이다.

결정이 어려울 땐 ‘추천 쪽지’를 참고하세요. 쪽지를 적어 놓은 책이 실제 더 잘 팔린다고 한다.

북스테이로 활용하는 2층 다락방. 최대한 편히 책을 읽을 마음이 충만하도록 설계하고 꾸몄다.

그러나 진짜 책 읽기 좋아하고, 책이 있는 풍경만으로 마음이 풍성해지는 사람에게 ‘숲속작은책방’은 꿈의 보금자리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작은 오두막에 편히 누워 책장을 넘기다 낮잠을 즐기기 좋은 해먹이 걸려 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 벽면 전체가 책으로 장식돼 있다. 책방지기가 엄선한 책에는 두세 문장으로 간략한 ‘추천 쪽지’를 적어 놓았다. 어떤 책을 살까 망설이는 고객에게 유용한 길잡이다.


2층 방 2개는 ‘북스테이’로 운영한다. “책을 읽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마음의 안정을 찾고 휴식을 주는 행위입니다. 단 몇 장을 넘기더라도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꾸몄습니다.” 손수 목공을 한 김병록씨의 말이다. 그래서 간단한 아침 식사만 제공하고 고기 굽기 따위의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책이 있는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색다른 경험을 주기 위해 딱 한 팀만 받는다. 그런데도 한 해 100팀 정도가 묵어간다니 책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희귀 종족’이 이들 부부만은 아닌 듯하다. 참고서를 판매하는 문방구 외에 서점이 없던 괴산에서 ‘숲속작은책방’은 지역 어린이에게 색다른 문화공간이자 체험 장소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생태교육시설 ‘여우숲’의 강의실 명칭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저서에서 따 온 ‘오래된 미래’다.

숲 카페의 의자에 앉으면 미루마을과 칠성면 풍경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괴산군 칠성면 여행지도. 송정근 기자

미루마을 뒤편 산 중턱에는 숲 학교인 ‘여우숲’이 둥지를 틀었다. 초입에 차를 대고 비포장 도로를 약 400m 걸어 올라가면 강의실로 쓰는 ‘오래된 미래’ 건물이 나온다. ‘여우숲’은 1960년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즉 망가진 생태가 다시 복원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숲 강사 김용규씨가 2012년 개설한 생태 교육장으로 일반적인 여행지는 아니다. 교사나 학생들을 상대로 숲 교육을 진행하고, 부정기적으로 인문학 강좌를 운영한다. 숲 카페가 조만간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카페 벤치에 앉으면 군자산 아래 칠성면 풍경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괴산=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2019.11.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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