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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법원이 무너뜨린 인생들…
“사법부 정의 회복이 진정한 보상”

by한국일보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난 오재선(79)은 광복 직전 부모의 고향 제주도로 왔다. 4ㆍ3이 터지자 아버지는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일본으로 떠났고, 장남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일본과 제주를 오가며 돈을 벌었다. 1983년 제주에 정착한 뒤엔 선원, 목장 관리인 등의 일을 했다.


평범하던 그의 인생이 지옥으로 떨어진 건, 이듬해 경찰서에 끌려간 순간부터다. 먹고살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던 것뿐인데, 조총련에 포섭된 간첩이 돼 있었다. 부정할수록 고문의 강도는 세졌다. “검찰에서 다른 말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경찰의 말이 두려워 그는 검사 앞에서도 허위 자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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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오재선씨를 2018년 5월 제주의 한 요양원에서 만났다. 오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해 8월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오씨는 1년 만에 눈을 감았다. (c) 박유빈ㆍ후마니타스 제공

모든 걸 포기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건 판사였다. 재판정에 선 오씨는 “고문이 무서워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판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판결문에 적힌 그의 간첩 혐의란 고작 비료 값이나 고속버스 시간표 같은 국가기밀을 몰래 수집했다는 것. 재판부는 오재선에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오재선은 결국 지난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간첩’ 꼬리표를 달고 숨죽여 살아온 지 32년만이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귀가 멀어버린 오재선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무죄” 소리조차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고, 재심 판결 1년 만에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그 어디에서도 미안하다는 소리 한번 듣지 못한 채.


이 재판의 판사는 양승태(71). 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다. ‘거래된 정의’는 정의를 배반한 사법부의 역사, 그리고 그 배반이 보통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에 관한 처절한 기록이다. 기자와 변호사로 구성된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제주 간첩 조작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전범기업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 등 사법 농단의 피해자 71명을 직접 만나 들은 목소리를 담았다. 특히 ‘양승태 사법부’를 정조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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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95)씨.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배상판결을 받았지만 소송이 13년 넘게 지연되는 동안 피해자 3명이 세상을 떠나, 혼자 남았다. (c) 주용성ㆍ후마니타스 제공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재판 거래, 재심사건 피해자들은 어김 없이 돈 없고 빽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처럼 권력 편에 섰던 판사들은 개인과 조직의 부귀영화를 위해 약자들을 권력에게 바치는 먹잇감으로 이용해 왔다고 저자들은 분노한다.


재심으로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끝내진 못했다. 국가는 유일한 구제 방안인 금전 배상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며 피해자와 가족들을 괴롭히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지급된 손해배상금의 이자 계산이 잘못됐다며 34년치 이자를 삭제하겠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대표적이다. “너무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라 이자가 너무 많아 다 줄 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더 웃긴 건, 국정원은 이미 받아간 손해배상금을 되돌려 달라고 소송을 내면서 ‘연 20%’라는 이자를 적용했다. 법원은 가해자인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졸지에 빚쟁이로 몰린 피해자와 가족들은 대출을 받거나 집을 팔아 빚을 갚아나가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피해자들은 사법부가 어떠한 반성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가슴을 쳤다. 사실 이들이 돈보다 더 간절히 원한 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판사의 사과 한마디였다. 하지만 법원은 말이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억울하다 한다. 지난 2월 법정에서 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나”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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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된 정의 - 이명선, 박상규, 박성철 지음 (후마니타스 발행ㆍ392쪽ㆍ1만8,000원)

저자들은 사법농단 이후 사법부 스스로 자정 방안을 찾으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사법농단에 연루된 몇몇 판사들의 구속과 형사처벌 여부에만 초점을 맞춰 이번 사태를 적당히 매듭지으려 한다는 지적이다.


사법부의 오판으로 희생된 피해자와 가족들의 삶은 원상회복될 수 없다. 평생 끊을 수 없던 고통은 자식에게로 대물림 되고 있다. 이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거다. 거창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좋지만, 기본을 지키는 게 먼저다. 돈도 빽도 없는 약자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법 앞에 선 사람들의 배경이 아닌 진실을 들여다 보려는 판사들이 많아질 때 사법부의 정의는 바로 설 수 있다고 이들은 외친다. 사법개혁이 왜 필요한지, 판사의 책무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강윤주 kka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