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 유행시킨 충무로 멜로의 큰 별

[컬처]by 한국일보

섬세한 감성의 대가 허진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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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은 멜로영화에서 섬세한 감수성을 발휘하며 2000년대 한국 영화의 다양성과 질적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허진호(57) 감독이 처음부터 영화를 지망했던 건 아니었다. “5학년 때 누나들과 함께 본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이 유난히 기억난다. 어린 내가 봐도 정말 재미있었다. ‘대학의 낭만이란 게 저런 거구나’ 하는 생각에 초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빨리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종종 극장을 드나들었던 유년기를 회고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영화에 흥미를 잃었고 대신 철학 같은 순수학문에 관심을 두었다. 허 감독은 연세대 철학과에 82학번으로 진학했고, 독일 언어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을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쓴 진지한 인문학도였다. 사진동아리 ‘연영회’에 들어가면서 창작에 대한 흥미를 갖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영화감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은 건 아니었다.


헌병으로 군복무를 하다가 제대를 목전에 둔 말년 병장 시절 허 감독은 자대에 막 들어온 신병에게 “너 나중에 뭐 할거야?”라 물었다. 이에 신병은 큰 소리로 “네, 영화감독을 하고 싶습니다!”라 답했다. “어 그러냐, 그런데 영화감독이 뭐 하는 거냐?” 그로서는 이때가 처음으로 ‘영화감독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날 맞이한 신병은 훗날 그의 연출부 생활을 거친 뒤 ‘꽃피는 봄이 오면’(2004)과 ‘순정만화’(2008)를 연출하는 류장하(1966~2019) 감독이다. 나중에 조감독을 맡아달라는 허 감독의 요청을 따르기 위해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영화아카데미 12기로 영화 연출 공부를 하게 된다.

대기업 직원 거쳐 늦깎이 영화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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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감정을 절제하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시켜 준 수작이다. 싸이더스FNH 제공

대학으로 돌아간 후 허 감독은 장윤현 감독의 단편 ‘인재를 위하여’(1987)를 보고 자극을 받게 된다. 불온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취조실에서 고문 받는 대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그에게 막연하게나마 영상을 다루는 연출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드라마 PD가 되고자 방송국 시험을 쳤다가 낙방한 허 감독은 진로를 고민하다 대우전자에 홍보실 직원으로 들어간다. 허 감독은 잠시 동안만 회사 생활을 하려 했으나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과 두 달마다 나오는 보너스로 인해 머뭇거리다 1년 6개월을 회사원으로 보냈다. 이 당시의 경험은 ‘호우시절’(2009)에서 문학도의 길을 버리고 평범한 대기업 직원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동하(정우성)에게 투영된다.


‘단적으로 영화잡지 ‘로드쇼’에 영화 아카데미 9기 신입생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저마다 추천영화를 꼽았다. 그때 내가 “영화란 가장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골랐다가 동기들한테 진짜 무시당했다.(중략) 가령 그 전까지는 ‘아시아 영화’라는 개념조차 없었는데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알게 되면서 ‘아, 세상에 이런 영화도 있구나’했다. 영화아카데미를 통해, 영화도, 사람도 배웠던 시간이었다.’(주성철 엮음 ‘데뷔의 순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자각에 사표를 쓴 허 감독은 마침 신문에 뜬 시험 공고를 보고 응시해 영화아카데미 9기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아카데미 시절 그가 만든 첫 영화는 다섯 개의 컷으로 구성된 5분 남짓한 분량의 단편영화 ‘해후’다. 한 남자가 대학교 때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대생을 만나 사귀었다가 헤어진 이후, 헌책방에서 책을 들춰보다 옛 사랑에게 주었던 사진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단편의 아이디어는 허진호 감독이 대학 시절 즐겨 읽던 소설 ‘독일인의 사랑’을 동네 헌책방에서 다시 샀는데,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리. 수가 희에게’라는 문구를 발견했고, 한때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었을 책이 헌책방으로 흘러 들어온 경로를 생각하다 얻게 되었다고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와 ‘봄날은 간다’(2001)의 바탕이 되는 정서는 생애 첫 단편영화부터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뒷날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함께 작업하고 헌정사를 바치게 되는 유영길 촬영감독과는 이 시기 아카데미 실습수업을 들었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연출한 ‘고철을 위하여’(1993)는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 시사실에서 첫 상영 할 때 기립박수를 받았고 벤쿠버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늦깎이 감독 지망생 허 감독에게 진로에 대한 확신을 안겨준 영화였다. 영화아카데미 작품 시사회에는 신진을 발굴하고자 충무로 제작자들이 찾아오곤 했고, 이 작품을 계기로 허 감독도 연출제안을 받게 된다. 허 감독의 본격적인 영화계 경력은 박광수 감독의 ‘그섬에 가고 싶다’(1993)에 소품팀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박 감독 연출부는 ‘감독 사관학교’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머잖아 ‘초록물고기’(1997)로 데뷔할 이창동 감독, ‘킬리만자로’(2000)와 ‘무뢰한’(2015)을 감독할 오승욱 감독 등 촉망받는 인재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에 이어 허 감독은 박 감독의 다음 작품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에도 참여한다. 시나리오 작가 겸 세컨드 조감독으로 초기 단계에서부터 개봉까지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체험한 이때의 경험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연출수업의 시간이었고 데뷔의 기회 또한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허 감독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의 프로듀서인 차승재 우노필름 대표를 알게 됐는데, 이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우노필름에서 준비하게 된다.

병원 진단 받고 구상한 ‘8월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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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는 "라면 먹고 갈래?"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며 허 감독을 멜로 대가로 자리잡게 한다. 싸이더스FNH 제공

‘8월의 크리스마스’의 아이디어는 ‘정글쥬스’(2002)의 조민호 감독에게서 들었던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사의 이야기’와 환하게 웃고 있는 김광석의 영정사진, 거기에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 더해지면서 나왔다. 불규칙적인 생활로 몸이 상해있던 허 감독은 폐 근처에서 통증을 느끼고 진찰을 받으러 병원을 다녀왔는데,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죽음을 선고받더라도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구나’하며 ‘죽음과 일상이 굉장히 가까이 있다는 생각’(‘디렉터스 컷’ 1호 2008년 3월 6일 인터뷰)을 했다고 한다. 진단 결과는 쭈그리고 앉는 습관 탓에 걸린 근육통이었지만 ‘시한부 환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는 영화의 줄거리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만화 ‘반쪽이의 육아일기’의 영화화 제안을 거절한 허감독은 오승욱 감독과의 시나리오 작업으로 꼬박 1년을 보냈고, 한석규와 심은하를 배역으로 점 찍었다.


‘접속’(1997)을 작업 중이던 한석규는 처음에는 장르가 겹친다는 이유에서 사진사 정원 역을 거절했다. 정우성에게 배역이 돌아가면서 그에 맞춰 각본을 수정했지만 정우성의 급작스런 허리 부상으로 캐스팅이 무산되어 다시 한석규를 고려하게 됐다. 심은하 역시 SBS 드라마 ‘백야 3.98’(1998)의 일정이 겹쳐 다림 역을 고사했고, MBC 드라마 ‘남자셋 여자셋’으로 주가를 올리던 이의정에게 제안이 갔지만 이의정이 거절했다. 김현주와 최강희도 물망에 올라있었지만 때마침 드라마 촬영이 지연되면서 가까스로 심은하의 캐스팅이 확정되게 된다. 초기 제목은 시인 황동규의 시에서 모티브를 얻은 ‘즐거운 편지’였지만 최진실, 박신양 주연 영화 ‘편지’(1997)와 겹친다는 이유에서 바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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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배경으로 국경을 넘은 사랑을 그린 영화 '호우시절'. 판씨네마 제공

2년 6개월의 준비를 거친 끝에 공개된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해 국내 주요 영화상의 신인감독상과 작품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고,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기도 했다. 허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감정의 과잉과 서사의 군더더기를 걷어낸 담담하고 절제된 화술, 섬세한 감수성으로 한국형 멜로 영화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마친 허 감독의 다음영화는 일본 쇼치쿠 영화사와 손잡은 한일합작 프로젝트 ‘봄날은 간다’(2001)였다. 이상화된 멜로를 그린 전작과는 달리 현실적인 연애담을 그리고 있지만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의 유한(有限)함, 시간 속 존재의 덧없음을 응시하는 허 감독의 시선은 더욱 곡진한 형태로 드러난다. 이후 ‘외출’(2005)과 ‘행복’(2006), ‘호우시절’(2009), ‘위험한 관계’(2012)를 거치며 허 감독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멜로 영화의 장인이 되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2020.04.2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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