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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이런2막!

꽃노년 명품 운전기사
‘웨딩쇼퍼’를 아시나요?

by한국일보

사회적 기업 ‘더 쇼퍼’ 창업한 70세 노경환씨

한국일보

4월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만난 노경환씨는 “사실 ‘더 쇼퍼’가 첫 창업은 아니다”고 털어놨다. 경기대 관광학과 70학번인 노씨는 1998년 외환 위기 당시 전공을 살려 한국의 전통 아이템을 관광에 접목시킨 ‘때밀이 관광’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업체를 창업했었다. 노씨는 “한 때 외화 버는 효자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경쟁업체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끝은 별로 안 좋았다”고 말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한 지방 호텔의 총지배인을 마지막으로 노경환(70)씨가 호텔리어 경력 20년에 마침표를 찍은 건 9년 전이다. 은퇴 직후만 해도 “일할 만큼 했으니 이제 취미생활도 즐기고, 여행도 다니면서 좀 쉬자고 생각했다”던 그였지만 한달 정도 지나자 “못 견디겠더라” 했다. 돈이 아쉬웠고 무엇보다 젊었다. 그해가 가기 전 새로 찾은 직업은 대리운전 기사. 생각지 못한 험한 일도 여러 번 겪으며 견딘 3년 생활은 그에게 불현듯 시니어 창업으로 나아가는 혜안을 열어줬다. 그는 지금 결혼 날 신랑ㆍ신부의 이동을 품위 있게 책임지는 ‘웨딩쇼퍼’ 회사 사장님이다.

환갑에 은퇴, 일 안 할 이유가 없다

61세에 은퇴를 하고 보니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먼저 하루 아침에 ‘24시간 짝꿍’이 된 아내와의 부부싸움이 늘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잔소리가 늘고 서로 지적하는 일이 늘어난 탓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휴직과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가정 불화도 덩달아 늘었다는 뉴스는, 사실 은퇴자 부부에겐 ‘뒷북 뉴스’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렸다. 그는 “경조사 챙기고 사람 만나고, 심지어 봉사활동을 하려고 해도 다 돈”이라며 “은퇴한 사람들이 건강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등산을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돈이 안 들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호텔 생활 20년을 포함, 돈벌이를 한 세월만 30년이 넘는데 왜 노후자금이 없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 결혼자금 신경 쓰느라 퇴직금은 손도 못 대고, 노후자금의 마지막 보루인 아파트 한 채 건사하는데도 적잖게 돈이 들어요. 여행? 취미생활? 연금만 갖고 살려면 꿈도 못 꿔요. 그게 대부분 은퇴한 부모님들의 현실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다 차치하더라도, 일을 안 하기엔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하려고 하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대리운전을 한다는 친구가 떠올랐다.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되니 다른 자격증이 없는 그에겐 안성맞춤인 듯했다.


친구에게 연락해 다짜고짜 물었다. “나도 대리운전 좀 해보려고. 어때?” 내심 응원을 기대했던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호텔 총지배인까지 하던 네가 대리운전을 할 수 있겠어?” 아내에게도 물었다. 역시나 대답은 “당신이 할 수 있겠어?”였다.

오기에서 패기로, 시니어 창업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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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환씨는 “레드카펫 이벤트는 신부를 이날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호응이 좋다”며 “웨딩 쇼퍼들은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사진을 찍어 선물하는데, 그저 운전 기사로 생각했던 사람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은 커플들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고 말했다. 노경환씨 제공

보란듯 뛰어든 대리운전 바닥은 막상 부딪혀보니 녹록지 않았다. 술 취한 젊은이의 차를 몰며 비참한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엔 아내 말고는 누구에게도 대리운전 일을 한다는 사실을 숨겼지만 한 달이 지난 뒤엔 주변에 알리기 시작했다. 계속 숨기고 살다간 자신의 존재가 너무도 작아질 것 같아서였다.


의심과 불신에 오기로 맞서며 시작한 일이라 쉽게 그만둘 수 없었지만,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손님이 대리운전 기사에게 욕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떠올린 방법은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하는 것이었다. 의외로 호응이 좋았다. 스스로 품격을 지켜야 남들도 존중해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비슷한 또래의 대리운전 기사들과의 교류도 넓혔다. 상당수는 은퇴 전 ‘한가락’씩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듯했다.


대리운전 3년차인 2014년, 아들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직접 운전해서 헤어샵, 결혼식장, 공항으로 이동할 거란 얘길 들었다. 아들에게 물었다. “요샌 친구들이 그런 거 안 해주니? 혹시 아버지 같은 노신사가 유니폼 갖춰 입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전해주는 서비스가 생기면 젊은이들이 이용할까?” 처음에 갸우뚱하던 아들이 말했다. “아까 말한 사업 아이템 말야. 생각해보니 괜찮은 것 같아.”


그날부터 낮엔 사업계획서를 쓰고 밤엔 대리운전을 하는 강행군이 시작됐다. 번번이 창업 지원 사업에서 고배를 마시면서도 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제공하는 창업 교육 프로그램도 이수했다. 2016년 드디어 성남시의 창업 지원 사업 대상으로 선정됐다. 아들이 사업계획서 첨삭을 해준 덕택이기도 하다. 성남시에서 지원 받은 2,000만원은 창업 종잣돈이 됐다.


회사 이름은 ‘더 쇼퍼’라고 지었다. 원래 ‘쇼퍼(Chauffeur)’는 영국 왕실의 마부를 부르던 단어지만, 지금은 경호 의전 통역 등 전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을 일컫는다. ‘더 쇼퍼’가 현재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는 웨딩 쇼퍼(Wedding Chauffeur). 결혼하는 신랑ㆍ신부에게 격식을 갖춘 기사가 운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신부를 위한 레드카펫 서비스, 신랑ㆍ신부의 허기진 아침을 채워줄 미숫가루는 그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다.

도전하는 은퇴자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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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환씨가 웨딩쇼퍼 고객과 찍은 인증샷. 노씨는 “원래는 리무진 차량을 이용했는데, 신부가 드레스를 입은 채 탑승하기에는 승합차가 더 편해 차량을 바꿨다”며 “딸이 아빠의 창업을 축하하는 선물로 사준 차”라는 자랑과 함께 가족의 응원에 고마움을 표했다. 노경환씨 제공.

“웨딩쇼퍼가 지켜야 할 철칙들이 있습니다. 머리는 반드시 까맣게 염색해야 하고, 정장 차림과 보타이, 플라스틱 챙이 달린 모자도 필수예요. 참, 향수 뿌리는 것도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운전 중에 불필요하게 커플에게 ‘라떼는 말이야~’하고 훈계하는 건 절대 금지입니다. 그리고 팁은 절대 안 받습니다. 만약 손님이 팁을 주시면 감사히 받은 후 다시 축의금으로 돌려주는 게 원칙입니다. 이런 내용은 철저하게 ‘쇼퍼 교육’을 통해 전달하고 있어요.”


그는 호텔 경력을 살려 품격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한다. 이는 다른 웨딩카 업체와 차별화할 수 있는 ‘더 쇼퍼’만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입소문도 꽤 났다.


2017년 11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 그 해 13건의 실적을 올렸고, 이듬해 103건, 지난해 205건으로 나름 성장세가 가파르다. 다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결혼식이 뜸해져 25건에 그치고 있다. 그는 “대리운전 할 땐 한 달 내내 50~60만원 벌다가 요샌 주말만 일해서 300만원까지 번다”며 “돈도 돈이지만, 대리운전 할 땐 걱정만 하던 가족들에게 요즘엔 응원을 받으며 일한다는 사실이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창업 선배로서 그는 “더 많은 시니어들이 자신이 가진 경험과 생각을 세상에서 다양하게 펼쳤으면 좋겠다”고 조언한다. 이런 생각을 입증하듯 그와 함께하는 웨딩 쇼퍼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건설회사 임원, 은행 지점장, 출판사 사장 등 한때 내로라 했던 이들이다.


‘더 쇼퍼’는 단지 신랑ㆍ신부에게 운전기사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노년 세대와 청년 세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꿈꾼다. “우리 세대는 현재의 주역이 아니죠. 오히려 청년들에게 배우고 같이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해요. 그런데 많은 시니어들이 과거의 권위에 얽매여서 청년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업 초기 자본 한 푼 없이 시니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회적 기업을 창업했잖아요. 창업도 좋고 뭣도 좋아요. 권위를 내려놓고 현실을 읽다 보면 분명 사회를 위해 도전할 수 있는 일이 모든 시니어에게 한 가지쯤 있지 않을까요?”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