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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시민 의식의 차이? 유럽과 한국인 승객이 코로나에 대처하는 방법

by한국일보

머나먼 귀국길 2편

한국일보

파리 샤를드골 공항은 시공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일시 멈춤이 또 다른 도약이 되길 바란다.

4월 29일 산티아고 공항, 파리행 특별기를 타려는 승객들이 발권 창구에 길게 줄을 서 있다. 공항에 도착한 지 1시간째,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발권 승무원은 탑승권을 건네는 대신 시간을 끌었다. 프랑스 입국 비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프랑스는 한국인에 대한 비자 면제를 잠정 중단했다. 나는 2019년 12월 칠레에 입국했고, 파리는 경유지일 뿐이다. 당당하게 파리~인천 항공권을 내보였다. “오케이”하더니 또 시간을 끌었다. 승무원은 혹시라도 내가 프랑스 공항에서 입국 거부를 당해 칠레로 다시 후송될 상황을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인이다. 프랑스인 탕탕의 아내 자격으로 유럽연합(EU)에서 마련한 이 특별기를 탈 자격을 얻었다. 지금은 모든 나라와 항공사가 코로나 전시 상황이다. 평상시라면 ‘산티아고~파리~인천’ 항공권을 구입해 파리에서 바로 환승했겠지만, 이번에는 ‘산티아고~파리’ ‘파리~인천’ 항공권을 따로 끊어야 했다. 승무원도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인천행 항공권이 프랑스 입국을 보장할 지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탑승 시각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길었던 줄이 싹 사라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한 노인이 보였다. 무슨 사연인지 알 수 없으나 탑승 불가 통보를 받은 모양이다. 나도 저런 신세가 되면 어쩌나 스멀스멀 걱정되기 시작했다.


주 칠레 한국대사관에 연락해야 하나? EU 특별기를 타는데 한국대사관이 도와 줄 수 있을까? 다행히 주 칠레 프랑스대사관 직원이 현장 근무 중이었다. 탕탕은 상황을 설명했고(전자항공권 발권 당시 이미 대사관을 통해 나의 경유 가능 여부를 확인한 상태였다), 대사관 직원의 확답을 받은 승무원은 그제야 탑승권을 건넸다. 더구나 환승 항공권이 아닌데도 배낭에 인천행 수화물 태그를 붙였다.


고맙긴 한데, 동행하는 탕탕은? 탕탕의 배낭은 파리행 태그가 붙여진 채 이미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어쨌든 나는 프랑스에 입국해 인천행 탑승권을 다시 받아야 한다. 침착하자. 일단 이 비행기를 반드시 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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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이 나보다 더 확실해 보이는 수화물. 탑승권 아래에 인천행 태그가 붙었다. 에어프랑스와 대한항공이 같은 스카이팀 회원사이기에 가능했던 서비스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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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공항에서 거리 두기를 권하는 빨간 표식은 무용지물이었다. 유럽인이 대부분인 탑승객은 마음만큼 조급하게 발권 창구로 진격했다.

출국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는데 벗으라는 요구도 없다. 엉뚱하게도 위조 여권으로 국경을 넘기에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탑승구 앞은 전쟁터였다. 승객은 대부분 유럽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무시됐다. 바닥에 앉은 이들조차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발권과 출국 심사, 비행기 탑승까지 모든 과정에서 거리 두기는 없었다.


공항 사정과 달리 기내 입장은 가로 10석(3•4•3)에 맞게 엄격하게 진행됐다. 알파벳 순으로 호명 받은 10명이 차례차례 탑승했다. 착석 후 프랑스어로 기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이제 진짜 떠난다는 걸 실감한 승객들의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특별기의 승무원들은 모두 자원자라고 했다. 프랑스 각 지역과 벨기에 등지에서 자진해서 목숨 걸고 건너온 이들이었다. 기장은 일일이 승무원의 이름을 불러주며 감사 표시를 했다. 물컹한 감동이 밀려왔다.


자, 출발이다. 장거리 비행의 비법 중 하나는 절대 시간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버틸지, 지루함이 몰려온다. 13시간 비행이었다. 화장실 앞에 모여 있지 말라는 안내 방송이 종종 나왔다. 영화와 책에 의지하고 쪽잠으로 뒤척이다 보니 이미 비행기는 파리에 도착하고 있었다. 활주로에 안착하면서 기내에는 다시 한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휴대폰 전원을 켜니 온라인 배송 문자가 쏟아진다. 한국에 가면 2주간 자가 격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산티아고에서 미리 주문한 물품이었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마스크의 끈이 귀를 잡아당긴다.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한 건 오전 7시 30분, 인천행 비행기는 오후 9시에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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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드골 공항의 전광판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하는 안내문이 표시돼 있다. 마스크 착용보다 거리 두기에 더 비중을 두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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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들어오는 출입국 정보 전광판. 걸핏하면 비행편이 취소되는 상황이기에, 인천행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는지부터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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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들드골 공항 좌석에 한 칸을 비우고 앉으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몇몇 사람들은 저 포스터를 쿠션 삼아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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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하나를 제외하고 샤를드골 공항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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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유럽인 승객과 확연히 비교되던 대한항공 발권 창구 앞 줄 서기. 한국인이기에 자랑스럽고, 더불어 애국심도 펌프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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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외교부의 안전 알림 문자가 좌르르 쏟아졌다.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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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드골 공항의 이 문장은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는다. 합당한 이유 없이 집을 떠나지 말라?!

프랑스 입국 절차는 1m 간격을 유지하라는 전광판 안내와 함께 진행됐다. 입국심사대에선 여권과 특별입국허가서를 확인한 후 사진과 얼굴을 대조했다. 입국장을 벗어나자마자 출국 항공편 전광판부터 살폈다. 보통 때 같으면 오후 늦게 출발하는 우리 항공편은 표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단 2개의 모니터에 샤를드골 공항을 출발하는 모든 비행편이 들어있다. 고작 14편뿐인데 심지어 3편은 취소된 상태다. 인천행 대한항공은 다행히 제시간에 출발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공항에서의 13시간이 숙제였다.


샤를드골 공항은 시간 죽이기에 열악한 조건이었다. 의자도 넉넉하지 않아 두 다리 뻗고 앉기에 눈치가 보인다. 구경이라도 할까? 기념품 판매점을 겸하는 편의점을 빼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운동 삼아 다른 터미널로 가 보았으나 마찬가지다. 승객인지 노숙자인지 의문스러운 이들이 소파형 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스크는 착용하지 않은 상태다. 경찰은 본체만체했다. 그러고 보니, 입국 당시 발열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 안내 방송으로는 귀가 닳도록 1m 거리 두기를 강조했다. 의자마다 한 칸씩 띄우고 앉기를 권하는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프랑스의 코로나 상황이 최악인데도 마스크 착용은 자유의지에 맡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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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이 없어 텅텅 비어 있는 샤를드골 공항 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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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인천으로 가는 대한항공의 기내 거리 두기. 부부인 탕탕과 나도 띄어 앉도록 좌석이 배정됐다.

대한항공의 발권 창구는 탑승 3시간 전부터 열렸다. 탑승 전 발열 검사를 한다는 협조문이 붙었다. 탑승객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모두들 거리 두기를 위한 바닥 테이프에 정확히 차례로 섰다. 산티아고 공항에서 유럽인 승객들의 혼란스러운 풍경과는 시민 의식의 차이가 느껴졌다. 기내에선 옆자리 좌석 한 칸을 비운 채 떨어져 앉게 했다. 8,957km 하늘길 너머 대한민국이 있다. 10시간 비행이 될 거란 안내방송이 나왔다. 마음은 이미 한국이었다.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