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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조선시대로 회귀한 듯...다섯 봉우리 안에 꼭꼭 숨겨진 고성 왕곡마을

by한국일보

송지호와 서핑 해변으로 이어지는 전통가옥보존마을 송지호해변 모퉁이에 숨겨진 서낭바위도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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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은 바다가 지척이지만 다섯 개 봉우리에 둘러싸여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듯 보인다.

바다에서 불과 1km 떨어져 있지만 파도소리가 미치지 않는 곳, 갯가의 비릿한 내음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곳, 마을 앞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는데도 깊고 깊은 산중인 듯 고고한 마을, 강원 고성의 왕곡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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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엔 초가와 기와집이 고루 섞여 있다. 전봇대가 없어 조선시대로 들어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을이 위치한 곳은 죽왕면 오봉리다. 그리 높지도 않지만, 오르기에는 만만치 않은 다섯 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일까, 6ㆍ25 당시 고성군 전체가 전쟁터였음에도 폭격 한 번 당하지 않고 옛 모습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댄 후, 50여 가구가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면 약 1시간이 걸린다. 전선을 지중화해 전봇대가 없고, 기와집(31채)과 초가(20채)가 적절히 섞여 있어 갑자기 근대 이전의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왕곡마을에는14세기경 강릉 함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고 이후 강릉 최씨와 용궁 김씨가 들어와 함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 마을이 주목받는 이유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북방식 전통 가옥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ㄱ자’형 겹집은 산간지역의 추위를 막기 위한 구조다. 안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에 들어 있고, 부엌에 외양간을 붙여 온기를 유지한다. 앞마당은 대문이 없이 마을 안길과 연결돼 개방적인데 비해 뒷마당은 반드시 부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가족, 특히 여성의 사생활이 보호되는 구조다. 더구나 뒷마당은 비교적 높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어서 북풍을 막는데도 효과적이다. 진흙과 기와를 켜켜이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은 굴뚝도 열 손실을 줄기기 위한 지혜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한번 순환시킬 수 있고, 초에 불이 옮겨 붙는 것도 예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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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상나말집 외벽에 멍석과 함께 영화 '동주'의 한 장면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영화에서 중국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 윤동주의 고향집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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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의 골목 담장. 주택의 앞마당은 외부로 트여 있고, 뒷마당은 제법 높은 담으로 둘러져 있다.

마을의 가옥은 백촌집, 성천집, 진부집, 성문집 등으로 불린다. 시집 온 안주인의 고향마을 이름을 딴 택호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집이 큰상나말집이다. 바깥주인의 처가가 상나말이었다는 의미다. 부엌과 연결된 외양간 외벽에 멍석과 바소쿠리가 걸려 있는데, 함께 붙어 있는 흑백사진이 눈길을 잡는다. 집 주인 가족 사진인가 해서 자세히 봤더니 낯익은 얼굴이다.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의 한 장면이다. 이 집은 영화의 주인공이자 시인인 윤동주의 집으로 설정된 가옥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그의 고향 중국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의 옛 모습이 어쩌면 왕곡마을과 꼭 닮았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마을 어귀의 옛날 정미소도 사촌 몽주가 정지용의 시집을 숨겨 놓았다가 동주에게 선물하는 장소로 등장한다.


왕곡마을은 전국의 이름난 전통마을과 비교하면 규모가 소박한 편이지만, 그만큼 번잡하지 않고 여유로워서 좋다. 요즘은 담장 주위로 분홍빛 접시꽃이 활짝 피어 정감을 더하고 있다. 마을의 7채 가옥은 민박으로 운영된다.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겠다. 화장실과 욕실이 별채로 분리된 것은 조금 불편하다. 매주 주말 마을에서 뻥튀기, 떡메치기, 그네타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왕곡마을 앞 들판은 송지호와 닿아 있다. 바다와 분리돼 생긴 석호로, 화진포 호수와 함께 고성의 대표적 철새 도래지다. 7번 국도변에 송지호 전망타워(입장료 1,000원)가 세워져 있다. 왕곡마을 방향으로는 잔잔한 호수가, 맞은편으로는 쪽빛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호수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전망대 주변 솔숲을 걸어도 운치 있고, 자전거를 대여(무료)해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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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호 산책로 일부 구간은 목재 덱으로 호수까지 연결돼 있다. 호수 둘레 산책로는 자전거를 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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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고 조용하던 송지호 해변은 몇 해 전부터 서핑을 즐기려는 이들이 많이 찾고 있다. 해변 바로 앞은 두꺼운 암반에 대나무가 숲을 이룬 죽도다. 해변 남측에서 서낭바위까지는 짧은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이름만 보면 종교시설 같지만,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자연 조각품이다. 잘록한 목에 커다란 두상이 얹혀진 모양이 독특하다. 몸통 부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모양의 붕어바위도 동화 캐릭터처럼 귀엽다. 일대는 마그마가 식으면서 형성된 규장암과 기존 화강암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국가지질공원이다.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