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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그의 펜을 통해 임권택 걸작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by한국일보

<68> 시나리오작가 송길한


“작위적인 것을 쓰지 마라. 가보지도 비슷한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쓰지 마라. 발로 써라 가슴으로 써라.”


송길한 작가는 1940년 7월 30일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낸 아버지와 서예가 석전 황욱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막내 동생이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성 출신으로 ‘넘버 3’(1997)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이었다.


한국영화 침체기였던 1980년대에 그는 역사의 질곡을 겪고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초상을 그렸고 ‘방화’라 무시당하던 한국영화에 성숙의 지평을 열었다. ‘짝코’(1980)를 기점으로 ‘만다라’(1981), ‘우상의 눈물’(1981), ‘안개마을’(1982) 등을 거쳐 ‘길소뜸’(1985), ‘티켓’(1986), ‘씨받이’(1986)에 이르기까지, 임권택 감독의 손꼽히는 대표작에는 그가 집필한 시나리오가 함께 했다.

격동의 한국사를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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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정국, 그리고 6ㆍ25전쟁에 이르기까지, 송 작가의 성장기는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시기에 걸쳐 있었다. 신탁통치 찬반여부를 둘러싼 좌우 진영의 이념대립은 그의 고향 전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덟 살의 송길한은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의 행진에 끼어들어 함께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시위 행렬은 기관총의 발포로 무참히 진압되었고, 도중에 몸을 빼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튿날 새벽, 시체로 가득한 거리의 참상에 전율하게 된다. 휴전 이후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연모하고 있던 친구의 누나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의 위안시설에서 몸을 팔던 걸 목격하고는 충격으로 앓아 누웠다고 그는 회고한다.


6ㆍ25전쟁이 터지고 송 작가의 집안은 외조부가 있는 전북 고창으로 피난을 갔다가 전주로 돌아온다. 다행히 전주는 폭격 맞은 건물 하나도 없이 무사했고, 서울에서 빠져 나온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피난처 삼아 모여든 참이었다. 수도회관이라는 여관을 운영하던 이강천 감독은 전주극장 사장 김병기와 손잡고 배우 김진규, 이예춘, 허장강, 노경희 등을 모아 ‘피아골’(1955)을 만들었는데, 송 작가는 이 감독의 아들이 동문 후배였던 인연으로 촬영 현장을 구경하다가 영화에 출연했고, 우인다방을 드나들면서 배우들과 안면을 트게 된다. 전북 군산 주둔 미군으로부터 흘러나온 영화 필름이 전주의 ‘깡통극장’(납작하게 편 캔을 모아 붙여 지붕을 만든 간이극장)에서 상영되곤 했는데, 이곳에서 ‘셰인’(1953), ‘나의 청춘 마리안느’(1955), ‘싱고아라’(1949)와 같은 양질의 해외영화들을 접하곤 했다.


시험에 붙어야 중ㆍ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던 시절, 송 작가는 명문으로 꼽히던 전주북중을 거쳐 전주고에 입학한다. 학교에는 문단의 이름난 문인들이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국화 옆에서’의 서정주, ‘슬픈 목가’와 ‘촛불’의 신석정, ‘봄을 맞는 폐허에서’의 김해강과 같은 걸출한 시인들이 학창 시절 그의 은사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배움이 그로 하여금 문학과 사회의식에 눈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계 위해 3년간 탄광 생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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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송 작가는 전주를 떠나 서울 가회동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4ㆍ19 혁명을 맞은 대학 1학년 때, 이념 문제에 엮인 가족사의 굴레 때문에 학교를 금방 떠나야 했고, 5ㆍ16 정변 후에는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하다 청파동 파출소에 검거되어 강원 간성의 최전방에서 대북방송의 원고를 써야 했다. 제대 후에는 강원 도계의 탄광을 은신처 삼아 3년간 석탄을 캐며 생계를 해결했다. 방황하는 청춘의 세월이 1969년까지 계속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백수로 지내던 송 작가는 신문에서 우연히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고를 보게 된다. 습작 한 번 해본 적 없었던 그는 조선일보 옆의 동시상영관 시네마 코리아에서 영화를 반복해 보면서 독학으로 시나리오의 구성을 익혀나갔다. “한 씬(장면)에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디렉션이 움직이는 거고, 이 씬에는 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가장 원시적인 거지. 그냥 무대뽀로 썼어.”(한국영상자료원 주재,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임권택 X 102 –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첫 번째 이야기’) 경남 남해의 어느 섬에서 만난 남녀의 불륜 이야기에 실존주의적 고민을 얹은 이 시나리오는 심사위원이자 ‘시집가는 길’로 유명한 극작가 오영진의 호평을 얻으며 당선되었다. 하지만 상업영화로 옮기기엔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판단 하에 원안과는 다르게 각색되어 이상언 감독의 ‘흑조’(1973)로 영화화된다.


충무로에 입성한 송 작가는 멜로물 ‘마지막 날의 언약’(1974)과 ‘과거는 왜 물어’(1976), 청춘물 ‘여고얄개’(1977)와 ‘우리들의 고교시대’(1978), 홍콩의 액션스타 청룽(성룡)과 로웨이가 각각 출연한 무협물 ‘금강혈인’(1981)과 ‘낭화비권’(1978), 전쟁물 ‘제 3공작’(1978)와 애니메이션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1977)의 공동각본 등등 “들어오는 건 가리지 않고 다 받아서 치열하게 썼다. 생존 때문이었다.” 검열로 창작의 자유를 말살 당한 한국영화는 국책을 홍보하는 반공영화 아니면 무성의한 만듦새의 오락영화를 양산하고 있었고, 송 작가 또한 기계적으로 펜을 놀리며 싸구려 각본을 써내려 갈 뿐이었다. 작가로서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시기, 삼영필름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송 작가는 임권택 감독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재능을 만개시키게 된다.


“전방의 탱크 부대에서 폭발사건이 있었다. 한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리고 자신은 전사했다. 한 제작자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국책영화를 기획하려고 임 감독과 나를 부르면서 만나게 됐다. 당시 ‘족보’(1978)나 ‘깃발 없는 기수’(1979) 같은 영화를 보고 임 감독님께 강한 인상을 받고 있었을 때다.”(영화주간지 씨네21 2017년 5월 8일)

최고의 짝 임권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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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의 협조를 얻지 못하고 준비하던 국책영화가 무산되자, 송 작가는 소설가 김중희가 현대문학에 게재한 2쪽짜리 단편소설을 원안 삼아 ‘짝코’를 제안했다. 빨치산 망실공비와 지리산 토벌대 경찰의 30년에 걸친 추적을 플래시백 구조에 응축해 담은 이 작품은 겉으로 반공영화를 표방하긴 했지만, 실은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그로 인해 파괴되는 시대의 비극을 담고 있었고, 임 감독과 송 작가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가족사의 아픔이 투영되어 있었다. 비어있는 상영일정을 때우기 위해 6일간 걸렸다가 극장에서 내려간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제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한다.


‘만다라’(1981)는 임 감독의 연출력, 정일성 촬영감독의 촬영술, 송 작가의 필력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역작이었다. 본래 이 영화의 각본은 이상현 작가가 맡았으나, 첫 번째 각색에 만족하지 못했던 임 감독은 송 작가의 손에 두 번째 각색을 맡겼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기에 눈이 녹기 전에 완성된 시나리오가 나와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었는데, 송 작가는 4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필사적으로 ‘만다라’의 최종고를 써내려 갔다. ‘만다라’의 각본으로 송 작가는 제20회 대종상영화제 각색상을 받았고, 정진우 감독의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1983)로 제3회 한국영화평론가상 각본상까지 안으며 경력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임 감독과의 협업은, 당대의 검열와 편견에 맞서 싸우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했다. ‘짝코’는 북한의 도발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TV 토론 장면 5분이 삭제되었고, ‘만다라’의 대척점에서 대승적 구원의 화두를 그릴 예정이었던 미완성작 ‘비구니’(1984)는 기생이 출가해 스님이 된다는 설정을 용납하지 않은 불교계의 반발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다방 레지들의 삶을 그린 ‘티켓’(1986)은 제목이 외래어라는 사소한 트집을 잡힌데다 내용이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원판 112분 중 12분이 잘려나갔다.


그럼에도 송 작가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철저한 취재와 고증으로 시대의 공기를 눌러 담는 그의 작풍은 한 여성의 일대기로 근현대사를 아우른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미발표작 ‘반란’에까지 관철되었다. 송 작가에게 있어 시나리오란 역사의 비극을 재현함과 더불어, 인간성을 짓밟는 시대에 작품으로 응수하는 저항의 방식이기도 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