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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유튜브에 영화관 강의까지 ...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의 종횡무진

by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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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연주자에게 무대 위 묵언(默言)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연주 그 자체로만 음악을 드러낸다. 앙코르 요청을 받았을 때 앙코르 곡 제목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 외엔 입을 열 일이 없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34)은 이 불문율을 깬다. 무대에서 말이 많다. 연주에 앞서 곡의 배경, 특징 같은 것을 직접 설명한다. 관객과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실 편한 일은 아니다. 연주 연습만으로도 바쁜데, 혹여 잘못된 정보라도 줄까봐 작곡가와 곡에 대해 한층 더 꼼꼼히 공부해야 한다. 공연장에서도 한참을 설명하노라면 연주에 쓸 힘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런데 2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한수진은 "아예 사전에 영상을 녹화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곡 설명을 미리 녹화한 영상으로 들려준 뒤 연주에 들어가겠다는 얘기다. "아직까지도 '클래식은 어렵다'는 편견이 남아 있는데다 클래식은 가사 없는 연주곡이 대부분이라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거든요. 제 설명이 클래식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그 바람 하나예요."


온라인에서 들을 수 있는 한수진의 입담도 보통 아니다. 그는 지난해 10월 '유튜버'가 됐다. 연주 영상이나 음악이야기는 물론, 연주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놓는다. 채널 구독자수 6만5,000명을 넘어섰다. 유튜버가 된 이유도 똑 같다. "원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거의 안했는데" 팬 권유로 시작했고 지금은 "클래식에 관심 없던 분이 제 유튜브 보고 공연장에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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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중요한 건 역시 입담 아닌 실력. 이미 독보적이란 평을 받는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머니 영향으로 어려서 활을 잡았다. 두살 때 영국으로 건너갔다 2001년 열다섯 나이로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2위에 올랐다. '바이올린의 쇼팽 콩쿠르'라 불리는 대회에 "시험삼아 참가한" 성적이 그랬다.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마녀' 정경화에게서 따로 연락이 왔다. "방학 때 미국으로 건너가 정경화 선생님한테서 레슨을 받았어요. 음악적 완성을 위한 집요한 노력, 그리고 현악기 고유의 하모닉(화성)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너무 좋았던 시간이었죠." 지금도 정경화는 자신의 멘토다.


한수진 연주의 가장 큰 장점은 '풍부한 감정'이 꼽힌다. 한수진 연주를 들은 지휘자 정명훈이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극찬하며 수차례 협연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한수진은 현재 1666년산 스트라디바리를 평생 임대 형태로 쓰고 있다. 바이올린의 가장 저음부인 '솔' 현의 소리가 깊고 풍부하다. 감정 표현이 장기인 한수진을 만나 비브라토에서 나무의 따뜻한 떨림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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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진은 지난 17일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코심)와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2004년 정명훈 지휘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함께 연주한 이래 16년만의 재회였다. 해외 활동이 많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참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20대 중반에 턱관절 수술을 받은 것. 회복되는데 6년이 걸렸는데, 그 중 3년은 악기를 아예 잡을 수도 없었다. 연주자로선 고통의 시간이었을 텐데, 한수진은 해맑은 사람으로 통한다. 인터뷰 내내 활달했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턱수술에다 선천적으로 왼쪽 귀 청력이 약해 음악계에선 한수진을 베토벤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저도 힘들었지만, 베토벤의 심정에 감히 비교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베토벤은 항상 정의를 추구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주관을 지킨 사람이었으니까요. 다만 저도 소신껏 연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마침 한수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올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한수진이 가장 아끼는 곡은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베토벤이 유서를 쓸 정도로 슬펐으면서도, 한편으론 행복에 대한 갈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음달 15일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유일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연주한다. 한수진은 "스케일과 아르페지오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왕관에 박힌 보석 같은 작품"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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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한수진은 영화관 진출도 눈 앞에 두고 있다. CGV가 영화관 클래식 강연을 부탁한 것. "모든 음악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비슷한 영화나 책 같은 걸로 클래식을 친근하게 풀어볼 생각"이라 말했다. 물론, 그때 그 때 즉흥적 연주는 덤이다.


한수진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브람스를 꼽았다.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 같지만 흘러 넘치지는 않는 절제미" 그리고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매력"이 있다. 잡음 없는 깔끔한 기교, 풍성한 감정선을 갖춘 30대 중반의 연주자는 자신의 닮은꼴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