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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안동 산골 양반 가문이
구미로 집단 이주한 까닭

by한국일보

전주 류씨 집성촌 구미 해평면

한국일보

구미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마을'. 1987년 무렵부터 안동 임하댐 수몰지구의 전주 류씨 집안이 집단 이주해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위쪽 산자락에는 안동에서 옮겨 온 10채의 고택이 자리 잡았다.

‘자 명노(字 明老)’, 이름보다 괄호 안에 쓴 한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류완성 구미 해평면 일선리 이장의 명함에 적힌 또 다른 이름이다. 특이하다는 반응에 “학문이 모자라니 호(號)는 없지만, 누구나 자(字) 하나쯤은 있지 않나요? 허허”라며 웃어넘긴다. 겸손하지만 뼈 있는 농담이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던 관례를 지켜가는 양반 가문의 자부심이 은근히 묻어 난다. 일선리는 불과 30여년 전에 조성된 전주 류씨(이장은 '유씨'가 아니라 꼭 '류씨'로 표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집성촌이다. 입향조부터 들먹이며 수 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고을에 비하면 역사랄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일선리가 오늘날 구미를 대표하는 양반마을이라 자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안동 무실과 박실마을을 선산으로 옮겼다

일선리는 근래에 조성한 마을답게 반듯반듯하게 구획돼 있다. 골목은 직각으로 교차하고 토담도 모퉁이가 슬쩍 휘어졌을 뿐 대개 일직선이다. 마을 어귀에 ‘수류우향(水柳寓鄕)’이라 새긴 유래비가 서 있다. ‘무실마을 전주 류씨 가문이 새로운 고향을 만났다’는 의미다. 무실마을은 안동 임동면 수곡리에 있었던 류씨 집성촌으로 1992년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겼다. 무실을 비롯해 인근 박실, 한들, 고천, 갈전 등 산골짜기 자연 부락까지 합하면 류씨 가구가 300여호나 사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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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리 문화재마을 초입에 전주 류씨들이 이주한 내력을 적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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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는 물과 떨어질 수 없는 법, 전주 류씨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다시 터를 잡았다.

무실(水谷)이라는 지명 때문일까, 아니면 버드나무(柳)는 물가에 살아야 할 운명이기 때문인가. 경치 좋은 하천 주변에 살다가 문전옥답과 마을이 수몰되는 낭패를 당한 전주 류씨는 전국을 돌며 이사할 곳을 찾다가 결국 다시 물가에 삶터를 잡았다. 일선리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고향의 반변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강이다. 뒤로는 태조산이 우뚝 솟아 있다. 하류에 정말 큰 댐이 들어서지 않는 이상 다시 수몰될 위험은 없는 곳이다. 산골 토지보다 훨씬 널찍한 논밭도 마련했으니 이만하면 또다시 가문의 역사를 이어갈 만한 곳이다.


마을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집도 논밭도 없었다. 산기슭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마을을 조성했다. 지금 80여가구가 살고 있는데 무실에서 31가구, 이웃 박실과 한들에서 각각 29가구, 10가구가 이주해 류씨가 70가구에 이른다. 10가구의 다른 성씨 중에서도 절반은 수몰지구에서 함께 이주한 사람들이다.


마을의 공식 명칭은 ‘일선리문화재마을’이다. 전주 류씨가 무실마을에 처음 자리 잡은 것은 1500년대 초 류성이라는 사람이 안동의 명문가 의성 김씨 사위로 들어오면서부터다. 류성의 두 아들은 외삼촌인 학봉 김성일 밑에서 자라고 공부했다. 장남 기봉은 임진왜란 때 학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남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웠고, 차남 복립은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김천일 등과 함께 자결했다. 살아남은 류성의 장남은 무실에 뿌리를 내리고, 류성의 동생은 인근 박실에서 종파를 이뤄 일대가 전주 류씨 세거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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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옮겨온 고택은 마을 위쪽에 자리 잡아 낙동강이 아련히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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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조성한 일선리 문화재마을의 토담은 모퉁이가 슬쩍 휘어졌을 뿐 대개 일직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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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수몰지구에서 이전한 용와종택. 용와 류승현은 조선 숙종~영조 때 학자다.

500년을 한 터전에서 살았으니 남긴 문물도 많았다. 기양서당을 비롯해 동암정ㆍ만령초당ㆍ침간정 등은 한결같이 조선시대 전통 가옥의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 그중 일부는 고향 인근으로 이전했고 동암정ㆍ침간정ㆍ용와종택 등 10채의 고택은 주민들과 함께 일선리로 옮겨 왔다. 이전한 건물은 모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또는 민속자료로 등록돼 있다. 기와는 새것으로 올렸지만 목재는 그대로 가져왔으니 양반가의 뼈대는 유지한 셈이다.


용와종택 마루에는 초헌 아헌 종헌 등 생소한 직책 아래에 이름이 나열돼 있다. 불천위 제사를 올릴 때의 업무 분장표다. 보통 4대가 내려가면 제사를 없애는데, 불천위는 나라에서 영원히 사당에 모셔도 된다고 허락한 신위(神位)여서 대대손손 제사를 차린다. 안동의 50 불천위 중 두 신위를 일선리에 모셨으니 이 또한 마을의 자부심이다. 방안 벽면에는 숙종과 영조 때의 학자 용와 류승현(1680∼1746)부터 이어지는 7m 넘는 족보가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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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와종택 마루에 불천위 제사를 지낼 때 역할을 담당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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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와종택 방안의 2개 벽면에 걸쳐 전주 류씨 족보가 둘러져 있다.

역시 안동에서 옮겨 온 삼가정(三檟亭)에는 ‘운하동천(雲霞洞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류완성 이장은 실제 삼가정 앞에 물안개 피어나는 아담한 계곡이 있었고 개울이 얕아도 아주 아름다웠다고 옛 모습을 회고했다. 정자 앞에는 가죽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그것까지 옮겨오지는 못하고 마당에 어린 나무를 새로 심었다. 바로 옆에는 침간정(枕澗亭)이 있다. 침(澗)은 왕모래 가득한 얕은 물에 햇살이 반짝이는 냇가를 뜻한다. 그런 풍광을 베개 삼아 지은 정자라는 의미인데, 침간정 앞 개울 풍경이 그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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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수몰지구에서 옮겨 온 침간정과 삼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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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정에 '운하동천' 현판이 걸려 있다. 실제 정자각 앞에는 물안개 피는 작은 계곡이 있었다고 한다.

안동 양반들이 일선리를 이주지로 택한 데에는 선산이 영남 사림의 본거지라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퇴계 이전까지만 해도 선산은 길재에서부터 하위지 이맹전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 학맥의 중심이었다. 일선리와 낙동강을 사이에 둔 선산읍 원리에 야은 길재의 학덕을 기리는 금오서원이 있다. 금오산 아래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고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일선리의 ‘일선’은 신라시대 선산의 지명이다. 공단이 들어서고 개발이 진행되면서 해체돼버린 선산 양반고을의 맥을 안동에서 이주해 온 무실마을이 잇고 있는 셈이다.


고향을 떠나온 지 30년이 넘었지만 일선리 주민들은 여전히 안동과 연을 맺고 산다. 대종가와 조상의 산소가 있으니 문중 일은 모두 거기서 꾸려진다. 추석 성묘는 모두에게 당연한 일이고, 일부는 음력 시월에 지내는 시제에도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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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황토담장은 운치 있지만 아스팔트 도로여서 다소 멋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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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리 문화재마을은 외지인이 알음알음 찾아올 뿐, 붐비는 관광지가 아니다. 고택 담장 안에 배롱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문화재마을’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일선리를 관광지라 하기는 애매하다. 마을 해설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여행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갖추지 못했다. 마을 어귀에 식당이 하나 있을 뿐, 그 흔한 카페도 없다. 오히려 그래서 산책 겸 호젓하게 마을을 둘러보기 좋다. 고택의 길다란 황토 담장 너머로 500년 양반가의 기품이 은은히 풍긴다.

도리사, 신라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곳

일선리 문화재마을 뒤편 냉산(태조산으로도 불린다)에 도리사(桃李寺)라는 사찰이 있다.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고구려의 승려 아도(아도화상)가 세운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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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는 냉산 8부 능선에 위치해 어디서나 전망이 시원하다. 소나무 기둥 뒤로 해평면 들판과 낙동강이 펼쳐지는데 안개에 가려져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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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참선했다는 좌선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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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개면 신라불교초전지의 전시관에 아도화상이 복숭아꽃 그늘 아래서 참선하는 형상을 재현해 놓았다.

아도화상은 눌지왕 때인 417년 포교를 위해 낙동강을 건너와 일선군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에서 일하며 숨어 지냈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110여년 전이다. 신분을 숨기고 살던 아도는 나중에 성국공주를 치료하고, 그 공로로 왕에게 경주에 사찰을 짓겠다고 요청하지만 관료들의 반대로 쫓겨난다. 다시 모례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밭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을 발견하고 사찰을 지으니 바로 도리사다.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미추왕 2년(263)이라고도 하고, 소지왕(479~500년 재위) 때라는 설도 있다. 그럼에도 아도화상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사실과 설화를 적절히 배합해 신화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사는 국내에서 입구가 가장 긴 사찰이다. 산문에서 절간 주차장까지 무려 5km가 넘는다. 초입은 느티나무 가로수길이 이어지고 사찰에 가까워질수록 솔숲이 도드라진다. 정갈한 솔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가면 적멸보궁, 태조선원, 극락전 등의 전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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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전각 주변엔 솔숲이 잘 가꿔져 있다. 마침 안개가 잔뜩 끼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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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의 세존사리탑. 1977년 경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사리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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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의 적멸보궁. 건물 뒤편에 별도로 석탑을 만들어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1977년 절 동쪽에 있던 석종 모양의 부도를 경내로 옮기는 과정에서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208호)과 함께 사리 1점이 발견됐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타이틀에 진신사리를 보유한 절이라는 명성을 더하게 됐다.


태조선원은 절집이라기 보다 일반 한옥에 가깝다.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고려 창건의 기초를 세운 지역이라는 것에 신라 불교의 태동지라는 의미를 더한 중의적 명칭이다. 극락전 마당에서 조금 내려가면 아도화상이 참선하던 좌선대가 남아 있다. 고인돌 모양의 평평한 돌 옆에 2개의 비석이 서 있다. 하나는 아도화상 사적비이고 다른 하나는 도리사에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다. 아도가 신라 땅에서 처음 묵었던 집주인 역시 사찰 건립을 위해 전 재산을 시주했다고 전해진다. 모례의 집은 사찰에서 가까운 도개면이다. 모례 집안의 우물(모례가정)이 남아 있는 일대를 구미시에서 ‘신라불교초전지’로 꾸며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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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현판은 태조선원 건물에 붙어 있다. 왕건이 고려 개국의 기초를 닦은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건물이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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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서대는 앞이 툭 트인 전망대다. 늦장마가 이어진 지난 7일 구름과 안개가 잔뜩 끼어 낙동강 물줄기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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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서대에서 내려다보는 해평면 소재지 일대. 들판 너머 강변의 해평습지는 철새도래지로 이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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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화상이 신라 땅에 발을 들이고 숨어 지냈다는 모례 집안의 우물(모례가정)이 도개면에 남아 있다.

주차장에서 사찰 반대편 산책로를 따라가면 서대(西臺)가 나온다. 아도화상이 좋은 터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절을 세우니, 그곳이 직지사(直指寺)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현재 도리사는 직지사의 말사다. 왠지 주종이 바뀐 듯하다.


서대에서는 어디로 보나 전망이 툭 트였다. 날이 좋으면 멀리 직지사를 품은 황악산이 우람하게 보이고, 가까이로는 낙동강 물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해평면 소재지의 초록 들판 너머로는 해평습지가 이어진다. 겨울마다 수많은 철새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구미=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