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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방 3개 초미니 호텔, 부대시설은 국내 최대 ‘천상의 화원’

by한국일보

정선 고한읍 ‘마을호텔 18번가’의 기적

한국일보

고한18리 상가 골목 입구에 '마을호텔 18번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실제 호텔은 방 3개짜리 단층 건물이 전부지만 깔끔한게 단장한 식당과 가게가 가맹점으로 가입해 마을 전체가 호텔 부대시설이다.

지난달 21일 정선 고한읍 구공탄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 초입 바닥에는 분홍빛 꽃잎이 그려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자부심도 이제 식상한 레퍼토리로 퇴색할 시기, 잿빛 탄광촌은 전혀 새로운 빛깔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400m 좁은 골목 집집마다 화분이 놓이고, 주민들의 표정도 꽃처럼 한결 밝아졌다. 고한읍 인구는 1980년대 최대 3만 8,000명에 달했다. 불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마을 이름도 새로 짓지 못하고 숫자만 덧붙여 법정 주소는 고한36리까지 늘어났다. 꽃 그림이 그려지는 동네는 고한18리, ‘마을호텔18번가’의 명칭은 그렇게 탄생했다.

주민이 먼저다, 고한 18번가의 조용한 기적

‘샤랄라라 라랄라라~’ 감미로운 배경음악이 깔리고, 여행가방을 끌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대형 회전문을 통과한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고급스러운 샹들리에 조명이 은은한 우윳빛 대리석에 비치고, 깔끔한 차림의 호텔리어가 흐트러짐 없는 미소로 손님을 맞는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면 통유리창으로 전망 좋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돈만 내면 유명 셰프의 요리는 물론 갖가지 부대시설과 취미 프로그램까지 이용할 수 있으니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다. 내 집이 아니어서 내 집처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고급 호텔의 전형적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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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고한읍 고한18리 일대. 마을호텔18번가를 중심으로 골목 전체가 호텔 부대시설처럼 깔끔하게 단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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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고한읍 마을호텔18번가(하늘색 간판)와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수작'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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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읍 '마을호텔18번가' 앞에 꽃수레가 놓여져 있다. 경쟁이라도 하듯 집집마다 화분을 가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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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18번가 안내데스크 옆에 로비 겸 휴식 공간이 있다.

고한 ‘마을호텔 18번가’도 엄연한 호텔이다. 그런데 모든 편의시설을 내부로 끌어들인 기존 호텔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의 숙소다. 우선 방이 3개뿐이다. 최대 투숙 인원은 하루 10명, 웬만한 여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내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호텔이다. 고한에서 제일 오래된 식당이었지만 오랫동안 문을 닫고 방치돼 있던 건물을 개조했다. 주인은 호텔을 하겠다는 제안에 5년간 무상으로 집을 내주었다. 대신 임대료는 마을의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보상받겠다고 했다.


미니 호텔이니 구성이 단순하다. 방 3개를 빼면 1층 안내데스크와 휴식 겸 책을 읽을 수 있는 로비 공간이 전부다. 바로 옆에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수작’ 카페가 붙어 있고, 내부 좁은 통로를 따라 뒷마당으로 나가면 집과 집 사이에 작은 테라스가 비밀의 공간처럼 나타난다. 이 호텔의 유일한 부대시설로, 역시 10년 넘게 방치돼 있던 폐가 공터를 개조했다. 답답한 벽면엔 정암사 수마노탑을 배경으로 별빛이 부서지는 그림이 장식돼 있다. 그림 한가운데에 조그맣게 ‘아름다움을 보고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마을’이라 쓰여 있다. 글자체가 왠지 익숙하다. 캘리그래퍼 강병인 작가의 필체다. ‘참이슬’ ‘산사춘’ 등 주류는 물론 ‘정도전’ ‘미생’ 등 드라마 제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친근하고 예술적인 글자체를 선보인 대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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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18번가의 야외 테라스. 오래된 건물 벽면에 정암사 수마노탑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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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이 걸린 건물에 화사하게 '봄'이라는 글자가 장식돼 있다. 캘리그래퍼 강병인 작가의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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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 골목 한 건물 앞에 '정암광업소' 광차 모양의 화분이 놓여 있다.

그러고 보니 골목으로 들어서서 꽃 수레와 화분 다음으로 눈길을 잡는 것이 독특한 글자체였다. ‘봄’ ‘꽃’ ‘바람’ 등이 나열된 작품은 가게 업종과 전혀 상관없는데 건물 분위기와 묘하게 조화를 이뤄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의 글씨와 마을 화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골목의 10여개 소형 가게는 마을호텔18번가의 또 다른 부대시설이다. 중식당으로는 40년 전통의 ‘국일반점’이 있고, ‘구공탄구이’ ‘예촌돌솥밥’ ‘누리한우촌’ ‘먹방쭈꾸미’는 한정식과 별미를 뽐내는 레스토랑이다. 50년 전통의 ‘영주이발소’는 단골 손님의 미용을 책임지고, ‘그린세탁소’는 투숙객의 세탁 서비스를 맡는다. 이외에 소규모 연회장과 강연장으로 ‘마을회관’이 있고, ‘들꽃사진관’과 ‘하늘기획’에서는 여행객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모든 업체가 마을호텔 투숙객에게 10% 할인한다. 대형 호텔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정성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인테리어와 서비스는 고급 호텔을 따라갈 수 없지만 가격 경쟁력은 월등히 뛰어나다.


김진용 마을호텔18번가 사무국장은 불과 2~3년 전만해도 빈집이 수두룩했는데, 마을호텔이 들어서고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는 가맹점에 가입하려는 문의가 늘고 있고, 조만간 2호 마을호텔도 개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고한이 카지노 도시로 변하고 나서 주민의 생계도 카지노를 이용하는 장기 투숙객에게 의존해 온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분위기도 다소 음침하고 이미지도 좋지 않았죠.”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마을을 소규모 가족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 있었고 그래서 기획한 게 마을호텔이다. 최초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강경환 영화감독이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영화제작소 눈’ 역시 사회적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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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18번가에서 시작한 골목길 정원이 점차 주변으로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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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적으로 번진 골목길 정원 가꾸기는 고한읍내에서 이제 일상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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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18번가 인근 골목 담장에 다육식물로 만든 발레 작품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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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 사업 이후 고한읍 골목은 카지노 도시의 음산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점점 화사하게 변하고 있다.

올해 2회를 맞는 ‘고한 골목길 정원박람회’도 같은 맥락이다. 골목 정원 가꾸기는 꽃 수레가 놓인 마을호텔에서부터 주변으로 들꽃처럼 번지고 있다. 손님을 맞는 식당과 가게는 물론 일반 주택의 화단과 벽면도 꽃 향기 가득한 정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18번가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주택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다육식물 작품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손이 덜 가면서도 작품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어 선정된 식물이다. 고추 상추를 비롯한 채소가 심겼던 대문 앞 상자 텃밭도 수국 금잔화 등 다채로운 정원 식물로 채워졌다. 화단에 물을 뿌리는 주민의 모습이 이곳에서는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됐다. 정원 가꾸기가 이웃간 은근한 경쟁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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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탄광촌인 고한읍 한 골목 바닥에 화사한 꽃그림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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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읍 마을호텔18번가 인근 골목에도 다육식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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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18번가 골목에서 작업하던 최승선 회화 작가가 환한 표정으로 웃어보이고 있다. 21일까지 순두부집을 개조한 마을 전시관에서 최 작가와 강병인 캘리그래퍼, 이혜진 사진작가의 '골목길 문화예술' 전시가 열리고 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정원박람회를 대놓고 홍보할 수도 없는 처지지만 김 사무국장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골목을 외지 사람으로 채울 욕심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관광객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마을을 가꾸고 살리는 게 정원박람회의 주 목적”이기 때문이다. 단체 관광객보다는 가족끼리 조용히 거닐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또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도시재생과 관광지 개발사업에서 관광객이 아니라 주민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일깨운다. 고한 마을호텔18번가가 또 어떤 기적을 이뤄낼지 기대된다.

마을호텔의 최대 부대시설은 ‘천상의 화원’ 만항재

고한 18번가 골목에는 생화만 화려한 게 아니다. 어둠이 내리면 야생화 형상의 조명이 골목과 가게 한 귀퉁이를 곱게 밝힌다. 마을호텔의 분위기 조명도 바로 주민들이 직접 제작한 야생화 등이다. 동자꽃 이질풀꽃 붓꽃 등이 각각 특유의 감성 빛깔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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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호텔18번가 방안의 야생화 조명등.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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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면 집집마다 은은한 조명이 켜지며 마을호텔18번가는 새로운 분위기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천상의 화원’ ‘야생화 천국’으로 불리는 만항재는 마을호텔의 가장 큰 부대시설이다. 고한 읍내에서 함백산 자락으로 약 10km를 거슬러 오르면 만항재 정상이다. 해발 1,330m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이다. 비교적 평탄한 고갯마루 부근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종류의 야생화가 피고 진다. 가을로 접어드는 요즘에는 마타리와 벌개미취, 곤드레나물로 알려진 고려엉겅퀴와 온갖 종류의 국화가 피어나고 있다. 정상 바로 아래 함백산소공원에 정선군 숲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혼자 걸어도 좋지만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한결 깊이 있게 천상의 화원을 산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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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항재 정상 부근의 일본잎갈나무 숲. 그늘진 숲 아래에 철마다 온갖 종류의 야생화가 피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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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화원 만항재에 마타리가 노란 꽃을 피웠다. 지금부터 벌개미취를 비롯한 국화 종류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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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드레나물로 알려진 고려엉겅퀴 꽃에서 벌들이 정신 없이 꿀을 빨고 있다.

만항재에서 고한으로 내려오는 길에 정암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전각은 화려하지 않지만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이름나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지성으로 기도한 후 문수보살로부터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받아 선덕여왕 12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부처의 사리는 사찰 뒤편 산중턱의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있다. 마노석으로 쌓은 7층 모전석탑으로 지난 6월 보물에서 국보 제332호로 승격된 탑이다. 마노는 금은과 함께 일곱 가지 보석 중 하나다. 마노 앞에 수(水)자가 붙은 건 용왕의 도움으로 돌을 옮겼다(물길을 따라 가져왔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찰은 소박하고 단정하다. 바로 앞으로 맑은 개울이 흐르고 숲이 울창하다. 사찰에서 수마노탑까지 오르는 길은 짧지만 꽤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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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정암사 수마노탑. 사찰에서 멀지 않지만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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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석으로 쌓은 7층 모전석탑인 정암사 수마노탑은 올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인근의 삼탄아트마인은 1964년부터 38년간 운영되다 폐광된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를 예술 전시장으로 꾸민 시설이다. 외형을 그대로 유지한 4층 건물 내부를 카페와 전시실로 꾸몄고, 야외에는 레스토랑과 기억의 정원 등을 조성했다. 마을호텔18번가 투숙객에게는 입장료(성인 1만3,000원)의 50%를 할인한다. 


정선=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