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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자박자박 소읍탐방]

바다와 육지가 교차하는 곳,
그 언덕에 전망 좋은 해군기지

by한국일보

<77>보령 오천면 충청수영성

한국일보

천수만 물길이 내륙으로 깊숙히 파고 든 지점에 위치한 보령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성은 언덕 위 영보정에서부터 마을을 한 바퀴 두르고 있다. 바깥 바다 수평선 부근이 태안 안면도다.

명당도 세월 따라 변하는 모양이다. 보령 하면 단번에 대천해수욕장이 떠오른다. 서해 최대 규모인 드넓은 해수욕장에 머드축제라는 콘텐츠를 더해 외국인도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됐다. 보령 시내에서 북측 해안, 멀리 대천해수욕장이 보일 듯 말 듯한 바닷가 언덕에 토정 이지함(1517~1578)의 묘가 있다. 1532년 모친이 사망한 후 명당으로 점지하고 한산에 있는 선친의 묘까지 옮겨 합장했다. 이후 자신은 물론 형제와 조카까지 묻혀 가족묘로 조성돼 있다. 그의 묘에서 북측으로 조금만 가면 오천항이다. 조선시대 해군기지라 할 수영(水營)이 있었고 지역의 중심지였다. 여러모로 보령의 명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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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시내에서 오천항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바닷가 언덕에 자리 잡은 토정 이지함 가족묘.

바다가 예쁜 해군기지, 충청수영성

오천항은 예부터 보령 북부권의 생활 중심지였다. 주포ㆍ주교ㆍ청소ㆍ천북 등 주변의 면소재지로 통하는 길이 오천에서 연결된다. 무엇보다 오천항은 천수만의 주요 어항이다. 바닷물이 내륙으로 2km 이상 깊숙이 밀려드는 곳에 위치한 까닭에 방파제 등 별도의 방재시설이 필요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끝자리 1일과 6일 오천장날이면 서해의 각종 해산물이 더욱 풍성해진다. 원산도 삽시도 외연도 황도까지 보령 근해와 먼바다의 모든 섬들도 오천면에 포함된다. 바다까지 치면 전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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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성은 엄격하고 스산한 군영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예부터 주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영보정 아래로 쪽빛 바다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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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성 성벽 위에 뿌리를 드러낸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바로 아래에 올망졸망한 포구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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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성 성벽을 따라 걸으면 오천항의 고즈넉한 포구 풍경을 밟고 지나는 느낌이다.

오천항은 또한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피고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크고 작은 어선이 나란히 정박한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충청수영성이 있다.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요즘으로 치면 서해 방어 해군기지다. 백제 때부터 회이포(回伊浦)라는 명칭으로 중국과 교역해왔고, 고려시대부터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많은 군선이 주둔했다. 조선 세조 12년(1466)에는 수영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해왔다. 왜구의 침탈을 막는 것은 물론, 서해와 천수만을 이용해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초기 충청수영 산하에 배속된 군선이 142척, 수군은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자라 모양의 지형을 활용해 1,650m에 이르는 석성을 보강함으로써 더욱 튼튼한 모양새를 갖췄지만, 충청수영은 고종 33년(1896) 폐영된다.


충청수영성은 사방에 성문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내부에는 동헌을 비롯해 영보정, 관덕정, 대섭루, 능허각, 고소대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다. 현재는 서문인 망화문과 진휼청, 장교청 등이 보존되고 있다. 성벽도 새로 복원한 영보정을 중심으로 일부만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산성과 달리 바닷가 언덕에 쌓은 성은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몇 계단만 오르면 화강석을 아치형으로 쌓은 망화문을 통과한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 장소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석문 주변의 터줏대감은 동백이 아니라 팽나무다. 연륜이 묻어나는 적갈색 석재와 뿌리를 드러낸 팽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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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형 석축으로 남아 있는 충청수영성 망화문. 성 안팎의 팽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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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는 충청수영성 영보정.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아 좌우로 전망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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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의 충청수영성 영보정. 정약용과 이항복이 일대 풍광과 함께 조선 최고의 정자라 칭송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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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성 영보정 뒤편, 보령방조제 인근 논바닥에 '2022 보령 해양머드박람회'를 알리는 벼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곡선으로 휘어진 성벽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면 오천항 풍경이 발 아래부터 펼쳐진다. 200여척에 달하는 어선들이 강처럼 내륙으로 흐흐는 푸른 바다에 올망졸망 붙어 있다.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진휼청 건물을 돌면 언덕 꼭대기에 근래에 복원한 영보정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자 마루에 오르면 바다와 강(광천천)을 분리하는 보령방조제와 일대의 드넓은 습지까지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충청수영성은 군영으로는 드물게 경관이 수려해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은 없어진 바다 건너편 황학루ㆍ한산사와 어우러진 풍광이 일품이었던 모양이다. 다산 정약용과 백사 이항복은 영보정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했다고 한다. 규남 하백원(1781~1844)의 ‘해유시화첩’에는 수영성의 누각뿐만 아니라 포구의 거북선까지 그려져 있어, 19세기까지 거북선을 운용했다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기도 한다.


성벽의 형태는 희미해졌지만 성곽은 도로 건너편으로 이어진다. 객사인 장교청과 외삼문인 공해관이 남아 있고, 성벽을 따라 천주교 갈매못 성지까지 순례길이 이어진다. 광천천이 천수만과 만나는 곳, 오천항 초입에 위치한 갈매못 성지는 충청수영성과도 뗄 수 없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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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항 초입 갈매못 성지에 순교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 지도자 5인이 처형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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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갈매못 순교성지의 조형물 뒤로 천수만 바다가 보인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조선 제5대 교구장이던 프랑스인 다블뤼 주교와 복사(미사 때 사제를 도와 시중을 드는 사람)이자 회장인 황석두가 당진에서 체포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위앵과 오메트르 신부는 자수했다. 이들은 제천에서 체포된 장주기와 함께 의금부로 압송돼 문초를 받은 뒤 사형을 선고받는다. 마침 고종의 혼인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던 시기였다.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국혼에 좋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조정에서는 이들을 충청수영성으로 옮겨 처형하게 된다. 충청수영성에서 처형장으로 정한 곳이 바로 갈매못이다. 현재는 못은 남아 있지 않고 바다와 접한 구릉이다.


이때 처형된 5명의 순교자는 한국천주교가 200주년을 맞은1984년 성인으로 추대된다. 갈매못 성지도 함께 정비해 바닷가 낮은 언덕에 순교자기념비, 기념관, 사제관 등이 들어서 있다. 충청수영과 연계된 유적으로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도미부인 전설과 해안경관전망대

충청수영성에서 동쪽으로 약 3km떨어진 상사봉 중턱에 도미부인 사당이라는 시설이 있다. 이름이 특이하고 생경한데, 오천면에선 지역의 역사를 한층 끌어올리는 인물로 부각시키는 모양이다. 사당의 공식 명칭은 ‘도미부인 정절사’다. 도미부인은 백제 때 여인으로 삼국사기에 개루왕(128~166)의 유혹과 위협을 뿌리친 미인이자 정절의 여인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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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오천면 상사봉 언저리의 도미부인사당.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전설적 인물을 기리는 시설인데, 분위기가 자못 진지해 조금은 당황스럽다.

오천면에 ‘미인도’ ‘도미항’ ‘상사봉’ 등 전설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고 있어 1994년 사당을 건립하고, 사당 안에는 번듯하게 영정까지 걸었다. 2003년에는 경남 진해에 있던 남편 도미의 묘를 이장해 사당 옆에 부부 합장묘를 조성해 놓았다. ‘정절사’라는 명칭도 퇴행적이거니와 전설 하나로 이렇게 진지할 일인가 싶다. 사당에서는 전설 속 ‘미인의 섬’이라는 빙도가 멀리 내려다보인다. 광천천 중간에 있는 작은 섬으로 현재는 육지와 제방으로 연결돼 있다.


도미부인 사당에서 임도를 따라 약 2km 숲길을 걸으면 산중턱에 ‘충청수영 해안경관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접근성이 좋지 않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시설은 탄탄하고 전망은 시원하다. 왼편 충청수영성에서부터 정면의 보령방조제, 우측의 빙도와 주변 습지까지 파노라마 전망이 펼쳐진다. 좌측 논바닥에는 색깔 있는 벼로 그린 ‘2022 보령 해양머드박람회’를 알리는 그림도 선명하게 보인다. 상단의 돌출형 전망대에 서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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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면 상사봉 중턱의 충청수영 해양경관전망대에 오르면 오천항~보령방조제~빙도에 이르기까지 일대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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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면 상사봉 중턱의 충청수영 해양경관전망대. 전망은 나무랄 데 없지만 접근성이 좋지 않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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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 해양경관전망대 풍경. 광천천과 빙도(맨 오른쪽 상단 작은 섬) 주변으로 드넓게 습지가 형성돼 있다.

전망대 바로 아래 도로변에 주차장이 있다. 500m 산길을 거슬러 오르자면 약 20분이 걸린다. 도미부인 사당에서 걸으면 길이 평탄해 오히려 쉽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한적하게 숲 속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보령=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