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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재난가방 싸는 프레퍼 "유난 떤다고요? 팬데믹도 유비무환입니다"

by한국일보

[인터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프레퍼' 우승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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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경기 평택에서 만난 '프레퍼' 우승엽 도시재난연구소 소장. 왕태석 선임기자

"저희 프레퍼들은 이번 코로나 때 약국 앞에 줄 설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팬데믹 상황에 대비해 창고에 마스크를 쌓아놓고 만반의 준비를 했거든요."


16일 경기 평택시에서 만난 도시재난연구소 소장 우승엽(47)씨는 자신을 "프레퍼(prepper)"라고 소개했다. 프레퍼(prepper)는 '준비하다(prepare)'는 동사와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er)를 합친 말로 '준비하는 사람'을 뜻한다. 지진, 태풍, 화산 폭발 등 국지적 자연재해부터 전쟁, 기아, 팬데믹 등 전지구적 재난 등이 언젠가 닥쳐올 것이라 믿고, 이를 준비하는 이들을 말한다.


우씨는 이미 지난해 1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올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프레퍼를 보고 '쓸데없는 짓 한다'는 비난이 많았지만 코로나 이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프레퍼가 유난 떤다고? 특전사 출신이 재난 대비 전문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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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난떤다고요? 인류 멸망에 대비하는 프레퍼 우승엽씨. 왕태석 선임기자

프레퍼는 아직 한국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미국에는 300만명 이상의 프레퍼가 있을 정도로 꽤나 널리 알려진 집단이다. 댄 트라첸버그 감독의 2016년 작품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처럼, 할리우드 영화에는 핵전쟁을 대비해 지하벙커를 만든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한다.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프레퍼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미국에서는 프레퍼가 하위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에서 벗어나 주류 문화로 도약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받는다. 미 CNN 방송은 올해 3월 물, 손전등, 건조식품 등이 들어있는 생존가방(bug-out bag) 매출이 20배 가까이 껑충 뛰었다며 "코로나가 지속하는 동안 프레퍼족의 인기는 점점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우씨가 운영하는 프레퍼 인터넷 카페 '생존21' 회원 수도 신종 코로나를 기점으로 10% 이상 급증, 현재 2만5,000명에 이른다. 우씨는 "프레퍼에 대해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도 코로나 이후 구독자 수가 10배가 뛰어 4만명까지 늘었다"고 전했다.


우씨는 군 생활 도중 경험했던 극단적인 상황 이후 프레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우씨는 특전사령부 소속으로 군 복무를 하다, 1996년 강릉에서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 투입됐다. 당시 벌어졌던 총격전은 그가 상상했던 전투와는 다른, 생경한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한다. 우씨는 "근처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전쟁이란 건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 달리 더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에 압도됐다"라며 "실제로 재난이 닥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것이 분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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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강릉 앞바다에 좌초된 채 발견됐던 북한 상어급 잠수함. 연합뉴스

이후 그는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쳐도 생존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화재 등 상상도 못한 사건 사고가 줄을 잇던 1990년대 중후반의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프레퍼'였다. 당시에도 한국에 프레퍼가 있기는 했지만, 소수 집단이 열광하는 컬트적인 분위기가 강해 재난 대비법보다는 종말론적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퍼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외국에선 이미 학교에서부터 생존배낭 싸는 법을 가르치는 등 재난 대비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하고 있더라고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잖아요. 그때부터 재난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죠."

대부분의 재난은 '도시'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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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프레퍼에 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나던 우씨는 2012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본격적인 '재난 대비 전문가'로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재난 전문가로서 우씨가 대비하는 재난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그의 관심사는 '도시 재난'에 집중돼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주민등록상 총인구 5,185만명 중 4,759만명, 전체 인구의 무려 91.8%가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씨는 "무인도에서 생존 체험을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실제로 우리가 직면할 가능성이 높은 재난은 도심 속 재난"이라며 "아파트라는 거주 형태 등을 고려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씨에 따르면 최근의 '도시 재난 매뉴얼'은 재난 종류에 따라 큰 차이가 없다.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방역 당국이 외부 출입을 자제를 요청하는 것처럼, 전쟁이나 수해 등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각종 상황에 대비해 집안에 물과 식량 등 비상 물자를 비축해 놓는 것이 핵심이다.


우씨는 우선 '3ㆍ3ㆍ3 법칙'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은 3분 동안 호흡하지 못하면 죽고, 3일 동안 물을 안 마시면 죽고, 3주 동안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존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라 방독면, 물, 비상식량은 프레퍼에겐 필수적인 물품들이다. 도심 속 화재의 경우, 유독가스에 질식해서 인명 피해가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마다 방독면은 꼭 미리 챙겨둬야 한다. 신종 코로나처럼 격리 기간이 지속될 경우를 대비해 생수를 비롯해 통조림 등 비상식량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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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난떤다고요? 인류 멸망에 대비하는 프레퍼 우승엽씨. 왕태석 선임기자

우씨의 도심 속 생존 방법은 오랜 기간에 걸친 실험의 산물이기도 한다. 그는 피난을 갈 때 차에 연료가 떨어질 경우를 상정해 각종 대체연료들로 실험을 하기도 했다. 우씨는 "휘발유 대신 시너를 어느 정도 비율로 섞으면 차가 고장나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참치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보통 6년이지만, 습기 없는 곳에 보관만 잘하면 10년 이상 섭취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가 절대 추천하지 않는 비상식량은 바로 라면. 우씨는 "라면은 유통기한이 짧아 얼마 안 가 못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프레퍼의 재난 준비는 재난상황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특히 신종 코로나 같은 팬데믹의 영향력은 단순히 전염 사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여파를 동반한다는 게 우씨 주장이다. 실제로 우씨는 벌써부터 신종 코로나로 인해 올 하반기 식료품 가격 상승이 우려된다며 이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실제로 우씨 주변엔 짧게는 한달, 길게는 반년까지 비상 식량을 비축하고 있는 프레퍼가 많다고 한다. 그중엔 주택 지하실이나 아파트 베란다를 개조해 창고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사회 재난의 가장 큰 특징은 '복합적'이라는 거예요. 코로나는 대규모 감염으로만 끝나진 않을 겁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코로나뿐 아니라 긴 장마에 태풍까지 수해도 여러 차례 있어서 수확기가 오는 10월쯤 식료품 등의 가격이 폭등할 겁니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지만, '재난가방'은 3만원이면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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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의 연립주택 트라움하우스 5차. 이곳 지하엔 핵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벽 두계 80cm의 벙커가 설치돼 있다. 박서강 기자

우씨처럼 온갖 물자를 차곡차곡 비축해 두려면 돈이 많이 드는 것 아닐까? 우씨는 "재난은 평등하지 않지만, 재난 대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소위 '최상위층'만을 위한 벙커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 우씨는 "수도권 한 야산에 재벌 및 유명 연예인들이 이용하는 회원제 벙커의 운영 컨설팅을 해준 적 있다"며 "최대 1,000명까지 수용가능한 규모에, 식용 곤충을 기르는 시설까지 있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지난 2015년 강덕수 전 STX조선 회장의 서울 서초동 자택이 법원 경매에 나온 적 있는데, 이 주택 지하에 핵 공격까지 버틸 수 있는 벽 두께 80㎝의 벙커가 있어 화제가 된 적 있다. 진도 7의 강진에도 끄덕 없는 이 벙커에서 200명 정도가 2개월 이상 생활할 수 있다고 한다. 전기 공급 중단을 대비해 수동 발전기가 있고, 벽체 곳곳에는 방사능 오염물질과 핵 먼지 등을 걸러내는 필터와 공기순환기도 설치돼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해당 주택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우씨 이야기론 재벌들 사이에서 벙커 소유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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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엽 도시재난연구소 소장 제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그는 재난 대비의 필수품인 '재난배낭'은 단돈 3만원이면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날 그가 직접 보여준 재난배낭은 '천원숍'이나 편의점에서 등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라이터, 맥가이버 칼, 나침반, 호루라기, 우비, 무전기, 담요, 손전등, 라디오 등이다.


"이게 제 휴대용 생존가방이에요. 최소한의 생존 도구들을 다 합쳐도 무게가 10kg도 안 되요. 직장인이라면 집에 1개, 회사에 1개. 4인 가족이면 집 안에 4개. 휘황찬란한 벙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만 준비하면 무슨 일이 터져도 당장의 생존에는 문제가 없어요."

'좀비' 대책도수립한 미군... 재난 대비도 '상상력'이 필요해

혹시 모를 재난에 대비하는 게 프레퍼라지만, 우씨는 프레퍼가 늘어나는 현상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프레퍼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유에는 세월호 참사나 포항 지진 등의 사례와 같이 "정부가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불안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몸은 내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얘기다.


그는 재난 대비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군 당국이 영화에서나 나올 만한 '좀비' 확산 대비 계획 문건을 작성한 적도 있다. 정치전문매체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2011년 미 전략사령부는 좀비 사태가 발생, 일반 시민들을 공격할 경우 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계획안을 수립했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고 인간이 자연에 맞서는 경우가 많아지며, 인류가 과거엔 상상할 수 없던 재난이 현실화 하기도 한다는 게 우씨의 지론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 있죠? 그 말처럼 우리는 재앙을 예상하는 것부터 금기시해요. 그래서 늘 일이 터지고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죠. 사람 잡는 '설마'가 현실이 되는 게 현대 사회에요. '0%'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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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난떤다고요? 인류 멸망에 대비하는 프레퍼 우승엽씨. 왕태석 선임기자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