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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가위질 몇 번에 64년 훌쩍 ”…여든의 이발사, 오늘도 '사각사각'

by한국일보

부산 정원이용원

한국일보

64년째 이발업에 종사하고 있는 부산 동광동 '정원이용원' 주인장 서정현씨는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이지만 아직도 가위를 놓지 않고 있다. 그는 두 다리도 튼튼하고, 면도할 때 손도 떨리지 않는 복을 타고 나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이발사의 가위 소리는 새벽녘 간밤에 내려 쌓인 첫눈을 밟는 소리처럼 정적을 가로 질렀다. 형광등 불빛을 가득 머금은 가위는 양날이 움직일 때마다 은빛으로 반짝이고 또 반짝였다. 22일 오후 부산 중구 동광동 백산거리 뒷골목에 숨은 듯 자리잡은 ‘정원이용원.' 이 이발소 주인장 서정현씨의 빠른 손놀림이 반복됐다. 바닥에는 손님의 머리카락이 쌓여갔다. 그러는 사이 손님의 머리 모양은 깔끔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단골 손님이시냐?"는 물음에 70대 노신사는 “10년 정도 꾸준히 오고 있는데, 여기서는 10년 단골은 명함도 못 내민다”며 웃었다.

"내 나이 팔순, 손 안 떨리는 것만 해도 복"

머리 손질이 끝나자 서씨는 이발소 한 켠에 있는 밥솥을 열더니 안에 있는 비눗물을 컵으로 뜬 뒤 솔로 컵 안을 휘저었다. 새하얀 거품이 걸쭉하게 일었다. 밥솥에 있는 비눗물은 적당히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발사는 거품을 손님의 볼과 목덜미에 바르고 이내 면도를 시작했다. 그는 “면도를 할 때 (내) 손이 아직도 떨리지 않는 것도 정말 큰 복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발의 모든 과정이 끝나자 서씨는 “멋쟁이 되셨소”라고 했다. 손님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는 빗으로 다시 한번 머리를 넘기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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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현씨가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는 모습. 서씨에게는 30년이 넘는 단골 손님이 많다.

우리 나이로 올해 80세인 서씨. 열 여섯살 때 이용기술을 처음 배웠으니 올해로 64년째 이발 가위를 잡고 있다. 지금도 오전 7시 문을 열고, 오후 7시 문을 닫는다. 규칙적인 가위 소리만큼이나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지킨 세월이다.


서씨는 “세월이 참 빠르다, 가위질 몇 번 하는 사이에 훌쩍 시간이 지나간 듯 하다”고 말했다. 사람의 머리를 다듬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된 그의 이야기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 광양 출신인 그는 7남 2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시골의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에 합격하고도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 마을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4년 동안 받았다. 그는 “다들 어려운 시절이었다”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서씨는 “당시 부산에서 운전업을 하던 큰형님의 부름을 받고 부산으로 무작정 와 이런저런 일들을 배웠다”고 했다.


소년은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서 부산 어시장에서 잡일을 하다 발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양화점에서 일했지만 맑은 공기만 마시던 시골 소년은 지독한 약품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 그러다 형님이 단골로 다니는 이발소를 소개 받아 그 곳에서 일하게 됐다. 서씨는 “그냥 이발소 안이 따뜻하고 냄새가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 열심히 일을 배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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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현씨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면도 거품을 내 면도 작업을 한다. 면도 거품을 내는 비눗물은 밥솥을 이용해 적당히 따뜻한 온도를 유지한다.

나는 64년차 노이발사

평생의 업이 된 이발을 배우는 과정은 시작부터 고단했다. 이발소 바닥을 쓸고 닦고, 난로용 석탄인 조개탄을 나르는 등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에게 제공되는 것은 이발소 바닥에 합판을 깔고 잘 수 있는 잠자리와 식사, 목욕비에다 휴일에 가끔 영화를 볼 수 있는 용돈 정도였다. 손님들 머리 감기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서씨는 “당시엔 손님이 너무 많아 하루 종일 머리를 감겨야 했다”면서 “거의 한달 동안 머리를 감지 않고 오는 떡 진 머리의 손님들도 많았다”고 했다. "빡빡 감겨달라"는 주문도 많아 손톱이 닳아 자랄 사이도 없었다. 밤이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기 일쑤였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바로 위 고참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뭐든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이발 기술을 유심히 봐뒀다 일과를 마친 뒤 연습 하면서 조금씩 기술을 익혀 나갔다. 눈썰미 덕분에 면도 기술도 이발 기술도 갖추게 됐다. 서씨는 “그 뒤로 월급을 좀 더 많이 주고, 실력도 발휘할 수 있는 이발소로 옮겨 본격적인 이발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옮겨간 부산의 한 중학교 앞 이발소에서 일 할 때에는 몰려드는 학생들과 부두 노동자들로 잠시 한번 앉을 틈이 안 나는 때가 많았다.


실력이 쌓인 서씨는 50여년 전인 1970년 무렵 부산 중구 동광동에 자신의 이발소를 차렸다. ‘정원이용원.' 이발소 앞 작은 공간에 나무를 심으면서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동광동은 인접 중앙동과 함께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였다. 부산시청을 비롯해 법원, 언론사, 상공회의소, 각종 회사가 몰려 있었고, 한국은행과 국내 유명 은행의 지점, 우체국 등이 밀집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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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가 이용 기술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건 16세 때였다. 서씨가 손님에게 면도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서씨는 “당시 우리 이발소엔 단골 고객으로 변호사, 기자, 은행 지점장, 병원장 등이 많았다”면서 “한창 잘 될 때는 조발사(머리를 다듬는 직원) 10명에 면도사 4명 등 10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영업했다”고 말했다. 일대에서 머리를 잘 깎기로 소문이 난 덕분이었다.

일본서도 손님들 찾았지만 '퇴폐' 불똥에...

그는 “당시 벌이가 얼마나 좋던지 하루 벌어 TV를 사고, 하루 벌어 한달 치 월세를 낼 정도였다”고 말했다. 종종 일본인 손님들도 찾아와 일본어가 가능한 이발사를 채용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접어 들면서 시련이 닥쳤다. 퇴폐 이발소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용 기술은 온데간데 없고 퇴폐의 정도가 영업의 성패를 좌우했다. 손님 수는 급격히 줄었다. 서씨는 “정말이지 그때는 업을 접을까 생각도 했고,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일부 낡은 시설을 새로 고치는 등 시설 투자를 하면서 퇴폐 영업을 정면 돌파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손해도 많았고, 마음도 크게 다쳤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바닥을 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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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가 4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선반장 위에 가위와 빗 등 이발 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서씨는 “잠시 퇴폐영업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이용 기술로 승부를 계속했다”면서 “당시의 어려움이 ‘이발 장인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더 굳건하게 해줬다”고 말했다. 마음을 다잡은 서씨는 이후 두 번 다시 인생의 ‘절정기’를 맛보진 못했다. 하지만 후회 없고, 자랑스럽다 했다. 서씨는 “그때 경제적인 ‘절정기’는 잃었지만 유행이나 시류에 휘둘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정신적인 ‘절정기’를 가져온 것 같다”고 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발소를 이용하는 젊은이들이 크게 줄었다. 서씨의 이발소도 점점 손님의 발길이 줄었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서씨는 처음 이발소를 연 이후 50여년 동안 2, 3번 이사를 해야했다. 오래된 건물이 헐리고 주차장이 들어서는 등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는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첫 개업 가게 주변을 떠난 적이 없다. 단골 때문이다. 지금의 장소도 40여년 동안 영업을 했던 곳에서 불과 5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3년 전 옮겨왔다. 이발소 한쪽에는 40년이 훌쩍 넘게 쓰고 있는 수납장이 세월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수납장 선반 위에는 이발에 쓰는 각종 가위와 빗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씨는 “지금껏 갈아치운 가위만 300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했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 전국서 찾은 단골들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탓에 단골 손님만 아직도 40~50명에 이른다. 대부분 60~80대로 보통 30년 이상 단골이다. 멀리 서울에서, 경남과 울산에서도 찾아 오는 단골이 있다고 한다.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라며 그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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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가 운영하는 '정원이용원' 전경. 서씨는 이 이발소 반경 50m 안에서만 2~3차례 이발소를 옮겨 다니며 50여 년을 자리를 지켰다.

이발소 안쪽 벽에 걸려 있는 족자의 글이 그에게 딱 어울린다고 했더니 그는 “안 그래도 그런 말을 하며 근처에 사는 오랜 친구가 준 것”이라고 했다. ‘窮不失義達不離道’(궁불실의달불리도), ‘아무리 궁해도 의로움을 잃지 말고, 거침없이 잘 나간다고 자기 길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맹자의 글귀다.


서씨는 “이용 기술 덕분에 아들딸 잘 키웠고, 우리 부부도 별 탈 없이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한다”면서 “아직 건강에 이상이 없어 마지막까지 한길을 간다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둘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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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광동 '정원이용원' 위치.

또 다른 손님이 이발소로 들어왔다. 서씨는 “어서 오이소~”라고 맞으며 자리에 앉힌 뒤 이발보로 손님을 감쌌다. 곧 이어 “사각사삭, 사각사각…” 가위와의 호흡을 다시 이어갔다.


부산= 권경훈 기자 werther@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