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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 ]

[라제기의 '배우'다] 만취 선배가 새 차를 훼손해도 유해진은 씩 웃었다

by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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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그를 영화로 처음 봤다. ‘블랙잭’에서 덤프1 역을 연기했다. 운전하다 비리 경찰 오세근(최민수)과 시비가 붙는 인물이었다. 오세근의 차 앞 유리에 우유팩을 던져 운전을 방해하는 모습이 섬뜩했다. 연기는 강렬했지만 얼굴은 잔상을 남기지 못했다. 배우로서는 지극히 평범한 외모인데다 출연 시간이 짧았다.


누구나 그렇듯 ‘주유소 습격사건’(1999)을 보고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유소를 점거한 일당들을 급습하는 양아치 우두머리 역할이었다. 험상궂은 얼굴의 유해진이 큰 물통을 두드리면서 이종혁 등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모습은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가 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투자배급사 시네마서비스 대표였던 강우석 감독은 영화를 보고선 촬영장 주변 동네 불량배를 출연시킨 것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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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은 여러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해왔음에도 무채색 배우다. 그의 활동 초기엔 코미디에 한정된 감초 배우 자리에 머물 것이라고 착각했다. 몸에 딱 들러붙은 바지를 입고 “이건 일본 어린 애기들이나 쓰는 '스위찌브레이드'라는 것이디요”라고 잘난 체하다 자기 손등에 칼을 꽂는 칼잡이 용만(‘공공의 적’)이 가짜 범인까지 만들어내는 냉혈한 장석구(‘부당거래’)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치 못했다(그래도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날치 떼가 비상하는 모습을 재연하는 그의 코믹연기를 보면 언제나 즐겁다). ‘타짜’의 고광렬이 유해진의 이미지에 가장 가깝고 본다. 폭포수 같이 말을 쏟아내며 주변을 즐겁게 하면서도 절제를 아는 수다쟁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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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은 자기 과시욕이 없는 배우다. 충무로 주연급 위치에 올라선 후에도 소탈한 성격은 여전하다. 최근 한 자리에서 몇몇 배우들의 고약한 술버릇이 화제에 올랐다. 어느 유명 배우는 포장마차 프로판가스통에 라이터 불을 붙이려 했다는 등 기겁할 여러 에피소드가 오가다가 유해진의 사례가 언급됐다. 2000년대 초반 영화인들이 모여 어느 감독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만취한 배우 A가 사라졌다.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아파트 단지에 연신 울려 퍼졌다. 유해진은 옆자리 사람과 건배하고 술을 마신 후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A 형이 제 차를 (무언가로) 때리는 소리입니다.” 유해진이 오랜 무명시절을 끝내고 마련한 새 차였다. 오랫동안 교유했던 A가 취기와 시기심에 벌인 소동 앞에서 유해진은 여느 술자리처럼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왕의 남자’(2005)로 협업한 이준익 감독은 “유해진하면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사람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아침 해가 뜨면 어김없이 밭일 나가는 농부처럼 주어진 일을 근면 성실하게 해내는 배우”라는 이유에서다. 이 감독은 “24시간 동안 연기하는 배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 단 1초도 한눈을 안 판다”며 “신인배우가 유해진만큼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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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2010)는 노력파 유해진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영화다. 조금은 모자라면서 저돌적인 인물 김덕천을 연기했는데, 자기가 모시는 마을 이장의 비밀을 파헤치는 유해국(박해일)에게 독백하듯 대사를 쏟아내는 장면이 압권이다. “가서 장부에 도장 찍어 오니라. 도장 안 내놓으면 지장이라도 박아 오니라. 지장 안 박아주면 손가락이라도 잘라 오니라. 손가락 안 내놓으면 멱이라도 따 오니라. 멱 안 내놓으면 조상 묘라도 쓸어 오니라. 가서 불이라도 질러뿌라.” 유해진은 이 대사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촬영 중 제주도 한 목장으로 가 2주일을 머물며 연습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엔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현대무용을 배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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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의 다음 영화는 다음달 5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승리호’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영화인데, 유해진의 얼굴을 볼 순 없다. 그는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 역을 맡아 동작과 목소리 연기를 했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골룸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골룸의 동작을 연기한 배우 앤디 서키스의 얼굴을 아는 이는 적다. 유명 배우라면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역할을 선뜻 맡기 어렵다. 자신의 개성을 앞세우지 않고, 한 이미지에 고정되지 않으려 하는 배우 유해진다운 행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