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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방방곡곡 노포기행] "서울시청 직원에게 '강매'했던 그 아파트… 지금은 호가 18억원"

by한국일보

<54> 여의도 금성부동산


“뒷간은 멀리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방 옆에 변소가 두 개나 붙어 있는 집을 사겠다니! 절대 도와줄 수 없다.”


아들 부부가 찍어둔 신혼집을 둘러보기 위해 경북 김천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아들 부부는 설득을 해봤지만 ‘성냥갑 같은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 ‘화장실은 집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태도는 완강했다. 아들 부부는 결국 매매를 포기해야 했다. 분양자조차 “오를 리 없다”며 분양가격(582만원)보다 싸게 내놓은 전용면적 156㎡(48평)짜리 집이었다. 1971년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붙어도 팔리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특히 5층 이상은 “높아서 아찔하다”고 사람들이 기피했다. 현재 같은 평수의 호가는 28억원 안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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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넘게 여의도 일대 아파트 매매를 중개해 온 김윤성(80) 금성부동산 대표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점포 앞에 섰다. 배우한 기자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서 처음으로 분양한 데다, 아파트란 생소한 주거환경에 대한 우려 때문에 들어와 살려는 이는 많지 않았다. 미분양 난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50년 넘게 시범아파트를 매매해 온 김윤성(80) 금성부동산 대표는 “서울시에서 야심 차게 개발했는데 분양이 매우 저조하니까 시청에서 과장급은 전용면적 79㎡(24평), 계장급에겐 60㎡(18평)를 강매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시범아파트 이후 여의도에서 분양한 은하·삼익·목화아파트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김 대표는 “여의도 개발 붐이 강남으로 옮겨붙은 뒤 강북에도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다”며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아파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환경으로 거듭나는데, 나도 어느 정도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며 웃었다. 여의도 개발 역사의 산증인이자, 여의도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중개업소인 금성부동산은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4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서울미래유산 470개 중 부동산은 2곳에 불과하다.

“할아버지가 하는 복덕방, 처음엔 거부감”

전북 고창 출신인 김 대표가 원래부터 부동산 중개업을 했던 건 아니다. 그는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 비닐을 납품하는 직매소 소장으로 있었다. 그러다 ‘복덕방’을 하던 친척의 권유로 이 길에 들어섰다. 그때 나이가 20대 후반. “당시만 해도 동네를 잘 아는 할아버지가 소일거리 삼아 부동산 중개를 했어요. 처음 권유받았을 땐 거부감이 컸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제 발전으로 부동산 거래가 활발해질 것 같아 뛰어들게 됐죠.”


서울 강서 화곡동에서 토지 매매 일을 하던 김 대표는 1970년 10월 당시 모래밭이었던 현재 여의도성모병원 자리에 ‘천막 가게’를 열고, 공사 중이던 시범아파트 분양을 중개했다. “앞으로 여의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란 친구(서울시청 재직)의 말이 계기였다.


그것도 사전 정보라면 사전 정보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너'를 뜻하는 한자 여(汝)에 어조사 의(矣)를 붙여 ‘너나 가지라’는 뜻의 이름이 유래됐을 정도로 당시 ‘너의 섬’ 여의도는 불모지였다. 조선 시대 때는 국립목장으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진 간이 비행장으로 쓰였다. 애초에 사람 살 만한 땅이 아니었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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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 이후인 1973년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서울대교(현 마포대교) 모습. 서울시 제공

김 대표는 “서울의 부족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의도개발마스터플랜까지 짜놓았는데 정작 땅이 팔리지 않으니 서울시가 직접 짓기로 한 게 시범아파트”라며 “시범아파트 근처에 부동산중개업소를 연다니까 서울시에서 크게 환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이 아파트는 12층 규모의 24개 동, 1,584가구로 이뤄졌다. 12개 건설사가 2동씩 맡아 1970년 9월부터 짓기 시작해 이듬해 10월 완공했다. 공사 기간을 1년여로 잡았을 정도로 당시 서울의 주택난은 심각했다.

80년대 최소 하루 5건씩 매매… ‘웃돈’ 붙은 전매거래 활발

국내 최초의 고층 아파트 단지인 시범아파트는 처음으로 중앙공급식 난방과 공동구를 채택했다. 공동구는 미관 개선 등을 위해 전선·수도관·가스관·전화 케이블을 함께 묻는 지하시설물이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냉·온수가 나오고, 보일러에서 나온 수증기로 난방을 했기 때문에 다른 아파트들의 연탄 난방보다 안전하고 편리했다. 김 대표는 “모범을 보인다는 ‘시범’이란 말처럼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아파트 형태의 기준을 처음 제시한 게 시범아파트”라고 설명했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생소하니까 신기한 물건 타보자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방문할 정도였죠. 48명의 안내 여승무원이 2교대로 근무를 했고, 주민들 모두가 엘리베이터 작동법을 알기까지 2~3년 동안 안내 여승무원이 계속 있었습니다.” 시범아파트는 1층부터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최초의 아파트란 타이틀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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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성(80) 금성부동산 대표가 갖고 있는 1970~80년대 아파트 매매 일지. 배우한 기자

시범아파트가 들어선 뒤 여의도 개발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1975년 국회의사당이 준공됐고, 1979년엔 증권거래소, 1980년엔 KBS방송국이 들어서며 여의도는 정치·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김 대표는 “1970년대 중반부터가 여의도 전성기의 시작이었다”고 회상했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고급주거지란 인식이 확산하면서 여의도로 돈이 몰렸다. 그는 “하루에 최소 5건의 아파트 매매를 중개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오전에 매매계약을 체결한 사람이 그 가격에 50만원을 얹어서 오후에 내놔도 바로 팔렸어요. 인기가 있으니까 프리미엄을 붙여서 팔 생각으로 산 사람들이 10명에 7명은 됐던 거 같습니다.” 당시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은 30만~50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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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개발이 많이 진행된 198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모습. 서울시 제공

그러다 학원가가 형성된 다른 지역으로 수요가 빠지고 90년대 후반 외환위기(IMF)까지 맞으면서 여의도 부동산 시장은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김 대표는 “1억6,000만원 정도 하던 시범아파트 전용 79㎡의 가격이 IMF 땐 1억원까지 떨어졌었다”며 “백화점, 쇼핑몰이 계속 들어와 주거 여건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노후 아파트 재건축까지 끝나면 여의도가 제2의 황금기를 맞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쌓아온 신뢰 지켜야... 아들도 '가업' 잇기로

50년 넘게 부동산중개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김 대표는 색 바랜 낡은 전화번호부를 꺼내왔다. 1972년 시범아파트 상가 전화번호부였다. 거기에 실린 금성부동산 광고에는 ‘금성의 사람은 겸손·친철하며 신의와 성실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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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80세가 된 김윤성 금성부동산 대표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점포 문은 남보다 일찍 열고 늦게 닫는다, 내게 들렀던 손님이 다른 중개업소에서 집을 매매하더라도 축하해준다, 손님과는 절대 다투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켜왔던 게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부족한 점에 대해 반성하고, 겸손하게 사람을 대해온 게 중요했다는 얘기다. 아들 범기(51)씨가 2009년 10월부터 일손을 돕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범기씨는 “아버지가 쌓아온 신뢰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가업을 잇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로 산수(傘壽)를 맞은 김 대표는 은퇴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복덕방에서 공인중개사사무소로 명칭은 바뀌었지만, 사람과 집을 연결해주는 역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중개한 집에서 사람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면 복가(福家)를 이어준 것 같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때까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