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라이프 ]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67> 노래하는 플로리스트 박혜경

성대 수술·찜질방 생활… 가수 박혜경이 깨달은 것

by한국일보

두 차례 수술 거치며 성대 회복

노래 놓았던 시기 플로리스트로 

“이젠 나를 중심에 두고 살겠다”

한국일보

‘노래하는 플로리스트’가 된 박혜경을 9월 2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가수 박혜경(47)은 한 세대의 설렘이었다. “내 오래된 친구인 널 좋아하게 됐나 봐. 아무렇지 않은 듯 널 대해도 마음은 늘 떨렸어”라며 망설이고 망설이다 ‘고백’(1999)하고, “빛바랜 나의 일기장, 바다로 가는 기차표, 수줍게 전해 주고픈 너의 생일 첫 키스”를 ‘너에게 주고 싶은 세 가지’(2000)로 간직했다.


사랑이란 ‘주문을 걸어’(1999) 마법에 빠진 듯 “까만 너의 눈 속에 너를 바라보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란 걸, 우리는 그의 노래를 부르며 새삼 깨달았다. “별일 없나요 그대 역시 나처럼 깨어나고 잠들며 그런대로 사나요”라며 이별 후의 ‘하루’(2000)에 눈물 흘린 청춘이 한둘일까. 그래도 “외로운 날들이여 모두 다 안녕, 내 마음속에 눈물들도 이제는 안녕”이라며 ‘안녕’(2003)을 외치는 날이 반드시 오는 게 인생. 그 시간 내 마음과 함께해준 그의 음성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나.


그렇기에 2013년 그의 성대폴립(후두에 물혹이 생기는 질환) 수술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성대의 3분의 2를 폴립이 덮었던 거다. 수술 이후 곧 복귀하리라 기대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노래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마치 “다리를 잃은 축구선수처럼” 방황했다. 그 공백을 채운 건 꽃이었다. 프랑스 파리로 떠나 플로리스트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왔고 중국에 머물며 플로리스트로 살았다.


이것이 얘기의 끝이라면 우리는 지난해 그가 낸 신곡 ‘RAINBOW’를 듣지 못했을 거다. 그는 몇 년 전 2차 성대 수술을 받았고 예전의 목소리를 거의 회복했다. “아직도 제가 노래를 못하는 줄 아는 분이 많다니까요?” 언제 적 얘기를 하느냐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그는 성대 수술, 두 건의 오랜 법적 분쟁 같은 인생의 고비들을 넘기고 오늘 우리 곁에 있다. 그 힘은 가수가 되겠다는 꿈 하나를 붙들고 중학생 때 홀로 상경한 산골 소녀의 강단에서 나왔는지도. “난 그럭저럭 살아있음에 이 정도면 됐다고 씩 웃어버리곤 해”(RAINBOW)라고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에도 세월의 희로애락이 무지개처럼 쌓였다.


1997년 그룹 ‘더더’로 데뷔해 솔로로 전향한 뒤에도 1, 2집이 각각 15만 장, 20만 장 팔리며 ‘이전에 없던 목소리’로 대중에 또렷이 각인된 박혜경. 터뜨리지 않아 아련하고, 맑지만은 않아 깊은 그의 목소리를 누군가는 “첫눈 온 날 쌓인 눈을 처음 밟는 소리”라고 표현했다. 그는 노래할 때 “대중에게 말을 건다”는 생각으로 부른다는데, 그가 우리에게 건넨 얘기들은 세월과 함께 삶이 되었다.


그는 왜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의미도, 계획도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걸까. ‘박혜경’이라는 장르를 9월 28일 만났다. 자리에 앉은 그는 놓인 꽃을 보더니 눈을 떼지 못했다.

가수 되려고 중학교 때 홀로 상경

한국일보

그는 현재 소속사가 없다. 인터뷰 날도 혼자 화장품 가방과 의상을 들고 인터뷰 시작 1시간 전에 도착해 능숙하게 화장하고 준비했다. 이한호 기자

-‘더더’로 데뷔하기 전인 1995년 강변가요제에 나갔었더라고요.


“네, 어릴 때부터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 시절엔 가수가 되려면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나가는 게 방법이라고 여겼죠. 본선 진출은 했지만 입상은 못했어요.”


-고향을 찾아보니 전북 진안군 정천면 봉학리 신촌마을이더라고요.


“네, 아주 산골이었어요. 어릴 때는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서 물을 길어다 썼죠. 나무를 해와 불을 때며 살고요.”


-중학교 때 가수가 되려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꿈이 확실했네요.


“네, 기억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게 좋았어요. 학교에 다닐 땐 합창반도 하고 독창대회에 나가기도 했죠. 대여섯 살쯤엔 교회 선교사들이 노래를 가르쳤는데 ‘울면 안 돼’ 같은 캐럴을 배웠어요. 선교사 선생님이 ‘너는 목소리도 예쁘고 잘하니까 노래하는 사람이 돼라’고 했던 게 기억 나요.”


-중학생 때 혼자 서울로 가겠다고 결심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게 엄청난 결심은 아니었어요. 워낙 산골에 살았으니, 가수가 되려면 서울로 가야겠구나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도 그 나이에 혼자 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놀라셨을 것 같아요.


“아빠는 초등학교 때 돌아가셔서 엄마만 계셨는데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셨죠. 황당하셨겠죠. 게다가 엄마, 아빠 모두 독자라 서울에 가까운 친척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계속 가고 싶다고 하니 ‘공부보다 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보라’고 응원해주셨죠. 그러니 평범한 엄마는 아니었어요.”


-서울에서 사는 일은 어땠나요.


“아빠의 사촌 고모 댁에 저를 맡겨놓고 내려가셨는데, 꿈이 있어서 그런지 힘들거나 서러웠던 기억은 없어요. 낯선 곳에 사니 ‘톰 소여의 모험’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러다 하루는 먼 친척 삼촌이 대학로에서 밥을 사줬어요. 그때 거기서 어린이 뮤지컬 배우 오디션 포스터를 보곤 응시를 했는데 됐죠. ‘치롱이와 또롱이’라는 뮤지컬이었는데 주인공 치롱이 역을 했어요.”


-처음 본 오디션인데 주연에 발탁된 거네요.


“시골에서는 언제 그런 걸 해봤겠어요. 무대에서 노래하고 대사 외우고 분장도 하고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죠. 그 뒤로도 계속 뮤지컬을 했어요.”

CF곡으로 잇단 ‘역주행’

한국일보

그는 “시간이 흐르고 쌓이며, 발표 당시보다 더 많이 불리는 곡들이 많다”고 말했다. ‘고백’이 대표적이다. 이한호 기자

-가수로 데뷔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신촌에 있던 ‘우드스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김)영준 오빠를 만나게 된 거예요. 제가 사장님한테 ‘저는 이런 노래를 하고 싶은데 함께 노래 만들고 작업할 기타리스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사장님이 소개를 시켜준 거죠. 그래서 ‘더더’를 결성했어요.”


-1997년 낸 1집 ‘내게 다시’부터 인기를 얻었잖아요.


“나중에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그 노래가 들어가면서 많이 알려졌죠. 데뷔 직후엔 (반응이 크지 않아) 좀 실망했어요. 제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이슈는 됐지만요. 우리 노래가 그렇게 대중적이진 않았거든요.”


-장르가 ‘모던록’이었죠.


“네, 맞아요.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인디였던 셈이죠. ‘내게 다시’로는 방송도 거의 안 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불린 거죠.”


-말하자면, ‘역주행’한 거군요. 그런 곡들이 많죠.


“맞아요. 대형 기획사 소속도 아니었고 마케팅을 엄청나게 많이 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방송에서도 저를 잘 불러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공연을 많이 했죠. ‘고백’ 같은 노래도 발표 당시보다 그 후에 더 알려지고 불린 경우에요. ‘고백’을 들은 분들이 ‘이 가수가 ‘It’s You’도 불렀어? ‘내게 다시’도 부른 가수네!’하면서 쭉 듣는 거죠.”


그의 노래는 특히 CF음악으로 유명하다. 음료, 과자, 이동통신사, 커피음료, 화장품, 휴대폰, 보험을 망라했다. 그는 “38곡 정도가 쓰인 걸로 안다”고 말했다.


-1999년 솔로로 데뷔한 이후 인기가 더 높아졌죠.


“맞아요. 2008년 ‘레몬트리’까지 아주 오래 사랑을 받은 운 좋은 가수예요. 팬들 덕분이죠. 제 목소리를 무슨 색에 비유한다거나, 달콤 쌉싸름한 목소리라고 표현해주기도 하고요. ‘술 마신 다음날 처음 마시는 물 같다’ ‘눈밭을 처음 밟는 소리 같다’ 이런 건 모두 팬들이 해준 말이에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 저도 그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요. 나만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요.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독보적인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말한 대로 된 거네요. 인기도 많이 실감했을 것 같아요.


“히트곡이 많다고들 하지만, 한창 활동할 때는 인기를 못 느꼈어요. 갈망이 많았죠. ‘나는 언제 사랑받지. 나는 언제 인기가 있어질까. 왜 항상 여기 머물러 있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2000년 이미 6회 연속으로 콘서트 표가 매진됐다는 기사도 있던데.


“너무 바빠서, 너무 달리기만 해서 느끼지를 못했던 거 같아요. 주위에 조언해줄 사람도 없고요. 그저 노래만 부르며 산 거죠. 게다가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해본 적도 없거든요. 그럼에도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현명한 아이였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때는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가 부족했어요.”

노래의 자리를 채운 꽃

한국일보

그는 “꽃을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밝아진다”고 했다. 그가 “보석보다도 꽃이 더 좋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한호 기자

-방송보다 공연을 많이 했는데, 무대에 서면 어떤 기분인가요.


“신이 내게 준 보너스가 있다면 그걸 모두 써서 관객과 교류하고 교감하는 기분이죠. 저는 공연도 미리 짜인 계획이 아니라 그때 느낌대로 했거든요. 그러니 뭔가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기분이었죠. 정말 좋았어요. 팬들과 완전한 사랑을 나누는 느낌 같죠.”


-노래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요.


“노래 하나로 추억을 여행하기도, 위로받기도, 희망을 갖기도, 눈물을 쏟기도, 미소 짓기도 하잖아요. 노래 같은 마법이 어디 있을까요.”


-과거 기사를 찾아보니 소속사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더군요.


“정당하게 대가를 받은 적이 별로 없었죠. 역으로 저를 고소하기도 하고요. 지금은 가수들이 권익을 보호받을 길이 있지만, 그때는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2013년에는 성대폴립 수술을 했는데, 원래 성대에 문제가 있었나요.


“노래를 해서 생긴 게 아니에요. 노래를 많이 불러 목이 아팠던 적은 없거든요. 개인적으로 휘말린 법적 소송 스트레스로 생긴 것 같아요. 차라리 노래하다가 생긴 병이라면 덜 억울하기라도 할 텐데.”


-상태가 어땠나요.


“성대 3분의 2 정도에 혹이 있어서 잘라냈어요. 그 뒤 노래를 못하니 한동안 방황하다가 몇 년 전 다시 수술을 했어요. 지금은 90% 이상 (예전 상태로) 돌아왔죠. 처음 수술했을 때는 내 노래 중에서도 못 부르는 곡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해요.”


-처음 성대 수술 받았을 때 많이 힘들었겠네요.


“그랬죠. 건강뿐 아니라 스트레스까지 겹쳐서 회복하는 데 몇 년이 걸렸어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계속 보컬 트레이닝도 받고 있고요. 그런데 아직도 제가 노래를 못하는 줄 아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요. 정말 괜찮은데 말이죠.”


-힘들었던 시기에 플로리스트가 된 거죠?


“파리로 가서 플로리스트 디플로마를 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했거든요. 다시는 노래를 못할 수도 있으니,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기도 했고요. 뭘 알았으면 다른 걸 했겠지만. 하하. 돈이 될지, 안 될지 제대로 가늠하지 않고 그저 좋은 걸 한 거죠. 파리에서 3개월 정도 머물다 중국으로 갔어요.”


-왜 중국이었나요?


“한국에 있기가 싫었거든요. 중국은 우리나라와 다르니 적응에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저와 얽힌 사람이 없으니까 좋았죠. 플로리스트로 강의하고, 작품도 주문 받아 만들면서 살았어요. 다시 노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울기도 하고 예전 노래 들으면서 ‘이제는 이런 목소리가 안 나오네’ 싶어 힘들기도 했지만. 다 별것 아닌 게 돼요, 지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니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받아들이기까지 쉽지 않았겠어요.


“축구선수가 다리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니 절망적이었죠. 그런데 그때는 생계에 치여서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어서 정신 차려서 내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힘들어하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하니까.”

다시 노래를 부르다

한국일보

그는 요즘도 주문이 들어오면 플로리스트로서 일을 한다. 사진은 그가 만든 꽃 작품들. 박혜경 제공

그러던 그에게 한 방송사 TV 프로그램이 전환점이 됐다.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이었다. 우연히 공항에서 아는 방송작가를 만나 덜컥 출연을 약속했다. 그때 그는 ‘슈가맨’이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를 ‘소환’해 무대에 올리는 예능 프로인 걸 몰랐다. 작가 역시 그가 성대 수술 이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무대에 서서 ‘내게 다시’를 완곡했고, 히트곡 메들리까지 불렀다.


-2016년 ‘슈가맨’ 출연 때도 목이 온전치 않았던 거네요.


“네, 노래를 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란 걸 뒤늦게 알고 열심히 연습하긴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녹화 직전까지도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아, 망하겠다’ 했죠. 그래도 어떡해요. 약속은 했고, 나는 이미 스튜디오에 와 있는데. ‘한번 해보자’ 한 거죠.”


-그런데 노래가 된 거예요?


“완전히 옛날 같지는 않지만 불렀어요. 예전에 노래 불렀던 내 몸과 세포들이 기억해서 한 것 같았죠.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자신감도 생겼겠어요.


“맞아요. ‘다시 노래할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용기를 내서 2차 수술을 받은 거예요. 의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저는 믿었죠.”


-그 후 한동안 찜질방에서 지냈다는 얘기도 들려서 놀랐어요.


“과거에 있었던 긴 소송의 연장선에서 또 문제가 생겼어요. 집에 들어가기가 힘든 상황이었죠.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싫었고요. 그래서 두어 달 사우나에서 지냈죠.”


-히트곡이 많으니 경제적으로 도움이 많이 됐으리라 생각했어요.


“활동할 때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도 했고 소송 때문에 든 돈도 많았어요. 경제적으로 힘들 때 일부 저작권을 팔기도 했죠.”


-찜질방 생활은 어땠나요.


“의외로 사우나에서 기거하는 분들이 꽤 있더라고요. 그런 분들과 얘기도 나누면서 재미있게 지냈어요. 그때도 그렇게 힘들게 생각하지는 않았죠. ‘계속 이렇지 않을 거다’라고 믿었는지. 물론 이 모든 게 죽어야 끝나니까 살기 싫을 때도 있지만, 누구나 한번쯤 그런 생각은 들기 마련이잖아요. ‘내가 어디까지 바닥을 치려고 그러나’ 하면서도, 언젠가는 다 정리가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결심한 게 있어요.”


-뭔가요.


“나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노’라고 할 줄 알게 된 거죠. 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일이라면 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죠.”


-그 즈음 만난 곡이 ‘RAINBOW’인가요?


“맞아요. 작곡가 심태현씨가 만든 곡이에요. 가사는 저와 얘기 나눴던 걸 바탕으로 태현씨가 아내(서지우)와 쓴 거고요. 제 속내를 다 듣고 만든 노래죠. 제가 사우나에서 지내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태현씨가 저를 데려다 준 적이 있는데 ‘나 여기서 살아’하니까 깜짝 놀라더라고요.”


-이 곡이 남달랐겠네요.


“처음 데모를 듣고 나서 엄청 울었어요. ‘태현아, 노래 너무 좋다. 가사 정말 좋아. 어쩜 내 얘기처럼 썼니’ 했죠.”


“난 그럭저럭 살아있음에 이 정도면 됐다고 씩 웃어버리곤 해”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박혜경은 마치 삶을 달관한 듯한 음성으로 부른다. 그가 인생길에서 길어 올린 삶의 태도와 맞닿아서일 테다.

그럭저럭, 얽매이지 않고

한국일보

그는 “지나간 일을 들추지도, 물건을 쌓아두지도 않는다”며 “마음도, 집도 미니멀리스트”라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시기에 꽃이 노래의 자리를 대신했죠. 꽃은 어떤 의미인가요.


“아, 저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의미를 만들지 않으려고요. 살다보면 살아진다고 하잖아요. 오늘 내가 잘 살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너무 훌륭하게, 행복하게 살려는 강박이 강해요. 의미를 애써 찾으려고 하고요. 그래야 인생이 완벽해지는 건 아닌데. 꽃은 보면 예쁘잖아요. 그저 마음이 밝아져서 좋죠.”


-그렇게 살겠다는 거군요.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오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충분히 했거든요. 그걸로 됐다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예전에 ‘훌륭한 가수가 돼야지. 가수가 돼서 사랑받고 성공해야지’라면서 이를 악물고 살았거든요. 그렇게 애쓰며 살았으니 이젠 내게 잘해주면서 살려고 해요. 아직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엄청난 일 아닌가요. 그걸로 된 거예요.”


-요즘도 플로리스트로 활동을 하나요.


“네, 아는 사람들이 주문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요즘 방송 출연 기회가 종종 생겨서 한동안 못하고 있어요. 저는 ‘노래하는 플로리스트’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뭔가요.


“어릴 때는 없었어요. 지금은 ‘내 중심으로 살자’는 거예요.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쁘게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봐요. 남에게 피해를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답게 살자는 거죠.”


그는 앞으로 계획이 없다고 했다. 계획에 치여 살고 싶지 않아서. 행복한지 물으니,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복 강박증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흘러가는 대로 살려는 거다. 그리고 종종 글을 쓴단다. “글은 나한테 말을 거는 시도”라고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그는 비로소 자기 삶의 주어를 ‘나’로 상정하게 된 거다.


한국일보

그는 “웃기도, 울기도 하고, ‘이불 킥’이나 반성도 하면서, 그럭저럭 나를 곧추세우며 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한국일보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