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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인터뷰-엄마] <3>가수 인순이 모녀-엄마 김인순

인순이 “날 닮지 않아 고맙고, 날 닮아서 신기한 내 딸아”

by한국일보

태교하며 눈동자 색까지 기도한 엄마

“무대 서느라 아이가 자는 모습만 봐

이제는 내 언니가 된 듯 든든한 딸”

한국일보

‘국민가수’ 인순이씨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그가 ‘엄마로서’ 언론과 인터뷰하는 건 처음이다. 이한호 기자

왜 저녁 때 만나자고 했냐고요? 비누 제조나 판매를 할 수 있는 자격(화장품책임판매관리자) 시험을 봤거든요. 합격요? 했지요! 가수가 웬 비누냐고요? 우리 해밀학교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선물로 비누를 만들어 보내고 있거든요. 제가 아예 자격증을 따서 전문가의 도움 없이 해보려고 시험을 봤죠.


저, 인순이가 해밀학교 이사장인 건 아시지요? 맞아요, 자식 하나 키우기도 벅찬데 다문화 가정 학생들까지 키워보자고 일을 벌였지요. 우리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진로) 코칭 자격증도 땄잖아요, 제가.


2013년에 세웠으니 벌써 9년째예요. 무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해서 제 사비와 후원금으로 운영해요. 소박한 비누지만, 감사한 후원자들에게 제 딴에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거죠.

◇낳아서 피부색부터 살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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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모녀인 인순이씨와 박세인씨. 생김새뿐 아니라 표정이나 몸짓까지 닮았다. 사진은 따로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이한호 기자

우리 세인이 잘 만나셨어요? 저랑 많이 닮았죠? 하하. 제가 막 낳아서 품에 안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거예요. 가만 보니까 내 얼굴이더라고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태몽요? 있었죠! 2개나 꿨다니까요. 하나는 다이아(몬드) 반지였어요. 모서리에 작은 다이아반지 4개가, 가운데엔 커다란 다이아반지가 든 상자를 받은 꿈이었어요. 다른 꿈에선 내가 저수지 같은 데를 걷는데 마치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처럼 물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거기서 커다란 잉어를 잡았죠.


세인이를 낳고 보니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어요. 출산한 지 100일도 안 돼서 미국 공연한 거요? 실은 세인이를 주신 그 분(하느님)에게 내 방식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거였어요. 미국에 사는 한인들을 위한 공연 부탁이 들어왔는데 ‘봉사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낳기 전에요? 아우, 걱정이 너무 많았어요. ‘(아버지가 흑인인) 내 외모를 너무 닮으면 어쩌나’ 싶어서요. ‘남편만 닮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남들은 손가락, 발가락이 온전히 달려서 나오기를 기도한다는데 저는 거기다 머리카락에, 피부색까지 걱정 거리가 너무 많았죠.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그래도 너무 불안했어요. ‘아이가 만약 나를 닮아 나오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버티고 살 것인가, 내가 겪은 걸 이 아이도 겪으면 어쩌나’ 싶어서요. 유치원 과정부터 외국인 학교(서울국제학교)에 보낸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혹시라도 자라면서 점점 내 외모를 닮으면 어떡해요. 외국인 학교라도 다니면 차별을 덜 당할 테니까 고심 끝에 그렇게 했죠. 엄마의 마음이란 그런 거더라고요. 세인이를 낳자마자 그래서 머리카락하고 피부색부터 살폈죠. 다행이었어요. 제 아빠를 닮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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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인순이씨가 어린 딸과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하고 찍은 사진. 김인순ㆍ박세인 제공

자랄 때 대체 제가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런 마음 고생까지 했냐고요? 내가 살던 동네에선 괜찮았어요. 그런데 거길 벗어나면 사람들의 눈빛부터 달라졌죠. 일단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에 바빴으니까요. “너는 고향이 어디냐” “아버지가 외국인이냐, 어머니가 외국인이냐”. 지금하고는 정말 다른 시대였다니까요. 그러니 어디 나가기가 싫더라고요. 극복했냐고요? 극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사는 거죠. 아니, ‘살아야겠다’도 아니었어요. ‘살아내는’ 거였죠, 도망가지 않고. 사는 일도 내겐 시험이었어요.


그러니 어릴 때 애늙은이였죠. 오히려 나이 들면서 철이 없어졌어요. 하하. 숨어 지내던 내가 아예 세상으로 나와서 무대에 서니까 외려 홀가분해지더라고요. ‘나는 이런 사람이야. 뭐 어때.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 무대 위에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다 하니까 날아갈 듯 편했어요. 지금도 신기해요. 어릴 때 그렇게 사람을 피해 다니기만 하던 내가 무대에선 어떻게 그렇게 뛰고 울고 웃는지.

◇딸이 자는 모습만 봐야 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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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씨는 “일하느라 딸이 어릴 때 많이 함께하지 못해, 나는 부족한 엄마였다”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세인이에게 지금도 너무나 미안한 게 있어요.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 곁에 제대로 있어주지 못해서. 1990년대 후반, 그때는 제가 진짜 너무 바빴거든요. 세인이를 서른일곱 살에 낳았으니 나이 마흔이 목전이었잖아요. KBS ‘열린음악회’로 인기를 얻으면서 나를 불러주는 데가 많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무대에 설 수 있을지 생각하면 불안했죠. 그때만 해도 연예인의 활동 수명이 길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는 친정에 시집까지 뒷바라지 해야 할 처지였고요. 입술이 부르터서 이만큼 부어올랐는데도 그 위에 빨간색 립스틱을 덧칠하고 무대에 섰죠.


그러니까 어린 세인이를 본 기억이라곤 대개 누워있는 모습뿐이에요. 저녁에 공연이나 행사가 많았으니 아이의 밤낮과 거꾸로 살았죠. 그게 안타까우면서도 ‘아니야, 내가 일을 해야 모두 살 수가 있잖아’하고 마음을 다잡았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시절로 가서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엄마랍시고 그렇게 제대로 신경 써주지도 못했는데 세인이는 알아서 잘 커줬죠. 사춘기 때 대판 싸운 거요? 하하. 기억이 나요. 나는 그때 갱년기였잖아. 해가 ‘쨍’하면 그래서 슬프고, 구름이 흘러가면 그래서 슬프고, 맛있으면 맛있어서, 맛없으면 맛이 없어서 슬프던 때죠.


그런데 모녀 지간이라고 해도 한번 싸워 보는 게 필요해요. 그래야 풀어지거든요. 그 전까지는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원하는 걸 말도 못하고 쌓아두고 있었는데 그렇게 한번 확 부딪히고 나니까 시원하더라고요. 함께한 시간이 워낙 없었으니 언제부터인가 할 얘기도 점점 없어졌거든요.


어느 주말에는 늦잠을 자는데 밖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세인이하고 세인이 아빠였어요.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하고서 저도 나가선 “왜, 무슨 일인데?” 했죠. 그런데 저한테 말해 주려면 몇 달 전 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 대화가 안 되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방 밖에서 얘깃소리가 들려도 나가지를 못했어요.


외로웠죠. 그 시절 나는 그저 뒷바라지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식구들을 지키려고) 늘 중무장을 하고 있는 상태랄까. 집은 싸우러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었죠. ‘아, 포근하다’ ‘기대고 싶다’ 하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는 듯해요. 느긋해진 지금이 오히려 좋죠.

◇내 엄마를 보내고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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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딸과 많이 안고, 볼도 비비고, 입맞춤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후회로 남은 게 있어서다. 이한호 기자

세인이가 그래요? 엄마가 힘든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맞아요. 내 엄마를 보면서 결심한 게 있거든요. ‘나는 딸 앞에서 절대 눈물 보이지 말아야지.’ 엄마가 혼자서 나를 키우셨잖아요. 용감하고 대찬 분이었죠. 그런데 가끔 나를 붙들고 절규하듯 울었어요. 그런 엄마를 안아주기라도 했냐고요? 아니요. 난 엄청 냉정한 딸이었어요. “엄마보다 내가 더 힘들어. 그러니까 누가 날 낳으랬어” 했죠. 진짜 나도 너무나 힘들었거든요. 엄마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싫더라고요.


그 엄마가 2005년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3, 4년 전쯤 엄마가 꿈에 나온 거예요. 지금도 생생해요. 엄마가 내 딸이 돼서 내가 안고 젖을 물렸어요. 엄마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고맙다. 나는 아직도 네 첫 걸음마, 처음 이유식 먹던 때, 웃음 소리까지 다 기억한단다”하는 거예요. 깨고 나서 하루 종일 울었어요. 내가 세인이의 모든 걸 기억하듯, 내 엄마도 그런 거죠. 엄마가 꿈에라도 내 딸로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가시고 나서 후회되는 게 있어요. 엄마 뺨을 따스하게 비벼본 적이 없는 거. 엄마한테 ‘예쁘다’ 소리도 못해봤고, 잘 안아주지도 못했어요. 그래서예요. 세인이한테 그렇게 “안아줘” “뽀뽀해줘” 하는 게요. 세인이가 혹시라도 나중에 후회할까 봐. 그래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세인이한테는 늘 웃으면서 “(콧소리로) 세인아, 공주야~”하는 거고요.

◇딸에게 ‘하지 마’ 소리는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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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딸을 낳고 나서 내 중심으로 돌던 우주가 딸 중심으로 바뀌었다”며 웃었다. 이한호 기자

세인이가 미국에서 (스탠퍼드) 대학 잘 다니다가 공황발작으로 갑작스럽게 한국에 왔을 때 왜 안 놀랐겠어요. 일부러 침착한 척했죠.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이가 다시 괜찮아지도록 이끌어야 하니까.


모든 엄마들이 그럴 거예요. 아이가 아픈 게 가장 힘들죠. 그때도 ‘내가 혹시 뭘 잘못했나. 누구한테 모질게 군 적이 있나. 그래서 아이가 아픈 건가’ 했어요. 내가 죽어서 아이가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걸 고민하겠어요? 석 달간 치료받고 쉬면서 괜찮아진 세인이를 다시 미국에 보낼 때도 웃으면서 인사했지만, 마음은 진짜 함께 가고 싶더라고요. 돌아서서는 펑펑 울면서 공항을 나왔죠.


양육의 원칙은 아이한테 “안 돼” “하지마” 소리는 하지 말자는 거였어요. 대신 “왜 하고 싶어?”라고 물었죠. 전 뭘 해 봐서 하는 실패는 최고의 공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만큼 좋은 인생 수업이 있나요? 무너져 본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법이죠.


세인이가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한국으로 와서 스타트업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도 그래서 그 선택을 존중했죠. 다만 속으로는 MS 같은 회사를 좀 더 경험해 보고 창업을 했으면 싶었지만요.

◇확성기 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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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딸이 미국 스탠퍼드대에 합격했을 때는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고 떠올렸다. 사진은 2016년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딸과 찍은 사진. 김인순ㆍ박세인 제공

세인이를 키우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요? 매 순간이었어요, 매 순간! 물론 제일 자랑스러웠던 때는 있죠. 스탠퍼드대에 합격했을 때요. 세인이가 또 학과 수석으로 졸업을 했잖아요. 그것뿐이에요? 전체 졸업생 중 상위 10%한테만 주는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 아이비리그 우등생클럽)’ 상도 탔다고요. 확성기를 들고 큰소리로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되레 조심해야 했어요. 괜히 내 딸이라서 오해 받고 욕 먹을까 봐.


세인이를 낳아서 나는 다른 세상을 알게 됐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하늘이 파랗구나’ ‘어머, 꽃이 이런 색이네’ 했죠. 아이한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봐야 했으니까. 그 전까지는 흑백의 세상을 살았던 거예요.


난 세인이랑 마주 앉아서 밥 먹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가끔 일하면서 먹는다고 쟁반에다 밥 챙겨선 제 방에 들어가서 먹을 때가 있거든요. 그럼 그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어요. 전화를 해도 밥 먹었는지는 꼭 물어보게 돼요.


이젠 딸이 내 언니 같아요. 참 든든해요. 내가 뭘 하려고 하면 미리 꼼꼼하게 따져서 알려주죠. 때론 내가 야단도 맞는다니까요. 하하.


세인이가 그저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재미있게 살길 바라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훗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하죠. 멀리서 보면 선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주 작은 점들의 연속이잖아요. 인생의 그런 작은 점들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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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수 인순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두고 ‘엄마 김인순’으로서 인터뷰한 건 처음”이라며 “진짜 나를 만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한호 기자

▶딸의 속마음은… ‘[인터뷰-엄마] 인순이의 딸 박세인 편’ 보기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