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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한류, 동네의 발견]① 서울 쌍문동

둘리·덕선·기훈은 왜 하필 쌍문동에 살았을까

by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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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서 1번(일남·오영수)과 456번(기훈·이정재)이 편의점 테이블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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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유학생 장취신(오른쪽)씨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 나왔던 편의점 밖 테이블에서 소주를 사 생라면을 쪼개 먹고 있다. 19일 쌍문동에서 만난 장씨는 '오징어 게임'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중국인 친구는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양승준 기자

"오징어 한 마리 주세요". 지난 19일 서울 쌍문동 백운시장 '팔도건어물' 사장 송점숙씨는 주문이 들어오자 부리나케 붉은색 물통에서 오징어를 꺼내 도마에 올려놓고 배를 갈랐다. 한국의 전통시장에서 오징어를 주문한 이는 중국인 장컹커씨. 서울 소재 대학원에서 유학 중이라는 그는 "지난주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을 봤다"며 "인터넷을 뒤져 이 생선가게를 찾아왔고, 구입한 오징어는 집에서 요리해 먹을 것"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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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상우(박해수) 어머니의 생선가게. 지난해 세 번에 걸쳐 계절마다 쌍문동 백운시장 내 '팔도건어물'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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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상우네 생선가게. 넷플릭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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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서 수억 원의 빚을 진 상우가 어머니를 몰래 지켜보는 모습. 넷플릭스 캡처

"일본인 노부부 '오겜' 보고 시장 와

"팔도건어물은 '오징어 게임'에서 상우(박해수)의 엄마가 일평생 생선을 토막 내 아들을 서울대까지 보낸 일터의 실제 촬영지다. 지난해 4월, 8월, 12월 세 번에 걸쳐 계절을 달리해 이곳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송씨는 "어제는 일본인 노부부가 촬영지가 궁금해 직접 일본에서 왔다고 하더라"며 "쌍문동에서 살았던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에서 '오징어 게임'을 보고 너무 흥분해 한국에 다시 와 가게를 찾아왔다"고 했다. 시장을 나와 덕성여대 기숙사 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면 '오징어 게임' 속 1번(일남·오영수)과 456번(기훈·이정재)이 함께 소주를 마셨던 편의점이 나온다. 이곳에선 마침 중국인 두 명이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 테이블에 앉아 생라면을 쪼개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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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은 골목이 실핏줄처럼 동네를 잇는다. 옛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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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 골목길. tvN 방송 캡처

"공터와 흙, 서울 변두리" '무궁화~'에 딱

서울 쌍문동이 넷플릭스 사상 최대 히트작 '오징어 게임'의 순례지로 요즘 북적이고 있다. 이 동네는 한국 대중문화 1번지로 통한다. 쌍문동은 '아기공룡 둘리'(1983)를 비롯해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 '응답하라 1988'(2015)을 거쳐 '오징어 게임'(2021) 등 TV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사랑받은 작품들의 주 무대였다. 지구로 내려온 둘리의 터전인 쌍문동에선 극중 덕선(혜리)과 정환(류준열)을 비롯해 기훈과 상우가 나고 자랐다. 40여 년 동안 쌍문동은 대중문화의 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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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서 기훈과 상우가 자판키 커피를 마시던 곳. 쌍문동 백운시장 맞은편 골목이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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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서 기훈과 상우가 자판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그 이유가 뭘까. 쌍문동은 ①계층 차가 크지 않은 서민 주거지로 ②골목길이 많고 ③오래된 주택과 다세대 빌라 등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런 지역적 특성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 이야기와 이웃 간의 정(情)을 소환해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한 콘텐츠에 좋은 밑거름이 된다. 넉넉하지 못해 결핍을 드러내면서도 빈부 격차가 크지 않아 따뜻함을 보여주고, 동네의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 크지 않아 현실과 작품 사이 이질감을 덜어 주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 나온 백운시장, 편의점 그리고 기훈과 상우가 만난 커피 자판기 주변 쌍문1동을 둘러보니, 우뚝 솟은 화려한 대형 아파트 단지보다 낮은 단독주택과 다세대주택이 비교적 많이 눈에 띄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골목은 이 일대를 실핏줄처럼 잇고 있다.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보전된 모습이었다.


남기법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계층 차가 큰 성북동과 달리 1980년대 쌍문동은 계층 차가 크지 않은 경제·문화적 동질적 집단이 몰려 사는 전형적 서민 주거지였다"며 "부모님한테 물려 받은 재산 없이 자수성가하는 이들과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이 많이 살았다"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쌍문동은 아파트단지가 많지 않고, 주택과 다세대빌라 등이 아직 많이 남아 추억을 끄집어내기 좋은 공간"이라며 "실제 오징어 게임과 '무궁화꽃이~' 같은 게임이 가능하려면 공터와 흙이 있어야 하고, 이런 상상력을 현실화하려면 서울이라고 하더라도 변두리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쌍문동이 그런 점에서 적합해 보여 자주 소환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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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의 골목길 모습. 전봇대가 곳곳에 설치돼 그 위론 검은색 전선이 하늘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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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공룡 둘리' 속 고길동 집. 서울 쌍문동 소재로 그려졌다. 둘리뮤지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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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 골목 주택 담벼락에 '아기공룡 둘리'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도봉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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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에 있는 둘리뮤지엄

덕선과 정환이 한 집에서 산 이유

대중문화의 기둥이 된 90년대 학번 창작자들은 황 감독처럼 '쌍문동은 서민적이고 정겨운 동네'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90학번인 황동혁 '오징어 게임' 감독은 "쌍문동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할머니가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나물을 팔았다"며 "기훈과 상우 그 가족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어릴 때 살아가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94학번인 신원호 '응답하라 1988' PD는 "쌍문동이라는 이름의 어감이 주는 투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좋았다"며 "평균적인 사람들이 사는 보통의 동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쌍문동을 드라마 주 공간으로 정했고, 이후 쌍문동에서 나고 자란 친한 지인들을 만나 들은 얘기를 드라마 제작에 참고했다"고 말했다. 신 PD가 '응답하라 1988' 제작에 도움을 받은 쌍문동 지인 중 한 명은 KBS '대화의 희열' 시리즈를 기획한 90학번 최재형 PD다. 다섯 살 때부터 서른여덟까지 33년을 쌍문동에서 산 최 PD는 "막 잘사는 집도 없지만 그렇다고 밥 굶는 집도 없었던 것 같다. 주거 형태 상당수가 주인집이 사는 1.5층이나 1층에 반지하 세입자가 있거나, 부엌 하나 방 한 칸 셋방으로 이뤄져 부모와 아이들이 벽 없이 엉켜 지냈던 기억이 있다"고 옛일을 들려줬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이와 덕선이네는 같은 집 1.5층과 반지하에 함께 산다. 최 PD는 "초등학교 때까지 근처에 농촌 마을도 있었다"며 "동네 주변에 논밭도 있고 개천도 있어 도심과 달리 확실히 시골의 정서가 두드러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쌍문동 하면 가장 떠오르는 이미지로 "골목과 전봇대"를 꼽으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하기 딱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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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들이 본 쌍문동. 그래픽=박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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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에 줄줄이 들어선 키가 낮은 연립주택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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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포스터

"묘한 정주의 공간... 시간 멈춘 듯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쌍문동이 있는 도봉구는 서울 외곽의 낙후된 지역이란 인식이 강했다. 도봉구에 따르면, 1960년 이전까지 쌍문동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과 상가가 줄줄이 들어섰다. 전태일 열사가 1960년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판잣집도 쌍문동(208번지)이었다. 도봉구가 서울의 행정구로 인정받은 것은 1973년. '아기공룡 둘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 만화의 배경인 쌍문동을 대부분 낯설어했다.


그런 쌍문동이 서울 주택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 도시 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게임 등을 앞두고 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판자촌이 들어선 중랑천 주변과 마들평야(현 노원구)는 당시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그 개발 과정에서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있던 쌍문동과 오른쪽에 있던 상계동(현 노원구)의 풍경은 극과 극 대비를 이룬다. 마들평야가 들어선 상계동에선 땅을 확 갈아엎고 대대적인 개발이 이뤄졌지만, 상대적으로 도심에 가까웠던 쌍문동은 달랐다. 기존에 조성돼 있던 주택가와 당시 새롭게 생긴 연립주택은 북한산과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도심 인근 주거지로서 비교적 만족스러운 공간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김재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은 논문 '1980년대 중반 서울 동북권 개발과 도봉구 생활환경의 변화'(2015)에서 쌍문동의 지역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 뒤 "덕선이네와 그 이웃들이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쌍문동에 살았던 이유는 어쩌면 개발 호재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추론한다. 인근 상계동과 달리 개발로 급변하지 않아 골목, 정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따뜻한 서민 동네의 정서를 여태 지닐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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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서울 쌍문동 일대를 다녔던 20번 버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빈번한 이주, 묘한 정주의 공간

현재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아기공룡 둘리' 김수정 작가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1975년에 상경해 쌍문동에 자취방을 마련했는데, 그때만 해도 쌍문동은 인근 지역 도봉, 방학동과 비교하면 번화가였다"며 "그래도 서울 속 작은 마을의 느낌이 컸고, 주인아주머니가 손수 빚어 준 큼직한 이북식 만두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며 웃었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상대적으로 빈번한 이주가 일상화된 시대에 쌍문동은 묘하게 정주의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며 "그런 면에서 사람들한테 시간이 멈춰져 있는 듯한 감각을 제공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쌍문(雙門)동은 '문이 두 개인 마을'이란 뜻이다.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살던 계성이란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살다 죽었는데, 그 효를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孝子門)을 두 개 세운 데서 동네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