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마당을 품은 집, 80년된 북촌 '살림 한옥'

[라이프]by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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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 부부의 딸이 마당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다. 건축주는 이 집으로 오고 나서 가족의 모습을 더 자주 바라보게 된다고 말했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서울 하늘 아래, '생활 한옥'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옥은 불편하다는 인식에 들어와 살겠다는 사람은 적고, 한옥마을은 주거지보다는 관광지의 성격이 짙어지면서 살던 사람도 떠나는 탓이다. 사람이 떠난 한옥은 카페, 식당 같은 상업 공간으로 속속 바뀌고 있다.


지난 4월, '동네 사람' 귀한 북촌 한옥마을에 반가운 살림집이 한 채 더 늘었다. 40대 동갑내기 부부와 초등학생 딸, 세 식구는 작은 한옥(대지면적 87.3㎡, 연면적 39.67 m²)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아파트가 답답해서 떠난다면 단독주택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집을 우리 가족만 누리는 게 아니라 한옥마을의 구성원이 돼서 이 경관을 유지하고 싶다(건축주)"는 생각에서 한옥 살기를 결정했다. 집 이름도 '주변을 아름답게 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주아재'라고 지었다.

안팎을, 경계를, 넘나드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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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오른쪽에 일자 형태로 위치한 별채. 주방과 화장실이 있고 천장에는 다락 공간이 숨어 있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주아재는 'ㄷ'자 한옥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ㄴ'자 안채가, 오른쪽에는 일자형 바깥채(별채)가 자리한다. 안채에는 방 1개, 거실(대청), 화장실이 별채에는 주방, 화장실, 다락이 있다. 'ㄷ'자 한옥이지만 옆집과 공유하는 담장, 경계담 덕에 사실상 'ㅁ'자 한옥의 형태를 띤다. 집과 담장이 마당을 가운데에 놓고 포근하게 감싸는 모양이다. 건축주가 "집이 아늑해서 좋았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내 공간이 12평인 좁은 집이지만, 답답함은 느낄 수 없다. 열린 공간인 3평(기단 포함 4평 반)짜리 마당이 있어서다. 한옥의 특징대로 실내의 모든 창은 마당을 향해 널찍하게 나 있다. 설계를 맡은 엄현정 선한공간연구소 소장은 "한옥의 매력 중 하나가 실내와 실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라며 "공간 확장성이 있어 한 사람은 마당에, 한 사람은 실내에 있어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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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왼쪽에 위치한 안채.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옆집과의 경계담이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건축주도 "집 안에서 자유롭게 안과 밖을 오가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안채와 별채를 오갈 때 반드시 외부 공간인 마당을 거치도록 둘을 분리했다. 고치기 전의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아파트 현관처럼 작은 실내 공간이 있었다. 이전 거주자가 신발을 신고 마당에 나가지 않더라도 안채에서 별채로, 별채에서 안채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개조한 것이었다. 엄 소장은 "건축주가 편의보다는 전통을 지키고 싶어 해서 한옥의 전통 방식대로 동선을 바꿨다"고 말했다.


대신 비를 맞지 않고도 양 건물을 오갈 수 있도록 처마 길이를 연장했다. 일명 '점오(0.5) 공간', '중간 공간'이다. 엄 소장은 "이 공간은 비를 안 맞고 양쪽으로 갈 수 있는 기능적 면도 있지만 작은 한옥의 비좁은 느낌을 해소해 줄 수 있는 확장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설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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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보이는 모습. 왼쪽이 안채, 오른쪽이 별채다. 기존에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또 다른 실내 공간인 현관(작은 사진)이 있어, 마당을 거치지 않고도 안채와 별채를 오갈 수 있었다. 김동규 사진작가·선한공간연구소 제공

가족은 직전까지 서울의 30평대 아파트에 살았다. 당장 실내 공간이 절반 넘게 줄어들게 되는데, 한옥 살기가 망설여지지는 않았을까. 아내(44)는 "아파트 생활하다 보면, 가장 큰 거실은 비워져 있거나 가장 볕이 좋은 베란다는 화분이 차지하고 있고, 어떤 공간은 옷을 입을 때만 들어가는 식으로 생각보다 안 쓰는 공간이 많더라"며 "우리는 이렇게 큰 집, 닫혀 있는 공간보다는 필요에 따라 변하는 열려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건축주는 이 집의 여러 공간이 정형화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일직선의 평지보다는 높낮이가 있는 골목길을 산책하기 즐기는 건축주의 성향과도 맞닿아 있다. 실제 아파트로 치면 '거실'인 안채의 대청은 서재도 됐다가 침실도 된다. 그는 "사람이 살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맞게 공간도 변화를 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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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 안에 위치한 부엌. 부엌 천장에는 다락이 숨겨져 있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수납 문제는 집 곳곳에 맞춤 가구를 제작해 해결했다. 특히 별채 천장을 잡아당기면 나오는 다락은 이 집만의 '특제' 수납 공간이다. 엄 소장은 "한옥에 부족한 수납 공간을 찾고 싶기도 했지만, 아파트에서 누릴 수 없는 재미난 공간을 아이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건축가로서의 마음도 있었다"며 "고양이 숨숨집처럼 아이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사람이 '차경(借景)'이 되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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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구조미가 가장 잘 나타나는 거실(대청)의 서까래.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한옥을 고치는 일은 일반 구옥보다 몇 배의 세심한 설계와 준비가 필요하다. 주아재는 지어진 지 80년 된 한옥이었다. 옛것을 살리면서도 생활이 편리하도록 고치는 게 필요했다. 우선 천장을 들어내고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노출된 서까래가 삼각형으로 모이는 지점이 한옥의 구조미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해서(엄현정)"다. 또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곳은 24㎜ 두께의 한식 시스템 창호를 사용해 한옥의 단점인 단열 기능을 보완하고자 했다.


서까래, 기와, 회미장, 툇마루, 기단과 같이 한옥만이 가진 건축적 요소에 어울리도록 바닥, 창호, 조명은 물론 맞춤 가구의 손잡이까지 하나하나 따져 배치했다. 노출된 서까래와 회미장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매립등(다운라이트)의 색과 조도까지 계산해 넣었다. 수납장은 한옥의 옛 기둥 색과 유사하게 제작하되, 서로 다른 무늬가 충돌하지 않도록 결이 없는 나왕 합판을 썼다. 건축가는 "새것이더라도 원래 있던 것 같은 익숙함을 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옥을 잘못 고치면 신구가 조화롭지 못하거나 왜색이 짙어질 수 있다"며 "특히 한옥을 모던하게 고칠 경우 전통 한옥이 아니라 일본식 가옥 요소가 나타날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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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의 방. 이 집에서 유일하게 문으로 분리되는 공간이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3개월 가까이 이어진 한옥 대수선은 다행히도 건축가와 건축주의 성향이 잘 맞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건축가는 "건축주 분 딸이 집을 고칠 때 집 앞의 가스 배관 가림막을 페인트칠했는데, 학교에서 집을 그리라고 했더니 가림막을 크게 그렸다고 하더라"며 "아이와 집 만드는 추억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굉장히 뿌듯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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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에서 내다본 마당의 모습.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선조들은 한옥에서 '경치를 빌려 즐긴다'는 뜻의 '차경(借景)'을 중요시했다. 이 집은 창으로 집 바깥의 풍경을 보는 대신, 마당으로 열려 있는 창을 통해 풍경을 즐긴다. 그래서 이 집의 차경은 자주 사람이 된다. 아이가 마당에서 노는 모습이, 자전거를 타는 남편이 창이라는 액자에 담긴다. "공간을 비우고 사람을 채운 집"이라는 건축주의 말처럼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집"이다.


이 집도 또 다른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바란다. 아내는 "한옥은 모여 있을 때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이 집에 살면서 한옥이라는 전통을 유지해 나가고 과거와 현대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중간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2021.11.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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