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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손가락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평생 감옥"...상실의 낙담을 용기로 바꿔주는 곳

by한국일보

<90> 서울 원남동 대한의수족연구소

1979년 문을 열어 한자리에서 43년째

2대에 걸쳐 의료 보장구 만드는 부자

점포 찾은 손님에게 먼저 사연 묻지 않아

2020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

"저 다시 걸을 수 있을까요."


휠체어를 탄 A씨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의수족연구소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택배기사였던 A씨는 교통사고로 두 다리의 무릎 아래를 잃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일주일도 안 됐지만 A씨는 수소문 끝에 연구소를 찾았다. 택배차 할부금에 가족 생계까지 생각하면 단 하루도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A씨 사연을 들은 대한의수족연구소 창업자인 이승호씨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우레탄 소재 의족을 추천했다. 많이 걸어야 하는 A씨의 경우에는 안정성이 높고 피로가 덜한 카본 소재가 맞지만,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이씨는 의족과 절단 부위가 닿는 '소켓' 제작에 공을 들였다. 근육보다 살이 많은 사람은 아침저녁 부기가 많이 오르기 때문에 조금 헐겁게 해야 하는데 A씨는 직업 특성상 다리 근육이 많은 편이었다. 완성된 의족을 착용하고 사고 이후 처음으로 휠체어에서 내려 발을 내딛게 된 A씨는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며 만족해했다.


43년째 의수족 제작 '외길'을 걸어온 이씨는 "절단 장애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연구소를 찾는다"면서 "하지만 이들이 못하는 것은 없다. 의수족을 찬 손님들이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43년째 한자리에서 다양한 사연 손님들 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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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오른쪽) 대한의수족연구소장과 아들 이승민씨가 25일 서울 종로구 대한의수족연구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종로구 원남동사거리에서 종묘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 골목 입구에 대한의수족연구소라는 파란색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25일 진열장 옆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씨와 염료가 묻은 작업복 차림의 아들 승민씨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이씨가 1979년 처음 문을 열 때 서울대병원이 인접한 원남동 거리는 의수족 제작 업소들이 몰려 있었다. 서울대병원을 찾았던 사고 환자들이 많이 찾았기 때문이다. 과거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당시 총상을 입은 사람들과 산업화 시대 안전시설이 미비한 공장에서 일을 하다 다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거리에는 이씨 점포 외에 1곳 정도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이씨가 고향인 경남 사천에서 처음 서울에 올라와 한 일이 의수족 제작이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의수족 제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했다. "해도 왜 이런 일을 하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볼 때마다 조금만 더 해보자는 생각이 벌써 5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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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대한의수족연구소에서 만든 의수족들. 최주연 기자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우물만 파 온 이씨는 "누군가에게 '손가락 한 마디'가 평생 감옥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0대 여성 사연을 소개했다. 왼쪽 약지 손가락 끝 한 마디를 잃은 40대 여성이 이씨를 처음 찾아와 "20여 년간 주머니 속에 손을 감추고 살아왔다"고 했다. 한창 젊은 패기로 가슴을 펴고 살아야 할 시기에 움추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은 손가락 의수를 착용한 후 "이제 밖에 나갈 수 있겠네요"라고 했다고 한다. 수십 년 전 기억이고 이제 그 여성도 환갑을 바라볼 나이가 됐지만, 이씨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하루는 한쪽 팔에 장애를 가진 중년 여성이 아들 결혼을 앞두고 이씨를 찾았다. 그는 "내 모습을 보고 아들이 창피해할까봐 결혼식을 못 가겠다"면서 "의수를 제작하면 얼마나 드느냐"고 상담을 요청했다. 가격을 듣고 "안 되겠네요" 하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서 이씨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씨가 어린 나이에 홀로 상경해서 서러운 더부살이를 견딘 것도 고향에서 고생하실 어머니가 진 삶의 무게를 덜어드리기 위한 탓이 컸다. 그는 중년 여성에게 "아들 결혼 선물로 해주겠다. 잘 사시라"며 무료로 의수를 만들어 줬다. 이렇게 이씨가 저소득층을 위해 제작한 의수족만 9,000개에 이른다. 무료 제작 계기가 된 중년 여성은 최근까지도 보답의 표시로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깨를 보내왔다.

의수족 제작 모두 '수작업'...착용했을 때 아프면 무용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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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씨가 서울 종로구 대한의수족연구소 작업실 안에서 의수족 제작 과정을 기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최주연 기자

상담 공간 옆 문을 밀고 들어서면 20평 남짓한 제작 공간이 있다. 작업대 위에는 사람 다리 모양의 석고 틀과 피부색을 내는 폼커버 등이 놓여 있다. 미싱과 절삭기 등을 제외하면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진다는 게 이씨 설명이다. 부위별로 세부 과정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본 뜨기→환부 확인→틀 만들기→가봉→폼커버 씌우기순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의족 제작 과정이 가장 까다롭다. 접촉하는 환부가 체중을 버텨내면서도 통증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다. 실제 이날 의족을 맞추러 온 손님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의족 소켓이 너무 헐거워 쓸리고 긁혀 짓무른 상처 자국이 보였다. 이씨는 본을 뜬 후 환부를 손으로 꼼꼼히 눌러 가며 특별히 아픈 부위를 확인했다. 이씨는 "아픈 부위는 느슨하게, 덜 아픈 부분은 좀 더 조이게 만들어 힘을 받게 한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뼈가 가까운 곳이 더 아프지만, 신경 마감과 상처 부위 봉합 등에 따라 사람마다 아픈 곳이 모두 다르다고 귀띔했다. 매장에서 신어 본 뒤 귀가시키는 다른 매장과 달리 이씨는 최종 마감 직전 단계인 가봉 작업에만 길게는 일주일까지 공을 들인다. 실제 착용 과정에서 아프지 않은지 일상생활을 해본 뒤 최종 마감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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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수족연구소 위치.

이씨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어떻게 다쳤느냐"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는다. 처음 이곳을 찾은 손님들의 첫 마디는 대부분 "제가 의수족을 하면 ㅇㅇ를 할 수 있을까요"다. 그제서야 이씨는 손님 동의를 받고 촬영해둔 영상과 사진을 보여준다. "이분은 지금 골프도 치시고, 저분은 지금 등산도 다니신다"는 얘기를 하면 손님들의 눈빛도 다시 빛이 난다.


하지만 의수족을 끼고 불편함 없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의수족을 차지 않은 반대편 팔이나 다리 근육 강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적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팔을 잃은 경우 반대편 어깨가 한쪽으로 올라간다. 이씨는 "무릎 위 의족은 '걷는다'보다는 허벅지를 '멀리 찬다'는 느낌으로 연습을 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월세 건물이지만 자리 지키고 싶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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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씨 아들 승민씨가 서울 종로구 대한의수족연구소 작업실에서 의족 작업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최주연 기자

이씨가 40년 넘게 이어 오던 일은 이제 아들 승민씨가 대를 잇고 있다. 승민씨 원래 전공은 음악이다. 음대를 졸업하고 작곡가의 길을 가던 승민씨에게 일을 권유한 사람은 아버지 이씨다. 2005년부터 가업을 잇기 시작한 승민씨는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30세이던 2011년 늦깎이 학생으로 의료보장구학과에 진학했고, 의지보조기 기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진로를 바꾼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망설였지만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나"라는 이씨 설득에 승민씨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어릴 때부터 부친을 찾아왔던 손님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오랜 전통을 잇고 있는 대한의수족연구소는 지난 2020년 서울시가 선정하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씨 부자는 4년 전 바뀐 건물주가 올해 말 계약을 해지할 가능성이 있어 걱정이다.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들의 격려에 힘을 얻는다. '저보다 꼭 오래 사셔야 한다'는 손님들의 안부 전화도 종종 걸려 온다. 이씨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까지 된 만큼 찾아올 손님들을 위해 이 자리에서 계속 일을 이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다라 기자 dar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