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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68>축구 국제심판 오현정

"선수만 월드컵 뛰란 법 있나요" 국제심판 된 '축구 유망주'

by한국일보

“항의에, 시비에… 심판은 욕먹는 일

심판으로 월드컵 무대 서는 게 꿈”

‘골때녀’서 주심으로 활약, 얼굴 알려

한국일보

오현정 축구 국제심판을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그에게 레드카드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실제 경기 땐, ‘엄근진’ 모드다. 한지은 인턴기자

남자아이들로 바글거리는 운동장. 그는 그곳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는 유일한 소녀였다. 남자 친구들을 하나, 둘씩 제치고 넣는 골맛을 그때 알았다. 축구부 코치의 눈에 든 건 당연한 일. 유일한 여자 멤버로 초등학교 축구부 단복을 입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걸 입을 수 있는 여자애는 나뿐이잖아.’


‘축구 꿈나무’ 오현정(33)의 시작이었다. 마침 지역사회에서 여자축구를 키워보려는 노력과 맞물려 그도 쑥쑥 커나갔다. 그가 다닌 전주 삼천남초등학교에 이어, 삼례여중에도 처음 여자축구부가 만들어졌다. 그는 바닥이던 신생 팀의 수준을 창단 2년 만에 상위권으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2002년 대구광역시장기 전국초중남녀축구대회 8강전에서 2대 0으로 상대 팀을 누르고 4강에 진출한 것이다. 두 골 중 하나가 그의 것이었다. 김수철 축구부 감독은 당시 언론에 “아직 2학년인 오현정은 장래 한국 여자축구계 대들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말했다.


이상한 일. 김 감독은 종종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정아, 나중에 꼭 국제심판을 해라.” 오로지 여자 월드컵 출전이 꿈이었던 그의 귀에 이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심판요? 절대 안 할 거예요!”


인생은 장담하면 안 된다. 그로부터 10년 뒤 진짜로 축구 국제심판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나. 심지어 우리나라에 여자 국제심판(주심)은 4명뿐이다. 2015년 처음 국제심판으로 선발돼 휘장을 달던 날 김 감독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2014년 11월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은사가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뿌듯해했을까.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걸까요?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해요.”


그를 만나기 전 축구 심판은 그라운드 밖에서 우아하게 경기 흐름을 보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선수만큼이나 바삐 필드를 누벼야 하는 사람이었다. 선수는 교체라도 있지, 주심은 풀 타임에 연장전까지 뛰어야 한다. 선수들처럼 체력훈련이 중요한 이유다. 국제심판들의 훈련은 스마트워치와 GPS 기기를 통해 국제축구연맹(FIFA)에 전송된다.


인터뷰를 했던 날도 그는 오전 훈련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 다부진 몸이 선수 못지않아 보였다. 그는 올해 초부터 SBS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주심을 맡고 있어 대중에 친숙해졌다. 선수로 월드컵에 출전하진 못했지만, 심판으로 월드컵 무대에 서겠다는 새 꿈을 키우고 있는 그를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나는 축구 아니면 못 살아

한국일보

점심시간에 놀이 삼아 남자애들과 했던 축구가 인생을 바꿔놓았다. 오현정 심판은 고등학교까지 ‘에이스’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한지은 인턴기자

-원래 축구선수였죠.


“맞아요. 어릴 땐 남자애들과 함께 축구부를 했어요. 점심시간에 다른 여자애들은 공기놀이 하는데 저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놀았죠. 한번은 축구부 코치 선생님이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한번 축구 해볼래’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때는 마음은 하고 싶으면서도 안 하겠다고 했죠. 축구부엔 남자애들뿐이니까.”


-그러다 결국 하게 됐군요.


“원래 육상을 했어요. 800m를 했는데 전북에서 1, 2위를 할 정도로 잘했죠. 그러다가 축구부 코치님이 점심시간마다 저한테 와서 축구하자고 하신 거예요. 결국 5학년 때 들어갔죠. 단복을 받아 입은 날 그렇게 좋더라고요. ‘축구부’ 하면 선망의 대상처럼 여겨졌거든요. 여자는 저뿐이기도 했고요.”


그때만 해도 전주 삼천남초엔 남자축구부만 있었다. 이후 여자축구부가 창단됐고, 그는 양쪽 축구부를 병행하며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나요.


“아빠는 운동을 아주 좋아하셔서 축구가 좋으면 한번 해보라고 하셨는데, 엄마는 ‘여자가 무슨 축구?’ 이런 반응이셨죠. 하하. 그러다가 결국 그냥 내버려두시더라고요.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때 제가 엄마한테 그랬대요. ‘나는 축구 아니면 못 살아’라고.”


-축구가 왜 좋았어요.


“남자애들을 제치면서 드리블해 나가는 게 뿌듯하고 성취감도 있었어요. 저를 두고 남자애들끼리 ‘야, 너는 여자애한테도 제쳐지냐, 너는 여자애한테도 골을 먹냐’ ‘그럼 네가 한번 해봐라’ 이런 말을 주고받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죠. 그때만 해도 축구는 남자들이 하는 운동으로 여겨졌는데, 그걸 내가 더 잘했으니까요. ‘내가 여자지만, 남자애들보다 더 잘할 수 있구나’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게 축구구나’ 생각했죠.”


-진학도 축구를 중심으로 생각했겠네요.


“맞아요. 초등학교 때 축구를 잘했으니 중학교도 축구로 유명한 학교를 가고 싶었죠. 그래서 경기도에 있는 학교에 가기로 미리 얘기가 된 상태였어요. 그런데 전북축구협회도 여자축구를 육성하려고 한창 노력하던 때라 전주 인근인 완주군 삼례여중에 축구부가 만들어졌죠. 삼례여중에서는 제가 오기를 바랐고요. 그래서 고민 끝에 그 학교로 진학했어요.”


삼례여중 축구부의 7전8기 스토리는 영화 ‘슈팅걸스’로 만들어져 지난해 개봉됐다. 0대 6으로 패할 만큼 약체였지만, 2009년 여왕기 전국여자축구대회에서 창단 9년 만에 우승컵을 거머쥔 성장기로 유명한 학교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에 삼례여중 축구부 출신인 그도 심판으로 출연했다.


-삼례여중 축구부가 신생 팀이라 꺼려지기도 했겠어요.


“제가 진학했을 때가 창단 2년 차쯤 됐을 때예요. 그래도 제 동기들은 나름대로 초등학교 때 축구부에서 활동하던 친구들이었지만, 윗학년 언니들은 중학교에 올라와서 축구를 배운 거였죠. 처음에는 실력 차이가 많이 나니까 답답했어요. 그래서 (김수철) 감독님한테도 떼를 많이 썼죠.”


-왜요.


“저는 기본기를 다 배우고 왔는데 중학교에 와서 그걸 다시 해야 했으니까요. 감독님이 기본기를 아주 중시했거든요. 기본기란 건 운동 시작할 때 한 번 배우면 끝인 줄 알았죠. 하하. 선수 생활하는 내내 계속 다져야 하는 게 기본기이고, 기본기가 탄탄해야 다른 기술의 흡수나 응용이 빠른 건데 그땐 몰랐던 거예요.”


-초반엔 어쩔 수 없이 지는 경험을 많이 했겠네요.


“그게 너무 힘들었죠. 물론 점점 실력이 나아졌어요. 예를 들어, 1학년 때 경기 10번 중 8번을 졌다면, 2학년 때는 6번으로, 3학년 때는 4번으로 줄어드는 식으로 팀이 성장했죠.”


-첫 승은 언제였나요.


“창단하고 만 1년쯤 됐을 때예요. 상대팀도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팀이라 감독님도 해볼 만하다고 판단하셨죠. 그 경기에서 제가 골을 넣어서 1승을 거뒀어요. 첫 승리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감독의 한마디 ‘심판이 돼라’

한국일보

그는 축구가 좋아 선수를 했고, 역시 축구가 좋아 심판을 하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중학교 다닐 때부터 축구 에이스였는데 심판이 된 거네요.


“이상하게 중학교 때 김수철 감독님이 ‘현정아, 너는 나중에 은퇴하면 꼭 국제심판이 돼라’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이유를 몰랐죠. 제가 주장인데다 공격수였거든요. 팀에 따라 저한테 수비수 두 명을 붙이기도 했어요. 그러니 심판에게 ‘이거 파울 아니냐’고 항의를 많이 했었죠. 그러다 보니 심판될 생각을 하기는커녕 심판에게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하하.”


-감독님은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요.


“저도 신기해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건지, 저를 가장 잘 아는 분이니 제 성향을 파악하고 하신 말씀이신 건지. 감독님이 심판 출신이긴 하거든요. 생각해보면, 처음에 감독님이 축구부원들에게 1조부터 17조까지 축구 경기규칙부터 숙지시켰거든요. 선수가 공을 차려면 규칙을 알고 차야 한다면서요.”


-국제심판이 된 걸 보시고 감독님이 뿌듯하셨겠어요.


“그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삼례여중 축구부 스토리로 만든 영화가 ‘슈팅걸스’인데, 촬영 준비를 꽤 오래했어요. 그 기간에 감독님이 배우들 동계훈련을 함께했거든요. 저도 참여했고요. 어느 날 저녁 훈련이 끝나고 감독님과 다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날따라 감독님이 ‘오늘 입맛이 좋다’면서 맛있게 두 그릇을 드셨어요. 그리고 댁으로 돌아가셨는데 다음 날 오전 훈련에 안 오시는 거예요. 주무시다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너무 놀랐겠어요. 어떻게 보면 인생의 방향을 정해준 은사인데.


“맞아요. 그 전에도 한번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으셔서 그 이후엔 관리를 잘하며 지내셨는데…”


김 감독이 ‘심판이 돼라’고 했지만, 한동안 그는 선수로 지냈다. 고교 진학도 마침 생긴 전북 지역 신생 팀이 아닌 축구로 유명한 경기 이천의 장호원고를 택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인생의 갈림길이 고교 시절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부상 때문이다.


-어쩌다 다친 건가요.


“고2 때 동계훈련을 하다 오른쪽 무릎 부상을 당했어요. 웬만하면 수술을 하지 않으려고 재활요법을 택했죠. 6개월 동안 정말 힘들게 재활훈련을 했어요. 그런데 마음이 조급했나 봐요. 복귀 후 차근차근 훈련 강도를 높였어야 했는데 다른 선수들과 같은 강도로 한 거죠. 열심히 몸을 만들어왔으니 뒤처지지 않도록 더 하고 싶었던 거예요. 두 달 만에 무릎이 다시 아프더라고요. 진짜 회의가 들었어요. 정말 죽기 살기로 재활을 했는데, 이걸 다시 한다고? 그럴 자신이 없더라고요. 재활이 진짜 힘들었거든요. ‘운동이란 건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죠. 그 전까진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없어서 몰랐던 거예요. 그때 저한텐 회복 탄력성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감독님과 부모님한테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다들 너무 힘드니까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셨을 텐데, 저는 진짜 마음먹은 거였거든요.”

축구가 사라진 자리

한국일보

오현정 심판은 때로 경기장 밖에서도 심판의 습성이 나온다고 했다.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는 버릇이다. 한지은 기자

그걸 끝으로 오현정 심판은 선수 생활을 접었다.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 등하굣길도 일부러 운동장이 안 보이는 후문으로 다녔다. 진로도 수정해 원광대 사회체육학과에 들어갔다. 재학 중 사회체육학과 학생이면 따두는 자격증 중 하나인 심판 자격증을 취득한 게 새로운 길을 열었다.


-심판 될 생각을 하고 딴 게 아니고요?


“사회체육학과 학생들이 흔히 따는 여러 자격증 중 하나일 뿐이었죠. 그냥 이력서의 ‘스펙’ 한 줄로 여기고 딴 거예요. 그런데 심판 자격을 얻으면 해당 지역 축구협회로 이름이 올라가더라고요. 심판 명단에서 제 이름을 본 전북축구협회 이사 한 분이 경기에 심판으로 보내려고 연락을 하신 거예요. 처음엔 ‘심판이 될 생각도 없고 심판 볼 줄도 모른다’면서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여름방학이니 아르바이트하면 좋잖아. 화랑대기 전국유소년축구대회에 배정할 테니 한번 다녀와 봐’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어차피 방학 때 아르바이트는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간 게 시작이에요.”


-실제 심판을 보니 어땠나요.


“해볼 만하더라고요. 신선한 자극이었죠. 축구선수와는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선수를 하면서도 몰랐던 규칙을 알게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재미 삼아 알바로 계속 해볼까’ 싶었죠. 그 뒤로는 주중에는 학교에 다니고, 주말엔 주말리그 대회 심판을 보러 나갔죠.”


가랑비에 옷 젖듯, 그의 인생에 축구 심판이라는 업이 스미기 시작했다.


-국제심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언제예요.


“베트남에서 열린 ‘U-14 국제축구페스티벌’에 심판으로 참여한 적이 있어요. 전북축구협회에서 대한축구협회에 저를 심판으로 추천한 거였죠. 그때 전 부사관이나 학사장교로 여군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대회가 시험 시기와 맞물려서 고민을 하다가 베트남에 가겠다고 했죠. 가보니 신세계였어요.”


-어땠는데요.


“아마추어 심판이긴 하지만, 국제대회니까 선수들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간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마음가짐이 남달랐죠. 또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어요. 훈련도 충실히 따랐고요.”


-심판도 평가를 받고 훈련을 해요?


“그럼요. 선수보다 더 많이 뛰는 게 심판이에요. 왜냐하면 선수는 자기 포지션대로 움직이고 역할을 하면 되지만, 심판은 늘 공 가까이에 있어야 하거든요. 공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판정에 신뢰도 떨어져요. 베트남에서 열린 ‘U-14 국제축구페스티벌’에 갔을 때 심판 강사나, 아시아축구연맹(AFC) 심판부장이 저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그다음 해 AFC 퓨처 레프리 코스에 참여할 수 있었거든요. AFC가 국제심판을 양성하려고 각 나라 심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과정이죠. 그러니 ‘U-14 국제축구페스티벌’에 갔던 게 국제심판을 꿈꾸게 된 발판이에요.”


-그때부터 국제심판 준비를 한 거군요.


“네. ‘심판이 됐으면 국제심판은 해봐야지, 여자 월드컵엔 다녀와야지’ 생각하게 됐죠. 그러려면 심판을 본업으로 삼아야 했어요. 아마추어 심판은 부업으로도 할 수 있지만, 국제심판은 그렇지 않거든요.”


-선수가 아니라 심판으로 월드컵 무대를 뛰어보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거군요.


“저는 좋은 선수였지만 선수로서는 실패했어요. 너무 집착하고 몰두하면 시련이 닥쳤을 때 억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미련 없이 놓아버리게 되는 거죠. 심판은 욕심부리지 않고 한번 꾸준히 해보자 싶었어요.”

심판 중의 심판

한국일보

경기장 안에서 심판은 공의 흐름을 따라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 사진은 오현정 심판이 처음 국제심판으로 참여한 대회인 ‘2015 AFF 여자 챔피언십’ 미얀마-베트남 전. 노란색 심판복을 입은 이가 그다. 오현정 제공

-심판도 여러 종류가 있더라고요.


“맞아요. 5~1급까지 있죠. 자격이 갖춰지면 승급 시험을 볼 수 있고 통과하면 급수가 올라가요. 급수에 따라 심판을 볼 수 있는 대회의 수준이 달라지고요. 예를 들어, 3급 심판은 전문축구 중등부 경기 주ㆍ부심, 고등부 부심, 2급은 고등부 경기 주ㆍ부심, 대학부 부심, 1급은 대학부ㆍ일반부 주ㆍ부심을 볼 수 있죠. 여자심판도 (남자 체력 테스트를 통과할 경우) 남자리그 심판을 할 수 있는데 저는 현재는 K4(성인리그) 소속이에요. WK리그(여자실업축구)는 당연히 하고 있고요.”


-그럼 국제심판은 그 심판들 중에서 나라마다 선발하는 건가요.


“네, 많은 심판이 선망하는 자리죠. 게다가 보수도 차이가 나요. 남자의 경우엔, 프로 심판만 돼도 리그가 올라갈수록 보수가 많아지거든요. 그런데 WK리그는 관중도 많지 않을뿐더러 유료가 아니니까 보수가 아주 적죠. 국제심판은 FIFA 소속으로 보수에도 성별 차이가 없어요. 국위를 선양한다는 의미도 있고요.”


-K리그와 WK리그 심판 보수에 차이가 큰가요?


“K1과 비교하면 약 10배 정도 차이가 나죠.”

심판도 경쟁한다

한국일보

오현정 심판에게 휘슬을 불 때 상황을 재연해 달라고 부탁했다. 휘슬은 때론 경기의 판도를 바꿔 놓는다. 한지은 인턴기자

-국제심판은 어떻게 될 수 있나요.


“체력, 영어 인터뷰, 영상분석 같은 테스트 항목이 있어요. 제가 가장 많이 준비한 건 영어였어요. 체력테스트는 축구선수 출신이니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요. 대한축구협회에서 국제심판 모집 공고를 띄우면 응할 수 있어요. FIFA가 대한축구협회에 할당한 인원만큼 선발하고, 추천을 올리면 FIFA에서 최종 승인하죠.”


현재 대한축구협회 소속 여자 국제심판 중 주심은 그를 비롯해 4명이다.


-2015년에 국제심판이 됐죠. 어땠나요.


“국제심판 휘장 수여식에서 휘장을 다는 순간, 내가 하려는 걸 이뤘구나 싶었죠.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시작이더라고요. 새로운 출발이었어요. 하하.”


-어떤 의미예요.


“심판도 매 대회 FIFA의 평가를 받거든요. FIFA에서 이론 강사, 실기 강사를 파견해서 심판들을 평가하죠. 피지컬 트레이너나 마사지 트레이너도 오고요. 같은 국제심판이라 하더라도 순위가 있는 것 같아요. FIFA가 공개하지는 않지만.”


-국제심판의 훈련은 어떤가요.


“FIFA가 훈련 종류를 프로그래밍해서 줘요. 그걸로 훈련 스케줄을 짜죠. 훈련할 때마다 스마트워치와 GPS로 기록이 돼요. 혹시라도 기기가 충전이 안 돼서 기록을 못 하면 그날은 훈련을 안 한 게 돼요. 훈련 기록을 보고 FIFA가 한 달에 한 번씩 피드백을 줘요. ‘고강도 훈련을 더 해라’ ‘다양성이 부족하다’ 이런 식으로요. 저도 주 6일 훈련을 해요. 그 외에도 세미나를 열어서 심판들을 평가하기도 하죠.”


-월드컵 주심은 어떻게 선발되나요.


“월드컵이 끝나면 그다음 해부터 선발이 시작돼요. 다음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해마다 테스트로 후보들을 추려서 좁혀나가는 거죠. 저도 2016년 처음 후보로 올라가서 ‘2017 U-17 여자 월드컵’에 다녀왔어요. 그러다 마지막 해인 2018년에 떨어졌죠. 그때는 건강에 문제가 있었거든요. 너무 허무하고 힘들었죠. 지금 다시 ‘2023 호주ㆍ뉴질랜드 여자 월드컵’ 주심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국제심판 휘장을 단 게 끝이 아니라는 거였군요.


“맞아요. 국제심판이 된 뒤 일단 AFC에서 인정을 받아야 해요. AFC가 월드컵 심판 아시아권 후보를 뽑아서 FIFA로 보내거든요. 그러니 매 대회, 매 훈련이 평가받는 과정이죠.”


-게다가 경쟁체제네요.


“그래서 승부욕이 생겨요. 승부욕이 있어야 훈련도 견디고요.”

흔들리면 안 된다

한국일보

그는 자신이 심판을 보는 경기에 부모님을 초청한 적이 없다고 했다. 혹시라도 항의받는 모습을 보면 놀라실 것 같아서다. 치열한 경기일수록 심판의 자리는 외롭다. 한지은 인턴기자

-국제심판이 받는 예우도 있겠죠?


“일단 FIFA 주관 대회에 가면 항공편은 비즈니스 좌석이 배정돼요. 현지에 도착하면 호텔까지 에스코트해주고요. 유니폼, 가방, 신발, 양말 같은 30여 가지 물품도 제공돼요. 오로지 경기 심판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거죠.”


-심판 볼 때 항의를 거세게 받기도 하잖아요.


“처음 국제심판으로서 간 게 미얀마에서 열린 ‘2015 AFF 여자 챔피언십’이었어요. 상대 팀이 베트남이었는데 풀 관중 경기였죠. ‘아, 좋다. 집중해서 잘 보자’ 하고 심판을 봤는데, 양팀 실력이 비슷해 경기가 아주 치열했죠. 그런데 경기 막판 2대 2인 상황에서 미얀마 수비수가 태클을 한 거예요. 파울이었죠. 제가 베트남에 페널티킥(PK) 선언을 하니까 관중에서 슬리퍼가 날아오면서 난리가 났죠. 경기를 잠시 중단해야 할 정도였어요. 미얀마팀 코치가 마이크를 잡고 관중석에 자제를 부탁하고 나서야 재개됐죠. 결국 페널티킥이 들어가서 베트남이 승리했어요.”


-그때 느낀 게 있나요.


“나는 제대로 봤다는 것이죠. 다시 분석했을 때도 파울이 명확했고요. 그럴 때 흔들려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가서 엄청 놀랐어요. 페이스북 메시지가 거의 1,000개 가까이 온 거예요. 항의 메시지였죠. 너무 무섭더라고요.”


-놀랐겠네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날은 혼자 자지도 못하고 다른 심판과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2, 3일 지나서 숙소였던 호텔 헬스장으로 운동을 하러 갔는데 미얀마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거예요. 공항에서도 사진 찍자고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고요. 결국 좋은 마음으로 돌아왔죠(미소).”


-치열한 경기일수록 심판 판정에 앙심을 품는 일이 많겠군요.


“맞아요. 그럴 때 털고 경기에 집중하려면 경험이 많아야 해요. 감독이나 선수들이 너무 거세게 항의하면 심판도 ‘내가 실수했나’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남은 경기도 망치게 돼요. 어쨌든 그 판정은 잊고 이후 경기에 몰두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 양팀의 줄다리기에 휘둘리게 돼요.”


-심판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서 안전하고 공정하게 경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연 같은 존재예요.”


-중요한 자질은 뭘까요.


“너무 많죠. 청렴성은 당연하고요. 일단 경기장 안에서 본인의 소신이 확고해야 하죠. 심판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이 많거든요. 관중의 야유나 지도자의 항의, 선수들의 시비 같은 것들. 그러니 내가 본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해요.”


-경험상 항의받았을 때 하는 적절한 대응법이 있나요.


“반응하지 않는 게 최고예요. ‘그만하라’는 의미로 양손을 드는 제스처를 하고, 어서 경기에 집중하라는 뜻을 전하죠. 대부분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선수들이 너무 흥분돼 있을 때는 미소로 가라앉히는 것도 방법이에요. 선수가 항의하려고 왔다가도 돌아가죠. 적절히 상황을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해요.”

여자심판들 그라운드 떠나는 이유

한국일보

축구 국제심판이라는 쉽지 않은 길을 택한 오현정 심판은, 이제 여자 월드컵 주심이라는 새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여자 심판들을 만나면 느끼는 동병상련도 있을 것 같아요.


“여자 리그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일단 수가 적어요. 그나마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 되면 조금씩 심판계를 떠나기 시작하고요. 보수가 적으니까요. 언제까지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이 일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런 걸 보면 참 마음이 아파요.”


-심판으로서 남은 목표는 역시 월드컵 주심인가요.


“네, 월드컵은 한번 뛰어보고 싶어요. 그래야 후배들도 그 꿈을 가지고 따라올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동기부여나 자극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라운드를 선수로 누빌 때와 심판으로 뛰는 지금 차이가 뭔가요.


“역할이 다를 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선수들도 축구가 좋아서 그라운드에 있는 거고, 저도 축구가 좋아 경기를 공정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심판으로서 그라운드에 있는 거니까. 다만, 심판은 경기 흐름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시야를 넓게 봐야 하죠. 이 선수가 롱킥을 할지, 숏패스를 할지 감을 잡고 있어야 공에서 멀어지지 않으니까.”


-심판의 보람은 뭔가요.


“경기가 끝난 뒤 양팀 감독들에게서 듣는 ‘수고했다’는 한마디요. 경기는 하고 나면 지는 팀, 이기는 팀이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심판은 어쨌든 본전이에요. 욕을 먹는 일이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면 모든 힘들었던 게 사라져요.”


-욕을 먹는데도 심판을 하는 이유는 뭔가요.


“저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심판이 좋아서 이 일을 하거든요. 축구장을 뛰는 게 좋아서, 선수들과 호흡하는 게 좋아서요. 선수는 아니지만 다른 역할로 내가 좋아하는 축구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해요.”


-심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나요.


“요즘 ‘심판을 하려고 축구를 했나 보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릴 때 내 목표는 국가대표로서 월드컵을 뛰는 거였지만, 선수가 아니면 어때요. 심판으로서 월드컵 경기 심판을 볼 수도 있잖아요. 또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경기를 월드컵에서 직접 관전하며 응원할 수도 있고요. 고등학교 때 다친 무릎을 결국 작년에 수술했거든요. 6개월 동안 재활훈련을 하다가 복귀해서 심판을 보니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건강하게 경기장을 뛴다는 것 자체로 정말 감사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어요.”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면서 심판의 역할을 새삼 알게 됐어요.


“맞아요. 일반 경기에서는 심판이 카메라에 잡히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저도 프로그램 취지가 좋아서 참여하게 됐어요. 여자축구가 정말 열악하거든요. 또 반응을 보니 여자심판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듯해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느낀 게 있나요.


“다들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엘리트 축구든 아마추어 축구든, 열정은 똑같다는 걸 느꼈죠. 축구가 남자들만의 운동이 아니라는 걸 알리는 데 저도 도움이 된 것 같아 좋아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선수를 할 때도, 심판을 하면서도 누군가가 만든 대로 가기보다 내가 원하는 길을 개척해 가길 바랐어요. 내가 간절히 원한다면 그 꿈을 그려서 가보자는 마음으로요.”


지금도 길을 만드는 중인 그는 내내 자신을 ‘조연’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틀렸다. 축구의 헌법을 수호하는 경기장의 판관이 어찌 조연일까. 심판 없는 경기에서 이긴들, 온전히 승리로 인정받지 못할 테다. 그의 말대로, 모두 축구를 사랑하는 열정 하나 붙들고 뛰는 사람들, 그라운드 위에선 주연만 있을 뿐이다.

한국일보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