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인 호날두 박병호의 이적과 '환승연애'

[이슈]by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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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서울 마포구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카메룬 국가대표팀의 경기에서 이강인 선수가 벤치에서 대기하고 있다. 뉴시스

최근 몇 년 사이 공중파, 케이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 가리지 않고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범람했다. 화면 속 그들의 긴장감은 시청자의 사라졌던 연애 세포를 깨워주고, 남다른 외모와 직업의 출연자들은 보는 재미를 더해주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피로감이 짙다는 평가다. 유행하는 것은 반복되기 마련이며 반복이 지나치다 보면 인기는 사그라드니까. 요즘 화제인 티빙의 '환승연애' 시즌2는 색다른 깊이감이 있다. ‘환승’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예전 연인이었던 사람과 새로운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저울질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반 서사는 아무래도 헤어진 연인과의 관계성에 집중한다. 그를 잊었는지 잊지 못했는지 잊었다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생겼는지 등이다. 그들이 그때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를 극복하고 지금 다시 재회할 수 있을는지 그 재회가 과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보다 괜찮을 것인지도 탐구 대상이다. 이러한 물음들이 난생처음 만난 사람과 같은 숙소에 머물며 인연을 찾는 여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환승연애'와의 차이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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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연인과 한 집에 살 수 있을까. 티빙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환승연애'의 차별점은 이 궁금증에서 시작된다. 사진은 시즌2 출연자들의 모습. 티빙 캡처

‘환승’에 대한 복잡한 마음은 스포츠팬이라면 생래적으로 알고 있다. 보통은 내가 응원하는 팀에 내가 사랑하는 선수가 생기기 마련이어서 어느덧 그 선수에 대한 사랑이 팀에 대한 충성과 애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팬의 사랑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측정 불가능한 것이지만 선수의 경력은 지극히 냉정하게 판단되고 기준은 대체로 정량적이다. 그리하여 팬의 사랑은 거의 바뀌지 않는데 선수의 경력은 필요에 따라 궤도를 달리할 수 있다. ‘환승’ 대신 ‘이적’을 택하는 것이다. 연애에 범박한 방식으로 빗대어 말하자면 그렇다. 팬은 이적해간 선수를 그리워할 수도 미워할 수도 깨끗이 잊을 수도 있다. 새로 이적해온 선수를 응원하며 떠나간 선수를 지워버릴 수도 있다. 가끔은 떠난 선수가 시간이 지나 팀에 복귀하는 수도 있지만 좋지 않은 방식으로 결별해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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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경기 수원시 장안구 KT위즈파크에서 열린 KBO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 4차전 키움 히어로즈와 KT 위즈의 경기에서 KT 박병호 선수가 친 타구를 바라보고 있다. 뉴스1

키움의 승리로 마무리된 2022 KBO 준플레이오프는 KT의 '국민 거포' 박병호와 그의 오랜 팬에게는 더욱 특별했을 것 같다. 이 지면에서는 모두 다루지 못할 키움이라는 팀의 복잡한 사정을 팬으로서 되도록 인내한다손 치더라도 지난 스토브리그에서 박병호를 보내는 방식에 동의하는 팬은 없었을 것이다. 만년 하위권이었던 팀에 트레이드돼 입단하자마자 홈런을 쏘아대던 그는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다시 돌아와서도 그 팀의 거포였다. 히어로즈의 영원한 4번 타자일 줄 알았던 그가 이제 다른 유니폼을 입고 타석에 서야만 하는 운명이다. 박병호는 키움의 홈인 고척 돔구장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그만의 장쾌한 스윙으로 홈런을 쏘아 올렸다. 담장 바깥으로 뻗어가는 타구를 바라보는 히어로즈 팬들의 표정에는 복잡한 슬픔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다. 마치 같은 테이블에서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표하는 'X'를 바라보며 속내를 감추는 얼굴에 비치는 미묘한 미소처럼 말이다.


최근 축구계에 가장 뜨거운 이슈는 스페인 라리가 마요르카에서 주전으로 활약 중인 이강인의 국가대표 발탁 및 출전 여부인 듯하다. 팬들이 이강인에게 갖는 애정(경기장에서의 연호로 감독에게 압박을 줄 정도인)은 그가 빅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이강인은 축구를 시작할 무렵 예능 프로그램으로 매주 축구 팬을 만났고, 일찍이 명문 발렌시아 기대주로 차곡차곡 성장했다. 2년이나 월반하여 출전한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대회 MVP를 수상했고 국가대표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소속팀 발렌시아에서의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강인은 출전 기회를 찾아 마요르카로 이적해야만 했고 지난해까지도 다소 고전했다. 그러나 올 시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강인은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성장한 모습을 보이며 공격 포인트를 적립하고 있고 드라마틱한 장면은 친정 팀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만들어졌다. 이강인이 특유의 개인기로 후반 결승골을 뽑아냈는데 자축 세리머니를 최대한 자제한 것이다. 대신 그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으는 것으로 감사함과 미안함이 섞인 제스처를 취했다. 이별의 과정이 어찌 됐든 자신의 성장을 도운 구단에 예의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발렌시아 팬에게는 흡사 ‘지금은 헤어졌지만, 너와 만나고 함께한 순간은 누구보다 행복했었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X처럼 보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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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오른쪽 가장 위)가 19일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퍼드에서 토트넘 홋스퍼와의 경기를 앞두고 동료들과 벤치에 앉아 있다. 이날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한 호날두는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경기장을 빠져나가 비난을 받고 있다. 맨체스터 AFP 연합뉴스

해외 축구에서의 화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행보가 아닐까 싶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마지막 전성기는 호날두의 젊은 시절과 겹친다. 고향인 포르투갈을 떠나 막 스무 살이 됐을 무렵 퍼거슨 감독에 의해 잉글랜드에 자리 잡은 호날두는 짧은 시행착오 뒤 화려한 플레이와 견고한 감각을 갖춘 공격수로 거듭난다(그 시절 박지성 덕분에 우리나라 축구 팬은 이 과정을 속속들이 내 일처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윽고 그는 거액의 이적료를 남긴 채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고, 유벤투스를 거쳐 발롱도르를 다섯 차례 수상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다. 이제 서른 중반 선수 시절의 황혼기를 앞두고 그의 선택은 첫사랑과의 재회였다. 퍼거슨의 시대 이후 부침을 겪던 팀에 그의 복귀는 그저 낭만의 현실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팀의 재건과 실적이 기대됨은 마땅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지난 시즌 호날두의 충분한 활약에도 맨유는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얻는 데 실패했다. 텐 하흐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올 시즌 호날두는 주전보다는 후보로 분류된다. 이에 항명이라도 하듯 그는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벤치를 벗어나는 기행을 보였지만 팀이나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는 모양새다. 힘들게 재회했지만 그때의 X는 지금의 X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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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울산 현대와 제주 유나이티드의 경기에서 구자철이 골을 넣고 팀 동료와 기뻐하고 있다. 뉴스1

K리그 시즌 최종전에서 제주는 포항에 2-1로 승리를 거둬 시즌 5위를 확정했다. 우승이 걸렸거나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이 걸렸거나 그도 아닌 승강의 기로에 섰거나 하는 경기가 아니었음에도 이 경기에 관심이 모인 이유는 1골 1도움을 올린 구자철의 활약 때문이다. 구자철은 독일 분데스리가 볼프스부르크로부터 시작한 오랜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떠날 때의 약속처럼 친정 제주의 주황색 유니폼을 입었다. 흔히 K리거가 해외로 떠날 때 팬들에게는 이 팀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굳게 약속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가 쉬운 환경은 아니다. 선수가 원하나 팀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는 더 많다. 합의서나 계약서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기성용도 서울로 컴백이 원활하지 않았고, 이청용은 서울이 아닌 울산으로 갔으며 백승호는 유스 시절 소속됐던 팀과 갈등 상황을 노출했다. 그러나 구자철은 달랐다. 그의 복귀 일성은 심지어 한라산에서 이뤄졌으며 합성이 아닌 진짜 백록담 사진에 제주 팬은 환호했다. 막상 시즌에서는 부상으로 활약이 어려웠지만 마지막 경기에서의 활약은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한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지만 다시 돌아온 X를 향한 사랑이 더욱 커져만 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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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경기 수원 장안구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2 수원 FC와 성남 FC의 경기가 끝난 뒤 수원FC 선수들이 상대팀을 보며 응원의 손뼉을 치고 있다. 뉴스1

나와 같은 과몰입형 인간에게 예능 프로그램과 스포츠 경기는 비슷한 부분이 참으로 많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예능, 특히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언젠가 끝이 난다. 생각보다 빠르게 끝나고 바르게 잊힌다. '환승연애'도 곧 끝이 날 모양이다. 화면으로 그들을 보며 울고 웃었던 시간도 다른 프로그램으로 덧씌워질 것이다. 말 그대로 환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는 다르다. 선수의 이적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며 그 선수를 사랑한 팬의 마음 또한 환승되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다. 가령 1980년대 최동원을 사랑했던 롯데 팬의 마음은 어디로도 갈아타지 못하고 이대호의 은퇴식에서까지 일렁거렸다. 성남FC를 사랑하는 팬의 마음은 그 팀이 K리그-2로 강등되더라도 그보다 더한 풍파를 겪더라도 환승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스포츠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내 삶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환승연애'가 끝나고 숱한 화제와 댓글과 유튜브 영상이 영영 사라지더라도 출연진에게는 버젓이 남아 있을 그들의 실제 삶처럼.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우리의 삶처럼 스포츠는 계속된다. 사랑을 연료로 하는 순환선이 되어.


서효인 시인 · 문학편집자

2022.11.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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