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면 문장이 떠오르고, 읽다보면 풍경이 펼쳐진다
관광공사 10월 가볼 만한 곳 ‘문학작품 속 장소를 찾아서’ 추천
일몰무렵 순천의 와온해변. |
경남 하동의 평사리 악양들판에 이르면 웬만한 사람은 박경리의 '토지'와 최참판댁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 문학의 커다란 발자취인 토지를 읽었거나,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소설 속 지명과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를 만큼 강렬하다. 전남 벌교에 가면 조정래 '태백산맥'속 인물들이 숨막히는 사건을 잇달아 겪으며 오가는 환영이 보이는 것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곳은 대가들의 생생한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 셈이다.
독서와 문학의 계절을 맞이, 한국관광공사는 이 같은 여행지를 선별해 '문학작품 속 장소를 찾아서'라는 테마로 5곳을 10월의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했다.
선정된 관광지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법정스님) ▲강원도 춘천 김유정문학촌(소설가 김유정) ▲충북 옥천군 정지용문학관(시인 정지용)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 선암사, 순천만습지(시인 정호승․소설가 김승옥 등) ▲경북 안동 권정생 동화나라(동화작가 권정생) 등 5곳이다.
소설과 시,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소박한 풍광 속에 펼쳐지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마음이 잔잔해지는 순간을 느껴보자. 각 지역마다 소개된 작가의 대표작을 읽고 여행을 간다면 더욱 풍요롭고 뜻깊은 가을이 되겠다.
무소유의 삶을 기억하다, 성북동 길상사(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
법정스님의 영정과 유품이 모셔진 길상사 진영각. |
법정 스님은 글을 통해 많은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선사한 분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며 무소유를 강조했고, '무소유' '맑고 향기롭게' 등 저서 20여 권을 남겼다. 스님은 2010년 입적했지만, 그의 맑고 향기로운 흔적이 성북동 길상사에 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김영한의 시주로 탄생한 절집이다. 창건 역사는 20년 남짓하지만, 천년 고찰 못지않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이야기 역시 길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맑고 향기로운 절집, 길상사는 많은 사람의 발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길상사와 함께 문학 이야기를 나눌 여행지가 주변에 많다. '님의 침묵' 저자 만해 한용운이 거주한 심우장,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잘 알려진 최순우 가옥, '문장 강화'를 쓴 상허 이태준 선생의 집도 가깝다. 이태준 가옥은 ‘수연산방’으로 바뀌어 향긋한 차 한 잔 나누기 좋다.
전철 타고 떠나는 이야기 마을, 춘천 김유정문학촌(강원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939년 개통한 경춘선 신남역이 김유정역(구역사)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
수도권 전철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김유정문학촌은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에 조성된 문학 마을이다. 김유정 생가를 중심으로 그의 삶과 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김유정기념전시관, 다양한 멀티미디어 시설을 갖춘 김유정이야기집 등이 있다. 생가 중정 툇마루에서 문화해설사가 하루 7번(11~2월은 6번)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김유정의 많은 작품이 이곳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쓰였다. 덕분에 김유정문학촌 곳곳에는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근식이가 자기 집 솥 훔치던 한숨길’ 등 이름만 들어도 재미난 실레이야기길 열여섯 마당이 펼쳐진다.
김유정문학촌 인근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많다. 옛 신남역에서 이름을 바꾼 김유정역은 SNS 명소다. 푸른 강물 위를 걷는 소양강스카이워크, 춘천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구봉산전망대 카페거리도 놓치기 아깝다. 키즈파크인 춘천꿈자람어린이공원은 춘천시가 운영해 가격도 저렴하다.
우리가 떠나온 옛 고향 찾아가는 길, 옥천 정지용문학관(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향수 시비가 서 있는 충북 옥천의 정지용 생가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중년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노래 ‘향수’는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였다. 이 노래 덕분에 '금기어'같았던 정지용은 ‘국민 시인’으로 양지에 나올 수 있었다. 잊히고 사라진 고향 풍경이 우리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옥천에 있는 정지용생가와 문학관으로 가는 길은 마치 떠나온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옥천 구읍의 실개천 앞에 정지용생가와 문학관이 자리한다. 정지용문학관에서는 시인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한눈에 살펴보고, 시 낭송실에서 그의 시를 낭독할 수 있다.
정지용의 시를 테마로 꾸민 장계국민관광지도 빼놓을 수 없다. 정지용의 시와 수려한 강변 풍광이 어우러져 낙후된 관광지가 독특한 명소가 됐다. 그밖에 금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곳에서 만나는 기암절벽 부소담악, 용암사도 둘러보자.
눈물이 나면 가을 순천에 가라(선암사/송광사 불일암/순천만습지)
순천은 문학 여행지로 손꼽는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정호승의 시 '선암사' 첫 행이다. 그가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줄 거라며 “실컷 울어라” 말한 장소는 선암사 해우소다. 송광사 불일암도 문학의 향기가 짙다. 법정 스님이 1975년부터 1992년까지 기거하며 글을 쓴 곳으로, 대표작 '무소유'는 1976년 작품이다. 편백과 대나무 숲을 지나 다다르는 불일암 후박나무 앞에 서면 숙연해진다. 순천만습지는 김승옥의 걸작 '무진기행' 속 ‘무진’이다. 일상과 이상, 현실과 동경의 경계가 어우러진 풍경이다. 가까이 순천문학관이 있어 그의 문학 세계를 살펴보기 좋다.
순천만습지에서 와온해변이 멀지 않다. 박완서 작가가 봄꽃보다 아름답다 한 개펄이 있다. 용산전망대 못지않은 일몰 또한 자랑이다.
가난 속 피워낸 따뜻한 동화 세상, 안동 권정생동화나라
안동 권정생동화나라는 낮은 마음가짐으로 마주하는 공간이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 등 주옥같은 작품으로 아이들의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 고 권정생 선생의 문학과 삶이 담겨 있다. 권정생동화나라는 선생이 생전에 머무른 일직면의 한 폐교를 문학관으로 꾸민 곳이다. 선생의 유품과 작품, 가난 속에서도 따뜻한 글을 써 내려간 삶의 흔적이 있다. 2007년 세상을 떠난 선생은 ‘좋은 동화 한 편은 백 번 설교보다 낫다’는 평소 신념을 이곳에 고스란히 남겼다. 1층 전시실에는 단편 동화 '강아지 똥' 초판본, 일기장과 유언장 외에 선생이 살던 오두막집을 실물 그대로 재현했다. 유작 수십 편과 강아지 똥, 엄마 까투리 등의 조형물을 만나고, 선생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다.
인근 조탑마을에는 선생이 종지기로 일한 일직교회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간 작은 집이 있다.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가운데 병산서원과 도산서원, 고산정, 농암종택 등도 가을 여행의 운치를 더한다.
헤럴드경제=김성진 기자 withyj2@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