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에 없는 섬이 있다

[라이프]by 헤럴드경제

지도에 없는 섬이 있다. 경기도 군포시 곡란로8번길. 직선으로 뻗은 골목 한가운데에는 닭 뼈, 사골 뼈, 배터리, 이어폰, 벽지, 나뭇가지, 허리띠, 쓰고 난 기저귀, 낡은 여행용 캐리어, 간이침대 등이 뒤죽박죽 섞여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사람 한 명 살지 않지만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든 곳. 쓰레기섬이다.


쓰레기섬을 내려다보는 무단쓰레기 투기 단속 CCTV도 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공무원들이 단속하는 거 난 한 번도 못 봤어.” 지난 8월 이곳 쓰레기섬 인근에서 만난 주민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산본동에서 족히 5년은 살았다고 했다. “쓰레기를 막 버려도 문제가 없다, 이미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가 돼버린 거야. 여긴 바뀔래야 바뀔 수가 없어.”


공무원도 주민들도 포기한 쓰레기섬. 그러나 이 섬은 단 3주 만에 사라졌다.

쓰레기통을 설치할 수 없습니다

당신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에 없는 섬
당신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에 없는 섬
당신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에 없는 섬

경기도 군포시 곡란로8번길에 있는 쓰레기섬

집 창문으로 쓰레기섬이 보이는 산본1동에 방영경 씨가 산다. 그는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지를 다니며 벽화를 그리고 미술교육을 하는 공공미술 분야 활동가다.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쓰레기섬이 너무 거대한 거예요. 저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어요. 이 섬을 없애고 싶었어요.” 방 씨는 “정작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잘 들여다보지 못했다”고 했다.


정보경 신성통상 패션영업본부 온라인지원팀 차장과 김성훈 MS승화(주) 대표이사가 방영경 씨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들은 지난 6월 경기문화재단과 주한영국문화원이 운영하는 글로컬 리더십 프로그램 액티브 시티즌에서 만나 팀을 꾸렸다. 팀명은 분리분리. 분리배출부터 잘하자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분리수거함만 설치하면 되지 않을까?” 분리분리 팀장인 정보경 씨는 한숨을 푹 쉬며 “그러나 매번 벽을 마주했다”고 설명했다.


“분리수거함 하나를 설치하기 위해서 만난 기관들이 27개 기관이에요. 사람으로 따지면 200여 명을 만났어요. 주민들은 쓰레기 문제는 당연히 시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잖아 말하고 군포시청에서는 청소행정과 청소행정팀, 청소행정과 재활용팀, 건설과 등 여러 부서로 쓰레기 문제를 계속 떠넘기는 거예요.”


그 사이 쓰레기섬에는 부러진 의자, 스티로폼 박스, 신발, 음식물 쓰레기 등이 한데 쌓여만 갔다. 그리고 지난 9월, 정 씨는 군포시청으로부터 답변을 받았다. 3개월 만에 받는 시청의 답은 간결했다. ‘쓰레기섬이 있는 공간이 공유지라서 분리수거함을 설치할 수 없습니다.’


분리분리 팀은 목표를 수정했다. 방법이 없었다. 견고한 제도 앞에 막혀 이미 쓰레기 배출 거점이 돼버린 쓰레기섬을 방치해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분리분리팀은 분리수거함 영구 설치 대신 3주 임시 설치라는 우회로를 찾았다.


“임시 설치로 인한 변화가 조금이라도 보여지면 모두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3주 동안 그 변화를 기록하는데 중점을 뒀어요. 쓰레기섬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저희의 기록이 지침서가 되면 좋겠다는 거였거든요. 모든 사람들의 주변에는 쓰레기섬이 있어요. 두드려야 됐던 너무나 많은 곳들을 우리가 이렇게 기록해놓으면 우리 다음에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좀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들은 3주간의 모든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예고없이 찾아온 변화

당신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에 없는 섬

산본1동 쓰레기섬에 분리수거함을 설치한 분리분리팀. 왼쪽부터 정보경 씨, 방영경 씨, 김성훈 씨.

방 씨는 3주간 저녁마다 임시 설치한 분리수거함을 재정리했다. “각 수거함에 맞지 않는 쓰레기들을 찾아내서 쓰레기를 버린 사람에게 다시 전달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막 버렸는지 알겠더라고요. 자신의 인적 사항이 있는 자료를 버리는 거예요. 버려진 쓰레기를 보면서 버린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았어요.”


양손에 고무장갑을 낀 방 씨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페트병을 집으로 가져와 물로 씻어내고 다시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정보경 씨와 김성훈 씨는 비닐에 담긴 쓰레기를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 다시 옮겨 담았다. 평일 저녁과 매 주말, 산본1동 쓰레기섬에는 늘 그들이 있었다.


“시작이 반이더라고요.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시작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연결됐어요. 마을에 있는 마트 사장님, 8통 통장님, 매화복지관에 있는 선생님들과 관모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마을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동참했어요. 그래서 초등학생 아이들과 병뚜껑으로 픽셀아트를 만들어서 전시를 하기도 하고 쓰레기옷을 입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쓰레기를 줍는 퍼포먼스도 할 수 있었어요.” 김성훈 씨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열흘 만이었다.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분리분리 팀원 모두가 낙심한 순간, 변화는 찾아왔다. “일반쓰레기 차량 한 대가 와서 이 많은 쓰레기를 한꺼번에 가져갔어요. 그런데 이제는 일반쓰레기 차량이 오고 재활용 쓰레기차가 오고 음식물 쓰레기차가 와서 각각 수거를 해 가요. 그리고 어느 순간 음식물 쓰레기함이 설치돼 있었어요.” 방 씨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에 없는 섬

쓰레기가 뒤죽박죽 섞여 아무렇게나 쌓인 섬이었지만, 지금은 분리배출이 이뤄지는 곳으로 변화했다.

“쓰레기라는 게 내가 버린 건데, 모두가 버리니, 그게 내 일이 아니게 돼버리는 거? 그렇기 때문에 더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세상은 깨끗해져야 하니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달라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 어렵고 더딜지라도 변화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분리분리팀은 지난달 26일 지난 3주간의 변화를 기록한 보고서를 군포시청에 제출했다. 군포시청 청소행정과는 내년 3월에 산본1동 쓰레기섬에 분리수거함을 정식으로 설치하겠다고 답변했다.

※ 분리분리 프로젝트는 경기문화재단과 주한영국문화원이 함께 진행하는 ‘액티브 시티즌(Active Citizens)’ 사업의 일환이다. 액티브 시티즌은 문화 간 소통과 지역사회의 책임을 도모하는 사회 리더십 프로그램으로, 영국문화원은 40여 개 국가에서 520여 개 기관과 10년째 해당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2022.01.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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