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앤리치’ 블핑 리사가 사는 성북동은 어떻게 ‘찐부자 동네’가 됐나
청와대 인접 입지, 대사관 밀집, 현대가를 비롯한 재벌 일가의 집성촌까지. 수십 년간 성북동이 ‘대한민국 대표 부촌’으로 자리잡은 이유를 짚어봅니다.
1970년대 정·재계 고위 인사 모여든 전통 부촌
대사관 밀집 성북동 330번지 ‘터줏대감’ 현대가(家)
배산임수 입지에 사생활까지 보장되는 명당
![]()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기우가 고액 과외 교사 면접을 보기 위해 박 사장이 사는 고급주택가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 실제 촬영지는 성북구 성북동 선잠로8길로 알려졌다. [영화 기생충 갈무리] |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는 고액 과외 교사 면접을 보기 위해 박 사장이 사는 고급주택가로 향한다. 기우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며 자신의 키보다 족히 3배는 높아 보이는 위압적인 주택들을 올려다본다. 고개를 위로 젖혀야 시선이 간신히 주택의 마당 끝에 닿을 정도다. 고급주택의 삼엄한 담장들이 성벽처럼 둘러쳐진 이곳은 ‘대한민국 부촌 1번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이다.
성북동은 삼청공원 옆 가파른 2차선 도로를 지나 삼청터널을 빠져나오면 언덕배기에 들어서 있다. 전면에 남산을, 후면에는 북한산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입지를 갖췄다. 고급 주택들은 육중한 대문과 높은 담벼락으로 철갑을 치고 있고, 수십 개의 대사관저를 지키는 폐쇄회로(CC)TV가 곳곳에 설치돼 있어 경비가 삼엄하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유명인…재벌 총수나 기업인만 100여명
성북동은 기생충에서 중견기업 대표로 등장한 박 사장처럼 기업 총수·재계 인사·연예인 등 한국을 휘어잡는 거물들이 사는 ‘부(富)의 근원지’다.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은 오래전부터 성북동 일대에 땅을 사들여 현대가(家)가 광범위하게 모여 사는 집성촌을 형성, ‘성북동 일가’를 이루고 있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등 성북동에 사는 재벌 총수와 기업인만 줄잡아 100여명에 이른다.
신흥 자산가들도 유입된다. 지난 2022년엔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리사가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외손녀인 장선윤 롯데뉴욕팰리스 전무가 살던 성북동 단독주택을 75억원에 매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배우 유해진도 2023년 성북동 단독주택을 45억원에 전액 현금 매수했다.
이웃 주민으로는 한류스타 배용준·박수진 부부와 배우 김우빈, 이연희, 가수 이승기, 이승철 등도 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유명인일 정도다. 18세기 인문지리학의 명저인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대를 이어 부를 누릴 터’로 소개된 성북동이 수십 년에 걸쳐 자산가들이 모여드는 명당으로 거듭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 JTBC 예능 ‘한끼합쇼’에 배우 유해진이 거주하는 동네로 소개된 성북구 성북동 부촌. [‘한끼합쇼’ 방송화면 갈무리] |
① 청와대까지 차로 10분…권력과 부의 중심이 되다
성북동은 말 그대로 도성(城) 밖 북(北)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즉 비단옷을 밝은 달빛 아래 깔아놓은 명당으로 꼽힌다. 조선시대 때는 “음풍농월을 즐기는 고관대작들에게 적합한 곳”으로, 선비들의 은거 수양처였다.
이런 성북동이 오늘날의 부촌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 권력 실세들이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과거 차지철 전 대통령경호실장, 양택식 전 서울시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성북동에서 가장 먼저 둥지를 튼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력이 막강했던 개발독재 시절이다 보니 자연스레 자산가들도 모여들었다. 1968년 북악산 길과 삼청터널이 개통되면서 도심과의 접근성이 좋아진 점도 한몫했다. 이어 19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쳐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기업인들이 성북동 주민으로 대거 편입, 대한민국 부촌 1번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정·재계 고위 인사들이 하나둘씩 거처를 마련하면서 성북동은 자연스레 ‘만남의 장’이 됐다.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자주 활용했던 현대 ‘영빈관’을 비롯해 LG전자의 ‘연곡원’, 포스코의 ‘영광원’ 등 각 기업이 소유한 영빈관이 생겨나며 정·재계 고위 인사들의 고급 사교장으로 활용됐다.
![]() 동아일보 1977년 10월 8일자에 게재됐던 대교단지(삼청주택단지) 분양 광고.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② “서울선 여기가 안전” 각국 대사관저가 자리잡은 이유
성북동에는 40곳 이상 대사관저가 있다. 대표적으로 주한 핀란드·네팔·에티오피아·오스트리아·파키스탄·싱가포르 대사관저 등이 있다. 1970년대 독일 대사관저가 가장 먼저 2만2140평 규모 땅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다음으로 2000평 규모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섰다. 이들 대사관이 하나둘씩 성북동에 모여든 것은 순전히 ‘안전’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성북동의 한 공인중개사 대표는 “현재 한국은 안전한 나라로 인식되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한국은 해외 외교관들이 피하는 ‘전쟁 중’인 파견국이었고, 생명 수당을 받고 한국으로 들어올 정도였다”며 “과거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는데, 미국 대사관이 광화문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성북동은 청와대·광화문 미국 대사관과 모두 가까워 위기 상황 시 해외 외교관들이 빠르게 대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인식됐다”며 “이 때문에 성북동에 하나둘씩 대사관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라며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수십 곳의 대사관저가 모여 있다 보니 경찰들이 상시로 검문·순회해 치안이 뛰어난 것도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 서울 성북구 성북동 330번지에 위치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단독주택. [네이버 거리뷰] |
③ 성북동 330번지 고급주택 역사 연 기업 ‘교보’…삼청터널 뚫었다
성북동에는 크게 4개의 고급 주택단지가 있다. 대교단지(삼청주택단지), 성락원 마을, 꿩의 바다마을, 학의 바다마을로 나뉜다. 1960년대 꿩과 학 등 새가 많았던 꿩의 바다마을과 학의 바다마을은 가장 먼저 형성된 부촌이다. 이후 1970년대 이후 조성된 신흥단지인 대교단지는 이른바 ‘성북동 330번지’로 산자락을 따라 호화 주택들이 자리 잡은 최고 부촌으로 손꼽힌다.
삼청터널 입구부터 길상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성북동 330번지 일대 10만7000평(35만3000㎡) 땅은 원래 고(故) 신용호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 창업주의 땅이었다. 신 창업주는 동작구 동작동에 3만6000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땅이 6·25 전사자를 위한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로 수용되면서 국가에 내어줘야 했다. 그 대체부지로 받은 것이 성북동이다.
신 창업주는 성북동 땅을 처분하기 위해 접근성부터 개선했다. 광화문 쪽에서 이동이 편리하도록 삼청동과 성북동을 연결하는 삼청터널을 뚫어 1970년 12월 완공해 국가에 기증했다. 이후 개발계획을 세우고 대한교육보험 이름으로 신문에 여러 차례 분양 광고를 냈다. 한 채에 최소 595㎡(180평) 면적의 단독주택 용지로 공급됐다.
이후 지가가 급등하면서 교보생명은 1980년대 초 해당 부지를 3.3㎡당(평당) 50만원 안팎에 분양했다. 당시에 현대·GS·오리온 등 재계 일가가 하나둘씩 고급 주택을 지으며 입주했다. 신 창업주의 장남인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도 현재 성북동에 거주하고 있다. 2011년 대지 면적 752㎡(227.48평), 건물 연면적 624.09㎡(188.79평)에 이르는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 단독주택을 58억원에 매입했다.
![]()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리사가 2022년 75억원에 매입한 성북동 단독주택. [네이버 거리뷰] |
④ 1970년대부터 330번지 모여살기 시작한 현대家
현재 성북동의 터줏대감은 현대家다. 성북동 330번지는 ‘정주영 일가 땅 밟지 않고는 못 지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고(故) 정주영 창업 회장은 1970년대에 730평에 이르는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해 후손들에게 상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故)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아내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부부도 성북동 212평 토지를 물려받았다. 이외에도 정몽헌 전 회장은 1977년 자신의 명의로 성북동 330번지에 245평 토지를 사들여 1984년 2층 규모의 단독주택을 지었다. 정 회장 사망 직후인 2003년 현 회장에게 상속됐다.
법원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해당 주택엔 290억3141만원을 채권최고액으로 하는 근저당권 등기가 설정돼 있다. 등기원인은 ‘납세담보제공계약’으로 확인된다. 납세담보제공계약은 국가가 제때 조세(양도소득세·증여세 등)를 내지 않은 납세의무자로부터 채권을 보존하기 위해 받는 담보를 말한다. 세무서장을 근저당권자로 등기를 설정했다.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도 장남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과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 등과 함께 ‘성북동 일가’를 이루고 있다. 정몽근 명예회장은 330번지 229평 규모 토지 위에 지은 2층 단독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2021년엔 소유하고 있던 330번지 221평 규모 토지, 2층 규모 건물을 정지선 회장에게 증여해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쳤다.
![]()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리사가 2022년 75억원에 매입한 성북동 단독주택. [네이버 거리뷰] |
“결국 돌고 돌아 노년엔 성북동” 굳건한 성북동 영향력
성북동과 한남동 단독주택, 청담동 고급빌라, 성수동 초고층 아파트…. 부자가 선호하는 고급 주택은 시대에 따라 지역과 유형이 변해왔다. 최근 젊은 자산가들은 전통 부촌인 성북·평창·한남동을 떠나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최고급 공동주택으로 이동하고 있다. 강남구 청담동 ‘에테르노 청담’과 ‘더펜트하우스 청담(PH129)’, 용산구 한남동 ‘나인원한남’과 ‘한남더힐’ 등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북동을 고집하는 유명인들도 적지 않다. 최근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리사를 비롯해 배우 이연희, 유해진 래퍼 빈지노는 성북동 단독주택을 매입했다. 조용하고 사생활이 보장되며 단독주택 신축이 가능해서다. 인근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150평에서 250평 규모 토지가 가장 활발하게 거래된다. 개보수가 필요한 구축은 3.3㎡당(평당) 2500만원 수준, 신축 단독주택은 5000만원 수준으로 책정된다.
서울 시내가 개발되면서 고급 단독주택 단지의 희소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남동은 고급빌라가 신축되면서 땅값이 오르고 있고, 평창동은 시내 접근성이 떨어진다. 성북동은 마지막 남은 고급주택 단지로 관공서에서도 필지 분할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는 등 무분별하게 개발하지 않고 옛 모습을 보존하려고 한다.
성북동에서 고급 단독주택과 빌라를 25여년 중개해 온 성기완 태영부동산 대표
자녀의 교육이나 이동 편리성을 위해 성북동을 떠나갔다가 노년에 돌아오는 사례도 있다. 성기완 대표는 “재벌 2·3세 등 젊은 자산가들은 자녀 교육이나 사교 모임 등을 위해 강남 고가 공동주택으로 이사 갔다가, 시간이 지나 노년이 되면 성북동으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다”며 “아파트도 오래 살다 보면 질리고, 결국 여유로운 삶을 다시 찾기 위해 성북동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로명 기자 dod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