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의 ‘컴피티션’이 담지 못한 진짜 힙합은
지금 대중음악의 가장 핫한 장르 ‘힙합’
바야흐로 요즘 음악의 대세는 ‘힙합’이다.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보임은 물론 공익광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도 유명 래퍼가 함께한다. 미국 사회의 차별과 그로 인한 패배의식 속에서 흑인들은 힙합 리듬에 저항과 분노를 실어 노래했다. 지금 우리도 맥락 없는 스왜그보다는 저 위를 향한 다른 이야기를 분출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TV는 힙합을 싣고
2016년 한국에서 가장 뜨거웠던 음악 장르는 두말할 것 없이 힙합이다. 다섯 번째 시즌을 맞은 래퍼들의 경연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Mnet)는 평균시청률 2%대(닐슨코리아)를 유지했으며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곡들은 당연하다는 듯 각종 음원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쇼 미 더 머니>가 단단한 구심점을 이룬 가운데 여성 래퍼들의 경연 <언프리티 랩스타>(Mnet)도 벌써 세 번째 시즌을 소화했으며, 60세 이상 여자 연예인들의 랩 경연을 다룬 예능 프로그램 <힙합의 민족>(JTBC)도 적잖이 화제가 됐다. 여세를 몰아 <힙합의 민족>은 현재 각계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두 번째 시즌을 이어가는 중이다. 어디 이뿐인가. TV를 통해 얼굴을 알린 힙합 뮤지션들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도 속속 투입됐다.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연말 가요제를 힙합으로 장식하기로 한 것 역시 힙합이 대세가 된 작금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오늘날 힙합의 웅비는 전적으로 TV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가 조명한 탓에 힙합 문화는 우선 ‘즐길 거리’로 다가왔다. 그것도 쉽고 재미있고 자극적인 형태로. 시도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어느 정도 익숙하긴 하지만 형체는 무형에 가까웠던 힙합은 우선 생경한 문화로 대중 앞에 선 다음 새로운 음악으로도 평가받았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힙합 음악은 청자들에게 점차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는 차고 넘치는 아이돌과의 대척점에 자리한 또 다른 ‘워너비’를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2000년대 초반 온라인 동호회를 기반으로 태동해 쭉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며 여타의 음악과 부러 선을 긋던 그 힙합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러니 이는 TV 때문이기도 하다. 힙합 음악은 경연의 형태로 대중 앞에 나선 덕에 여전히 음악보다는 일종의 ‘기예’로 먼저 다가오는 편이다. 좋은 가수가 고작 고음을 얼마나 내지를 수 있느냐와 같은 기술적인 면에 집중한 여타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예컨대 속사포 같은 랩을 쏟아내거나 강박적으로 압운(rhyme)을 맞추는 데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음악이다’가 아니라 ‘잘한다’가 그에 대한 반응이고. 그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내뱉는 험담을 가사화한, 소위 ‘디스(disrespect)’ 문화가 부각되면서 힙합 음악에 대한 관심을 말초적인 데에서 찾았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기에 욕설, 여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비하 발언, 때때로 낯 뜨겁기까지 한 자기과시 등에 대한 가사마저 힙합 특유의 자유로움이나 ‘스왜그(swag, 사전적 의미는 으스대며 걷기. 즉 자기과시를 기반으로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방법이나 태도를 의미한다)’로 당연히 용인되어야만 한다는 태도 역시도 안타깝다.
뒤틀린 사회, 변화에의 바람을 신랄하게 노래한다면
본래 힙합은 흑인 빈민가 파티 음악에 뿌리를 둔다. 그러다 발화자의 심상을 그 어떤 음악 장르보다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을 발판 삼아 자연스레 영역을 확장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재차 확인할 수 있듯이 엄연한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들이 느끼는 차별과 멸시, 그로 인한 가난과 소외가 자연스럽게 힙합 음악의 다른 줄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랩은 패배의식과 저항감에 기반을 둔 흑인들의 전유물로 향유됐다. 멜로디를 상당 부분 배제한 음악적 이질감 뒤에 음악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 성공을 갈구하며, 사회가 바뀌길 바라고, 옳지 않은 것이 사라지길 원했던 발화자 개개인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힙합 역시도 인기 래퍼가 랩으로 한글사랑 캠페인을 할 만큼 프로파간다적 면면이 엿보인다. 실제로 그 어떤 음악 장르보다 길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만큼 CF음악 역시도 랩을 선호하는 추세다. 그러니 더더욱 이상하다. 흑인들의 뒷골목에서 싹을 틔워 이윽고 소수자들의 패배감과 저항의식을 담아내던 음악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힙합 문화의 피상적인 면에만 집중한 나머지 래퍼 자신의 부와 명성을 드러내고 여성 혐오와 소수자 멸시를 담아내는 데 여념이 없는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가사도 많다. 그러나 동료에 대해 서슴없이 막말을 내뱉고, 오늘 하루 마시고 죽자는 이야기에,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가사가 버젓이 흘러나오는 것치고는 적다. 적어도 너무 적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할 얘기가 많은 세상이다. 당연히 사랑 이야기도 필요하다. 아름다운 인생을 논하는 것도, 죽자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호전적인 가사 역시도. 그러나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할 게 많다. 힙합은 딱딱하게 굳은 기성세대를 향해, 뒤틀린 사회를 향해, 가진 자와 군림하는 자를 향해 저항과 도전, 변화와 혁명에의 바람을 가장 구체적이고 신랄하게 노래할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근엄할 필요도 없다. 원래 음악이란 신나고 즐거운 거니까. 이렇게나 차고 넘치는 소재에는 등을 돌리고 여전히 자기연민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비난과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안타깝다. 여성을 향한 패기가 더 높은 곳을 향한다면, 동료나 약자에게 쏟아내는 조롱이 강자를 겨냥한다면 어떨까. 남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진짜 아티스트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진짜 힙합 아니었을까.
글 강상준
'DVD2.0' 'FILM2.0' 'iMBC' 'BRUT' 등의 매체에서 줄곧 기자로 활동하면서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살았다. <위대한 망가>를 썼고, <매거진 컬처> <젊은 목수들>을 공저했으며,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을 번역했고, <좀비사전> <탐정사전>을 기획, 편집했다. 현재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겸 프리랜스 편집기획자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