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보다 달콤한 청춘의 송가

[컬처]by 서울문화재단

서정민의 썰(說)

#이문세 #이영훈

 

이문세는 1980년대 초반에 가수로 데뷔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과 <파랑새>가 어느 정도 알려지긴 했지만, 가수로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떨친 건 작곡가 이영훈과 합작한 3집(1985)부터다. <난 아직 모르잖아요>, <소녀>같은 노래들은 감정과잉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이영훈의 세련된 송라이팅과 이문세의 무심한 듯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 가닿는 창법이 빚어낸 시너지가 절정에 이르렀던 4집(1987)은 음악 전문가들이 선정해 최근 발표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13위에 올랐고, 5집(1988)은 42위에 올랐다.

밸런타인데이에 이영훈을 추모하다

둘의 협업은 <옛사랑>이 담긴 7집(1991)까지 이어지다 멈췄다. 이문세는 8집을 다른 작곡가들과 작업했으나, 예전만큼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9집에서 다시 이영훈을 만났다가, 이후 또 다른 작곡가들과 작업했다. 13집에서 또다시 이영훈과 만났고, 14집은 다른 작곡가들과 작업했다. 이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둘은 더는 함께 작업할 수 없게 되었다. 대장암으로 투병하던 이영훈이 2008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그날은 달콤한 초콜릿 향이 진동하는 밸런타인데이(2월 14일)였다.

 

지난해는 이영훈 10주기였다. 이문세는 지난해 2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영훈의 유가족, 동료 음악인들, 팬클럽 ‘마굿간’ 회원들과 함께 이영훈 10주기 헌정공연 <작곡가 이영훈>을 성대하게 열었다. 둘이 마지막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세간의 루머들을 불식시키고도 남을 만큼 감동적인 무대였다.

 

지난해 16집 앨범을 발표하고 전국 투어 공연까지 한 이문세는 올해를 안식년으로 삼았다. 한 해 동안 음악 활동을 잠시 멈추고 여행을 다니며 재충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영훈 11주기에는 혼자 찬물 떠놓고 기도하며 고인을 추모할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20대 청년 둘이 연습실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던 시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시절 연습실 분위기를 되살린 소박한 무대를 마련하고 싶어졌다. 소극장에서 피아노 한 대만 놓고 노래하며 고인을 기리는 공연을 구상한 이유다.

 

이영훈 11주기 당일인 2월 14일 저녁 서울 이태원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 <열한 번째 발렌타인데이, 친구 이영훈> 공연에 초청받은 160명의 관객들이 숨죽인 채 불 꺼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쾌한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는 말 못한 것뿐이에요/ 할 말은 따로 있죠 그댈 사랑해/ 햇살이 눈에 부셔/ 말을 할 수 없던 거예요/ 눈물이 앞을 가려버려서/ 할 말을 하지 못했죠”. 이문세-이영훈 협업의 출발점인 3집 앨범의 첫 번째 수록곡 <할 말을 하지 못했죠>다. 피아노에다 어쿠스틱 기타, 키보드, 바이올린, 퍼커션까지 더해 아늑하면서도 풍성한 소리를 빚어냈다.

 

“영훈 씨를 처음 만나고 나서 함께 작업실에서 만든 곡 중 하나입니다. 저는 당시 두 장의 앨범을 냈고 <별이 빛나는 밤에> DJ로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져 있던 때였죠. 이제는 음악적으로 평가를 받고 싶어서 좋은 음악 파트너를 찾던 중 이영훈 씨를 만났어요. 찌릿찌릿 통했죠. 영훈 씨는 주로 연극음악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만들어둔 곡을 듣고는 굉장한 실력파구나, 느꼈어요. 그래서 ‘또 없어요? 또 없어요?’ 하다가 결국 3집에서 6곡을 함께하게 됐죠. 둘이 거지꼴을 하고 연습실에 처박혀서 몇 날 며칠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이 노래 제목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이 소절에는 이 노랫말이 어울릴까?’ 하며 단어 하나 가지고 밤을 불태우던 그 시절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이어 부른 노래는 <사랑은 한줄기 햇살처럼>. 공연에서는 처음 불러본다고 했다. 역시 이영훈이 만든 노래로, 원래는 이광조가 먼저 불러 1987년 발표했다. 이문세와 이영훈이 1988년 5집 앨범을 준비할 때였다. 앨범에 실을 모든 곡을 정해둔 상태였다. 이영훈이 말했다. “사실은 이광조 씨에게 먼저 준 노래인데, 이문세 씨, 이거 안 들어봤죠? 한 번 들어봐요.” 이영훈은 피아노를 치며 이 노래를 들려줬다. 홀딱 반한 이문세는 5집 맨 마지막 곡으로 이 노래를 넣었다. “저는 이 노래가 왜 히트 못했는지 의아해요. 저희 둘은 너무 좋아했거든요.” 학창시절 이문세 5집 전체를 무한 반복해 듣던 나조차도 낯선 노래였지만, 사연을 듣고 나니 더 각별해졌다. 진흙 속에 숨은 진주를 뒤늦게 발견한 기분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날 본공연에서 선보인 11곡 가운데는 <소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같은 히트곡들도 있었지만, <서로가>, <슬픈 사랑의 노래>처럼 공연에서 잘 부르지 않은 노래들도 있었다. 본공연 마지막 곡은 <기억이란 사랑보다>였다. 이문세와 이영훈이 마지막으로 함께 작업한 13집(2001)의 타이틀곡이다.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 거죠”.

 

이문세는 자진해서 앙코르를 하겠다고 했다. 앙코르로 부른 노래는 <옛사랑>. 내가 이문세-이영훈 단짝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광화문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마지막 소절을 들으며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떠올렸다. 거꾸로 올라가는 눈송이처럼 시간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문세와 이영훈이 다시 웃으며 노래를 만들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잠시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자고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정말로 하얀 눈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이영훈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글 서정민_한겨레 기자

사진 제공 케이문에프엔디

2019.03.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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