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의 非 평범함, 성내동(城內洞) 성안마을 강풀거리
서울이라는 이름의 갤러리
늦가을 언저리에 참가한 달리기 대회에서 우연히 그 표지판을 보았다. ‘강풀 만화거리’. 강동구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표지판을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이번 기회에 들렀다.
강풀 만화거리는 성내동에 있다. 성내동은 풍납토성 안쪽에 마을이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안말 · 성안말 또는 성내리 등으로 부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성 백제 시대에는 도성 안 마을이었던 셈이다.
성내동 성안마을 강풀 만화거리는 2013년 9월에 조성되었다.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 시리즈 <순정만화>, <바보>, <당신의 모든 순간>, <그대를 사랑합니다> 4편 속의 그림과 이야기들이 마을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강풀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강동구에서 자라났고,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 속 배경들이 강동구인 곳이 많았던 게 프로젝트가 시작된 계기. 웹툰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엔 강동구 골목골목을 누비며 신문 배달을 하였다는데 골목과 풍경에 대한 그때의 기억들이 작품을 만들 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5호선 강동역 4번 출구
5호선 강동역 4번 출구를 나서자마자 강풀 만화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어서 와, 강풀 만화거리’라는 간판과 함께 강풀 만화거리가 시작된다.
52개의 작품, 52개의 이야기
골목으로 접어들자마자 강풀의 만화 속 주인공들이 반겨준다. 모두 52개의 작품이 동네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작품명과 그 작품이 모티브를 따온 만화 원작, 그리고 작품의 의미를 담은 표지판이 있으니 꼼꼼히 읽다 보면 작품을 좀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터.
그저 웹툰 속의 그림체를 따라 그린 것을 넘어 웹툰에서 모티브를 따와 새로운 형식으로 새롭게 그려낸 작품들도 많아 골목길을 따라 작은 갤러리를 찾은 기분이 들게 되는 공간. 화려하고 커다란 벽화들도 있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저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오게 하는 디테일이 곳곳에 묻어있다.
골목이라는 캔버스
골목이라는 공간은 마냥 평평하지만은 않다. 넓은 캔버스와 다르지만, 또 다르기에 이채롭다. 벽과 벽이 만나는 골목 한 귀퉁이, 공간 자체를 입체적으로 활용한 그림들은 그래서 때론 착시 효과를 자아낸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던 4개의 작품.
이곳에 있는 52개의 작품이 전부 벽화들인 것은 아니다. 폐타이어로 만든 도넛, 어린 시절 친구네 집 대문을 장식하고 있던 사자 문고리를 커다랗게 만든 구조물, 키보드 자판을 이용해 만든 레고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만든 방식들도 꽤 다채롭다.
별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마주친 ‘평온한 꽃길을 걷는 듯’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길. 이곳의 벽화들에는 강풀 만화의 캐릭터들이 나와 있지만, 웹툰 속 이야기들은 아니다. 이 지역 주민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의 이야기들을 만화 속 캐릭터로 담아내었다고 한다. 딸의 졸업식, 남편과의 약혼식 등 바로 이 골목을 살아가는 이들의 지난 시간이 그렇게 벽화로 남겨져 있다.
‘말’들의 이야기
곳곳에서 마주치는 전봇대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도 예사롭지 않다. ‘허허, 부모는 자식에게 갚을 것을 바라고 주지 않는다.’, ‘보고 확인하고 믿는 건 믿는 게 아니겠지. 그건 그냥 아는 거겠지. 널 믿을게.’ 같은 웹툰 속 명대사들이 하나둘씩 담겨 있다. 하나 하나 새삼 곱씹게 되는 문구들.
그 외에도 전봇대 곳곳에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사실 강풀 만화 속에는 전봇대에 적혀 있는 것들처럼 참 좋은 대사들이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만화 속에서 마음을 울리는 말들은 따로 있었던 거 같다. 참 평범한 말들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마음들을 전하는 말들. 누군가에게 밥상을 내놓으며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고 가요.”, 지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이에게 전하는 “피곤하지? 들어가서 쉬자.”, 때론 문 앞에서 하는 “엄마, 저 왔어요.”라는 한마디가 하고 싶을 때가 있고, 혹 여나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낼 누군가에게 “늦지 않게 들어갈게.”라는 한 마디를 전하고 싶을 때가 있듯. 별 생각 없이 하지만, 큰 의미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일상적인 애정과 배려가 담긴 말들. 그래서 평범하지만, 참 평범하지 않은 말들. 강풀의 만화가 따뜻하다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런 말들의 의미를 무엇보다 잘 드러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돌아 나오며
이곳은 그런 거리이다. 마음 맞는 이와 함께 길을 거닐다 보면 조금은 따스함이 느껴질… 그래서 괜히 하지 못하던 말들을 평범한 듯 전할 수 있을 그런 골목길.
거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품 하나에 작가의 말이 남겨져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생명이
함께 어울리고 존중받는 사회가 된다면
살만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날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조차 쉬이 지나갈 수 있는 겨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강풀의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때론 삶이 남루하게 다가와도, 서로가 있어 서로에게 따뜻함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겨울, 말이다.
INFO
1. 찾아가는 길 : 지하철 5호선 강동역 4번 출구
2. 도슨트 프로그램 이용안내
운영일시 : 정기 : 매주 토요일 14:00 / 수시 : 3인 이상 신청 시
접수방법 : 전화신청 (강동구 도시디자인과 : 02-3425-6130)
해설시간 : 40분 내외
3. 약도 :
출처 : 강동문화포털(http://culture.gangdong.go.kr/)
글, 사진 박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