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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한국의 ‘걸 크러시’와 여성주의

자립한 ‘쎈 언니’가 보고 싶다

by서울문화재단

사회와 문화는 서로를 일그러진 거울처럼 쳐다본다. 둘은 서로를 옆에 두고 달려가는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때론 1960년대의 반전 운동과 록 문화처럼 거의 한몸처럼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그 괴력이 더욱 커진다. 2016년 한국 사회에 이와 비슷한 조응이 있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을 기폭제로 점화된 페미니즘의 움직임과 대중문화 전반의 걸 크러시 바람이다. 양쪽 모두 남성 우위의 사회와 문화를 흔들거나 뒤집어보자는 움직임이었다. 만약 양쪽이 적절한 보폭을 맞추며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이인삼각 경주는 아직 매끄럽지 못하다.

자립한 ‘쎈 언니’가 보고 싶다

걸 크러시(Girl Crush)는 걸이 걸에게 교통사고(크러시)처럼 충동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여성 팝스타에게 여성 팬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현상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2016년 초부터 국내에서도 유행하는 단어가 되었다. 먼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샤를리즈 테론이 강인하고 자립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며 국제적인 걸 크러시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이어 개그우먼 김숙이 <님과 함께>에서 시원한 소리를 뱉어내며 쑥크러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자 멤버들로만 이루어진 KBS2 <언니들의 슬램덩크>는 스스로를 ‘걸크러시 예능’ 이라고 불렀다. 더불어 <언프리티 랩스타> 출신의 여성 래퍼들이 ‘쎈 언니’ 캐릭터로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쎈 언니, ‘걸 크러시’와 페미니즘의 미묘한 엇갈림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이후 또 다른 곳에서 여성들의 거센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소라넷 폐쇄 운동, 페미니즘 서적 발간 붐, 문화계 성폭력 고발 등 다양한 양상의 운동이 이어져 나왔고, 문화계 전반이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양상까지 생겨났다. 미러링, 창작의 자유, 혐오의 경계 설정 등 수많은 이슈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논쟁의 여지는 많지만, 나는 이 격렬한 에너지가 분명히 새로운 창작의 동력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다면 여성 중심의 새로운 문화운동은 주류 세계의 걸크러시와 조응할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교집합이 많다. SNS 상에서는 양쪽 모두에 박수를 보내는 여성이 적지 않다. 그러나 막상 둘을 가까이 두고 보면, 여전히 겹쳐지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근본적인 방향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닐까 하고 여겨질 정도다.

 

2016년 네이버 TV 캐스트 인기 영상의 전체 2위는 <언니들의 슬램덩크> 멤버들이 ‘언니쓰’라는 걸그룹을 만들어 데뷔하는 영상이다. 노래는 으로 남자들에게 입 닥치라고 말하는 시원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만들고 춤을 가르친 것은 박진영이다. 그는 2016년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다. <식스틴>을 통해 선발하고 데뷔시킨 걸그룹 트와이스는 으로 ‘2016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에서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화제의 걸그룹 아이오아이와 만나 <너무너무너무>를 히트시키며 음원 차트를 석권하기도 했다.

배후에 있는 아재들로부터 자립한 진짜 ‘걸 크러쉬’

내가 주목하는 점은 지금 대중문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걸’들의 배후에 30~40대의 남성 대중문화 실력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영리하게도 여성 팬덤을 장악해야 큰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삼촌 팬’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유행했고 분명 그 실체도 있다. 과거에 비해 노골적으로 걸그룹에 열광하는 성인 남성 팬이 많아졌다. 하지만 전체 팬덤의 양적인 면에서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질적인 면에서는 더욱 외곽이다. 아이돌 그룹이 신곡을 발표한 직후 음원 상위권에 올라가려면, 여초 커뮤니티에서 얼마만큼의 지지를 얻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남녀가 섞여 있는 팬 클럽에서도 삼촌 팬의 화력은 미미하고, 오히려 여고생들이 코치하며 이끄는 경우가 많다. 남성 아이돌 팬덤의 절대 다수는 10대 여성이다. 이들은 그 전쟁에서 치열한 경험을 해왔고, 걸그룹 팬덤으로 이적해와서도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TV 예능에서 아재-걸그룹의 조합을 계속 보고 있을까? JTBC <아는 형님>은 꾸준히 걸그룹을 등장시키며 시청률 상승에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KBS2의 추석 특집 <헬로프렌즈-친구추가>에서는 ‘금사빠’(금방 사십대가 된 오빠들)인 중년 남성 MC들과 걸그룹 아이돌과의 ‘세대를 넘은 친구 맺기’를 시도했다. 그 밖의 각종 예능에서도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 출연자들이 조합을 이루는 경우가 아주 많다.

 

겉보기엔 거기에 어느 정도의 성공 공식이 반영된 것도 같다. 예능에서의 장악력이 뛰어난 40대 남성 예능인들, 그리고 다양한 세대를 포섭할 수 있는 걸그룹 멤버들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준다. 그러나 이면에는 이런 사실도 있다. 터줏대감 자리를 차지한 중년 남성 출연자들은 젊은 여성 출연자들이 나올 때 몰입도가 훨씬 높고 열심히 한다. 한꺼풀 더 들어가보자. 앞서의 박진영처럼 우리 대중문화계의 제작진과 스태프, 실질적 권력 세계를 그들 ‘아재’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러니 예능에 등장한 여성 출연자들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TV에서 여성이 자립적인 인간으로 놀고 떠드는 모습을 보기란 참으로 어렵다. 제시처럼 쎈 인상의 언니들도 그 점에선 큰 차이가 없다.

 

진짜 걸크러시,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들의 꿈을 대신해줄 스타를 아직 우리 대중문화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여성 예능인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만만치 않지만, 여전히 프로그램을 장악할 정도에 이르진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바깥에서 일어난 여성주의의 에너지가 이미 존재하는 걸 팬덤과 결합한다면 어떨까? TV, 영화, 대중음악에서 여성 제작진이 주체가 되어 그 연결고리를 찾아낸다면? 이는 남초 현상에 지친 남성 문화 소비자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글 이명석

문화비평가 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과 인문학적 호기심을 결합한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의 저서가 있고,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공감>,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에 고정 출연 중이다.

사진 제공 JTBC, CJ E&M,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