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그릇에 담긴 85년

[푸드]by 서울문화재단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청계광장에서 무교동 방면으로 들어서면 용금옥을 만날 수 있다.

봄이 지척에 와 있다. 볕이 따뜻한 낮, 청계광장을 걸으니 드문드문 청계천 아래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재개발되면서 이곳엔 고층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하지만 무교동과 다동 안쪽으로는 여전히 오래전 향기가 나는 가게들이 남아있다. 그중 하나가 ‘용금옥’. 서울식 추탕을 대표하는 명가다. ‘용금옥’은 창업주가 살던 작은 한옥에서 올해로 85년을 맞는 노포(老鋪)다. ‘추탕’하면 으레 가을을 떠올리기 쉽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계절을 따지는 것은 촌스러운 일일 것이다. 봄의 길목에서 오늘, 추탕을 먹으러 간다.

얼큰한 서울식 추탕 이야기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점심시간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과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

때마침 점심시간. 가게는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오래된 한옥이라 가파른 계단 위로 좁은 다락방이 있는데 그 또한 자리가 없다.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도 여럿 된다. 주방에서는 3대 신동민 대표 혼자 분주하다. 입구에 쓰인 ‘서울식 추탕’이라는 간판대로 용금옥은 고춧가루로 빨갛고 얼큰한 국물을 낸다. 남도식 추탕은 된장에 들깻가루가 들어간 구수한 맛이고, 원주식은 고추장으로 맛을 낸다. 흔히 ‘추어탕’이라고 알고 있는데 신동민 대표는 ‘추탕'이 제대로 된 표기라고 한다.

 

"추탕에서 ‘추(鰍)’는 미꾸라지 ‘추’거든요. 이 글자에 이미 고기 어(漁)가 들어가 있는데 추어탕이라고 하면 동어반복인 셈이잖아요. 그러니까 ‘추탕’이라고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손님들 취향에 따라 미꾸라지가 통째로 들어가는 것과 미꾸라지를 갈아 넣은 것 중에 고를 수 있다. 나는 추탕이 처음이라 미꾸라지를 통으로 먹는 것이 부담스러워 갈탕으로 주문했다. 뚝배기에 담긴 추탕이 요란하게 끓으며 나왔다. 곱창 육수라 그런지 진하고 걸쭉한 국물이 흡사 육개장 같은 걸 보니 해장하기 위해 오는 손님들도 제법 많겠다.

 

"흔히 서울 깍쟁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미꾸라지를 갈아서 주면 못 믿었다는 거예요. 무엇을 갈아서 주는지 어떻게 믿느냐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서울식 추탕은 통으로 넣게 되었던 것 같아요."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용금옥의 얼큰한 서울식 추탕

1932년부터 시작된 용금옥의 역사

‘추탕’은 청계천 아래 살던 꼭지들로부터 나왔다 한다. 언론인 故 이규태의 칼럼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거지조직을 꼭지라 했는데 그들의 중심지가 청계천 일대였다. 그들이 미꾸라지로 탕을 해 먹은 것에서 추탕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 후 자연스럽게 일대에 추탕 집이 성행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용금옥’은 청계천 바로 옆인 옛 코오롱빌딩(현재 더익스체인지서울) 자리에 있던 한옥에서 시작했다. 창업주는 신석숭, 홍기녀 부부인데 어쩌다 추탕 가게를 열게 된 것인지 현재 운영자인 신성민 대표도 알 수가 없다.

 

"너무 오래된 얘기라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해요. 다만 할머니 음식 솜씨가 남달랐다는 얘기만 들었죠. 용금옥에 대한 것도 이용상 선생님이 저술한 <용금옥시대>라는 책을 통해 많이 알게 됐어요."

 

주변에 자리한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의 기자들이 용금옥 단골손님이었다. 게다가 당시 국회의사당이 현재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었으므로 정치인들도 즐겨 찾던 음식점이었다.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이나 경제인 할 것 없이 용금옥을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 그 가운데 항일투사이자 서울신문 기자였던 故 이용상 선생은 단골 중의 단골이었다. 그가 해방 이후 근대사와 함께 용금옥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용금옥시대>라는 책으로 묶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용금옥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홍기녀 씨, 신 씨 삼 형제와 함께한 이용상 씨 (가운데) 그리고 이용상 씨가 저술한 책 ‘용금옥시대’ ⓒ용금옥시대

"일제강점기에 중국군 부대에서 일본군 무장해제 업무를 하셨대요. 그리고 광복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친형을 만날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용금옥에서 친형과 만난 거예요. 눈물의 재회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용금옥에 대한 전설은 이뿐만이 아니다.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제3차 회의에 참석한 북한의 박성철 부주석과 월북한 고려대 前 교수이자 김일성의 통역관이었던 김동석 씨가 용금옥은 여전한지 안부를 물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관도 쥐락펴락한 욕쟁이 할머니 홍기녀 씨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황학정에서 활 쏘는 신석숭 씨 (우측 끝) ⓒ용금옥시대

3대 신성민 대표가 기억하는 용금옥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늘 용금옥은 할머니 홍기녀 씨 혼자 운영했고 할아버지 신석숭 씨는 사직동에 있는 황학정에 국궁을 쏘러 다녔다.

 

‘금이 솟아나는 곳’이라는 뜻의 ‘용금옥’이라는 상호는 신석숭 씨가 지었다고도 하고, 단골이었던 시인 변영로 선생이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찌 됐건 상호 그대로 장사가 잘돼서 그야말로 돈이 샘물처럼 솟아났다. 홍기녀 씨는 토요일마다 손주들을 불러 용돈을 줬는데, 근처 주택은행에서 천 원짜리 신권을 뭉치로 찾아들고 몇천 원씩 쥐여 주었다. 그게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었던 것 같다고 그는 회상한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한량이셨어요. ‘용금옥시대’를 읽다 보면 할아버지를 ‘난봉꾼’으로 표현한 부분이 나올 정도죠. 제가 고모라고 부르던 분이 두 명이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는 삼 형제였거든요. 저도 나이 들어 알게 되었는데 두 분의 고모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첩이었던 거예요."

 

토요일마다 용돈을 받아간 손주만 해도 열대여섯 명이 넘었는데 그게 모두 신석숭 씨의 외도로 낳은 자식들까지 포함된 숫자였다. 기꺼이 첩과 그 자식들까지 껴안았던 걸 보면 여장부라고 해야 할까, 홍기녀 씨도 보통은 넘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기녀 씨는 특히나 입이 걸기로도 유명했다. 제아무리 지위가 높은 장관이 와도 ‘네가 무슨 장관 그릇이냐?’고 막말을 할 정도로 서슴없었다. 욕쟁이 할머니였던 셈이다. 남다른 할머니의 개성이 더해져 용금옥이 당대 사랑방으로 유명세를 떨친 게 아닌가 싶다.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창업주인 신석숭 씨와 홍기녀 씨 부부

인심도 후했다. 돈이 없는 이들에게는 추탕을 그냥 내주기도했고, 국물도 부족하면 아낌없이 주었다. 주된 단골이 주머니가 얇은 언론인들이었으니 외상도 숱했다. 월급날이 되면 가게에서 일하던 종업원이 주변 언론사들을 한 바퀴 돌며 외상값을 받아왔다. 1966년 신석숭 씨는 작고하기 전 유언으로 홍기녀 씨에게 가게의 모든 외상전표를 불태우라고 했는데 홍기녀 씨가 그 뜻을 따랐다고 한다. 그때 불살라 없앤 외상값이 집 한 채 가격은 족히 넘을 거라고 신성민 대표는 기억한다.

 

1932년 문을 연 용금옥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것은 30년가량 지나서였다. 무교동이 재개발되면서, 용금옥 자리에 코오롱빌딩이 들어섰다. 가게를 잃자 홍기녀 씨도 더는 추탕을 판매할 생각이 없었다. 옛 용금옥 자리에서 백 미터가량 안으로 들어온 곳에 홍기녀 씨가 살던 집이 있었는데 가게 일이 끝나면 피곤한 몸을 누일 정도의 자그마한 한옥이었다.

 

"몇 개월을 쉬셨대요. 그런데 단골들 전화가 빗발친 거죠. 용금옥을 다시 열라고 성화여서 할머니가 사시던 한옥에서 추탕을 다시 팔게 된 겁니다. 그게 현재 용금옥이고요."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전 코오롱빌딩이 세워지기 전 1층 한옥에서 시작한 용금옥

예전 가게는 지금보다 20배가량 넓었다 한다. 단골들의 염원으로 용금옥은 잠시 문을 닫았다가 홍기녀 씨가 살던 한옥에서 조그맣게 다시 시작했다. 무교동 바로 옆이지만 행정구역상 다동에 속한다.

2대 한정자 씨에서 3대 신동민 대표로

홍기녀 씨가 생을 달리한 건 1982년의 일이다. 일흔도 안 된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신동민 대표는 아마도 뇌출혈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50년이 넘도록 용금옥을 지킨 터줏대감의 사망 소식은 선데이서울에 실릴 만큼 큰일이었다. 그 당시 용금옥의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홍기녀 씨가 작고하기 전부터 용금옥에 나와 일을 돕던 막내며느리 한정자 씨가 2대 대표가 되었다. 당시 가게에는 오랜 시간 홍기녀 씨와 함께 주방을 보던 윤재순 씨가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윤재순 씨는 홍기녀 씨가 결혼할 남편감도 소개해 줄 만큼 애정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 후, 홍기녀 씨의 빈자리를 막내며느리 한정자 씨와 윤재순 씨가 함께 채운 세월이 15년가량이다. 그러다 1997년 신동민 대표가 지금의 용금옥을 맡기로 하고, 한정자 씨는 따로 독립했다.

 

"1997년이면 IMF였잖아요. 분위기가 어수선했어요. 저는 그때 대림산업 자금과에 과장으로 있었는데 회사생활의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열심히 해도 운이 좋으면 부장 직함까지 달겠구나 생각하니까 착잡했어요."

 

때마침 가족 모두 용금옥의 미래를 고민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신동민 대표가 용금옥 큰집을 맡고 한정자 씨가 용금옥 작은집을 운영하기로 했다. 회사 생활만 16년을 했던 그에게 큰 도움이 된 건 1대 홍기녀 씨와 함께 주방을 맡아온 윤재순 씨였다. 신동민 대표도 어려서부터 큰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 덕에 할머니의 추탕 맛을 그대로 이을 수 있었다.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단골이었던 전 국회의장 이만섭 씨와 함께 한 윤재순 씨(우측 두 번째)와 신동민 대표(우측 끝)

음식점 운영은 녹록지 않았다. 그것도 지체 높은 분들이 즐겨 찾는 용금옥이지 않은가. 신동민 대표가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내가 어디 어디 대표인데~’라는 식으로 특별대우를 원하는 손님들이었다. 모 회사 부회장은 마치 집에 온 것처럼 일을 부렸다. 메뉴에도 없는 도토리묵을 해달라고 하거나 버섯을 튀겨달라는 식이었다. 아무리 손님은 왕이라지만 몇 차례 계속되자 신동민 대표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런 메뉴를 드시고 싶으면 집에 가서 드시라고 했더니 3개월간은 발길을 뚝 끊었다가 다시 용금옥을 찾아왔단다.

 

또 테이블 수가 많지 않은 좁은 한옥이라 사전예약 문제로 속 썩는 일이 많다. 근래 들어 기억에 남는 손님은 국정농단으로 이름이 오르내린 송성각 前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이다. 그가 자리를 예약하고 나타나지 않는 통에 줄 서서 기다리던 손님들이 볼멘소리했다. 깐깐한 신동민 대표가 ‘높은 사람이면 다냐? 그러면 손님들 줄 세워놓고 늦어도 되냐?’고 한소리를 했단다.

 

"저는 상고 출신입니다만 용금옥 단골들은 많이 배운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20년째 용금옥을 운영하다 보니 배운 사람도 두 부류가 있더라고요. 떠받들어주길 바라는 사람과 자신을 낮추는 사람요. 예약전화를 하는 말투와 예약시간을 지키는지만 봐도 알아요."

향수를 간직한 미래유산으로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신선한 재료로 추탕을 끓이는 신동민 대표

주방을 책임지던 윤재순 씨가 지병으로 용금옥을 떠난 2012년부터는 줄곧 신동민 대표가 추탕을 끓인다. 남다른 비법은 없다. 그저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좋은 곱창으로 육수를 우려내고 그날그날 노량진에서 받는 싱싱한 미꾸라지를 삶는다. 그나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젓가락으로 미꾸라지를 집었을 때 브이(V)자 형태가 되게끔 식감이 살아있게 삶는 것인데 그 요령은 화력 조절에 있단다. 그리고 곱창으로 끓인 육수에 느타리버섯과 목이버섯, 호박을 넣고 달걀을 풀어 고춧가루로 얼큰하게 뚝배기로 담아낸다. 여기에 유부와 국수사리도 넣어준다.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서울식 추탕 ‘용금옥’- 뚝배기 한

옛 모습 그대로 용금옥을 지켜가고픈 신동민 대표

"유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옛날에는 다들 배곯았잖아요. 짜장면에 달걀부침을 얹어서 주는 것처럼 뭐라도 더 넣어서 줬던 것 같아요. 할머니의 인심대로 원하면 국물도 더 드리고 밥도 더 드리는 건 예전과 같아요."

 

용금옥을 찾는 이들을 자극하는 것은 추탕의 맛도 맛이지만 향수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래서 경기가 어려운 시기지만 신동민 대표는 백화점 입점 제안도 거절했고 가격도 더는 올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저 옛날식으로 투박한 뚝배기에 푸짐하게 한 그릇 담아내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 그대로 용금옥의 가치에 애착을 갖는 이가 먼 훗날 4대 대표가 될 거라고 그는 말한다.

 

"돈을 많이 번다고 이백 살까지 살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하루 이틀 장사해서 떼돈 벌고 문 닫을 거 아니잖아요. 오랜 단골들이 전철 타고 먼 길을 오시는데 추억을 드실 수 있도록 오래오래 해야죠."

 

미꾸라지 ‘추(鰍)’ 자에는 가을 ‘추(秋)’가 들어가 있다. 흔히 추탕은 가을에 먹어야 제맛이라고 알려져 있다. 가을철 농번기가 끝나면 논 하천이나 작은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추탕을 끓여 먹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미꾸라지는 가을에 알도 배고 기름져 영양이 풍부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 되었다. 요즘 어느 누가 도랑이나 하천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장사하겠는가. 대부분의 추탕 집은 중국산 치어를 국내로 가져와 양식한 것을 재료로 쓰니 미꾸라지를 가을에 고집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올봄엔 얼큰한 서울식 추탕 한 그릇으로 몸 보양을 하면 어떨까. 나라 걱정에 유난히 힘든 겨울을 지난 지금, 무려 85년의 역사가 스며있는 용금옥에서 우리도 다음을 모색해볼 일이다.

글, 사진 천준아

방송작가. 독립잡지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 발행인 겸 편집인. 좋으면 덕질부터 하고 봅니다. 그러면 예상치 못한 근사한 일들이 수순처럼 따라온다고 믿습니다.

2017.03.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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