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대학 교수, 밤에는 카레이서로 변신하는 여자

[자동차]by 잡스엔

본캐는 대학교수·부캐는 드라이버

슈퍼레이스 최고 클래스 ‘슈퍼6000’ 출전

“놀이기구 무섭지만 레이싱은 재밌어”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레이서로 프로 경기에 데뷔했다. 그녀가 최근 출전한 ‘슈퍼6000 클래스’는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자동차 경주 대회다. 일정한 코스와 횟수를 정해놓고 자동차 여러 대가 경쟁해 가장 빨리 완주하는 차량이 우승한다. 그녀는 출전한 21명 선수 가운데 유일한 ‘홍일점’이자 ‘최연장자’였다. 모터스포츠 경력 3년 차에 실전 레이스 경험은 16회. 햇병아리 레이서지만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논문을 쓰고 남는 시간마다 주행 연습에 몰두했다. 그 결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완주에 성공하며 16위를 차지했다. 현역 선수로 레이스를 달리는 드라이버이자 대학 교수인 이은정(47)씨 이야기다. 

타고난 레이서 DNA 없지만 그래도 도전하는 이유는…

슈퍼레이스 슈퍼 6000클래스 데뷔전을 치른 드라이버 이은정. /이은정 교수 제공

-카레이싱, 어떤 매력이 교수님을 레이싱 세계로 이끌었는지 궁금해요.


“원래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어요.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보다 자동차 매장에서 새 차를 구경하고 시승하는 게 즐거웠어요. 3년 전 모 자동차 회사 트랙데이에 초청받아 인제스피디움 서킷에서 차를 타본 적이 있어요. 그때 카레이싱 매력을 처음 알았어요. 오로지 저와 자동차뿐인 서킷 안에서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이 색다른 기분이었어요. 빠른 속도가 공포스럽지만 그 순간을 극복하고 나면 머릿 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죠. 근심과 걱정을 털어낸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서킷을 자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모터스포츠에 도전했습니다.”


-무서운 놀이기구도 잘 타실 것 같아요.


“놀이기구 타는 것을 무서워해요. 과속하는 것도 무서워하고요. 빠른 속도를 내야 하는 레이싱에 알맞은 DNA가 제게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런 공포감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껴요. 레이싱을 하는 데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스킬도 중요해요. 저는 스킬을 어느정도 갖추고 있어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욕구도 있죠. 레이싱에 꾸준하게 도전하는 이유에요. 내가 움직인대로 자동차가 잘 따라와주고, 코너를 고속으로 잘 빠져나왔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희열이 있습니다.” 


-레이싱을 하는 동안 내 본 최고 속력은 얼마인가요?


“속력은 상황에 따라 달라요. 직선 도로에서는 차가 허용하는 한 무한으로 달릴 수 있어요. 하지만 레이싱에서 중요한 건 직선구간이 아닌 코너에요. 코너를 도는 동안 얼마나 속도를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코너를 돌 때 시속 150~160km까지도 속력을 내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다만 일본 후지스피드웨이 직선 구간에서 시속 280km까지 속도를 내 본 적은 있습니다.”

최고 클래스 카레이싱 대회 출전

/이은정 교수 제공

/이은정 교수 제공

“선수로서 조금 더 성장하는 기회 만들고 싶었어요.” 

이은정 교수는 올해 5월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2021슈퍼레이스 슈퍼6000’ 개막전 경기에 참가했다.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은 국내 최대 규모 카레이싱 대회다. 슈퍼6000, GT1, GT2, BMW M 등으로 이루어진다. GT 클래스는 경주를 위해 양산차를 정해진 규정 안에서 개조한 차량들이 출전한다. 자동차 엔진 배기량에 따라 GT1, GT2로 클래스를 구분한다. GT1은 500~600마력, GT2는 450마력이다. BMW M 클래스는 BMW사 스포츠카 라인업인 M4(F82) Coupe 모델이 출전하는 원메이크 레이스다. 슈퍼6000은 그 가운데 최상급 경주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스톡카(Stock car·경주용으로 설계된 1인승 자동차) 레이스다. 나머지 경기가 준프로급 대회라면 슈퍼6000은 ‘프로’들의 대회다.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최소 C급 국제 라이선스가 필요하다고 한다. 


-짧은 경력임에도 라이선스를 담당하는 대한자동차경주협회에서 ‘오케이’ 판정을 내렸다고요.


“짧은 경력이긴 하지만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더 많은 연습량으로 기량을 올리고 있었어요. 꾸준히 경기 출전 하는 동안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높게 평가한 것 같습니다.”


개막전 경기는 폭우가 쏟아져 수중전으로 펼쳐졌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 교수는 당초 목표였던 완주에 성공했다. 21명 레이서가 참가한 가운데 48분17초165 기록으로 16위를 차지했다. 이 교수는 현재 7월10일 펼쳐질 두 번째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현직 교수’인데다 ‘홍일점·최연장자’로 출전해 더욱 화제였어요.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상상도 못했다고…. 놀랍다는 반응이었어요. 평소 성격이 거친 편이 아니어서 레이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또 학교 졸업생이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어요. 레이싱을 좋아해서 경기를 즐겨 보는데 그 곳에 교수님이 출전한 걸 보고 놀랐다고요. 완주 축하한다고 연락 받았어요.” 


-경기 중 이변 상황이나 어려움은 없었나요?


“당시 스톡카도 처음이었고, 수중전도, 레인타이어도 모두 처음이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졌어요. 빗길이라 미끄럽기도 했고요. 적응하고 감을 잡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무리하지 않고 완주를 목표로 세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완주에 성공했을 때 소감은 어땠나요?


“감동적이었어요. 팀원 모두 제가 완주할 거란 기대를 안했던 것 같아요. 날씨가 너무 안좋았으니까요. 그런데 완주를 하니 모두 박수 쳐주고 기뻐했어요. 제가 16위로 들어온 건 누군가를 추월해서라기보다 차를 망가뜨리지 않고 사고 없이 차를 몰았기 때문이에요.”

0.1초 아닌 0.0001초 싸움

슈퍼6000클래스 개막전 앞두고 연습 주행하는 드라이버 이은정 차량. /슈퍼레이스

-일반 차량과 경기용 차량 ‘스톡카’ 차이는 무엇인가요?


“스톡카는 뼈대와 새시, 엔진, 변속기 등 운전에 필요한 기본 구성만 갖춘 경주용 자동차입니다. 빠른 속도가 목적이기 때문에 무게가 가벼울 수록 좋죠. 차량 내부에 에어컨이나 다른 디스플레이가 없어요. 레이싱을 하면 엔진 열이 그대로 들어오기 때문에 내부 온도가 60도까지 높아지기도 해요. 어떤 선수들은 신발 밑창이 녹는다고도 해요. 워낙 뜨거우니까요.”


-레이싱 중 사고가 많이 발생하던데 위험하지 않나요?


“롤바가 운전자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해요. 롤바는 파이프를 구부려 만든 안전 장치에요. 롤바가 잘 갖춰져 있으면 차가 몇 바퀴를 구르는 사고가 나더라도 운전석 부분은 안전합니다. 불이 난 경우에는 슈트가 화상을 입지 않도록 2~3분 정도 버팁니다. 운전석에서 소화기를 당길 수 있기 때문에 1차적인 화재 진압도 가능해요. 또 차량 충돌 충격에서 운전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목 보호대와 안전벨트도 단단하게 조여 맵니다. 주변에서도 많이 걱정해주시는데 생각보다 안전한 편입니다.”


-카레이싱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가요? 


“저도 노력해야 할 부분이지만 대담함이 필요합니다. 레이싱 본질은 속도니까요. 다음으로 필요한 역량은 빠른 판단력과 지구력입니다. 레이싱은 0.1초가 아닌 0.0001초의 싸움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0.1초 안에 레이서 10명이 함께 있습니다. 0.0001초도 실수하면 안되는 이유에요. 코너뿐 아니라 장애물을 피하거나 추월할 때도 빠른 판단력이 필요해요. 찰나의 의사결정이 경기 성적에 영향을 줍니다. 경기가 진행되는 40분 동안 계속 0.0001초 순간을 고민해야하기 때문에 지구력도 중요해요. 마지막으로 가벼울수록 경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체중관리도 필요합니다. 


저는 스킬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속도를 낮춰야 하는 코너들을 빨리 돌아보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대범함을 키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이게 공부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 공부하면 되는건데 무서움과 싸우는 건 본능과 싸우는 일이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이은정 교수 제공.

/이은정 교수 제공.

-연습은 얼마나 자주하시나요?


“실제 서킷에서 연습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합니다. 그 외에는 레이싱 시뮬레이터를 통해 연습해요. 시뮬레이터는 레이싱카 수준으로 정교함을 갖춘 장비에요. 외관적으로는 모니터와 시트, 핸들, 악셀 등을 갖추고 있어요. 트랙 위 레이싱카 움직임을 재현하죠. 체력은 헬스를 통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레이서와 자동차가 펼치는 레이싱 경기가 실은 팀 스포츠라고요.


“레이싱은 드라이버뿐 아니라 미케닉(Mechanic·정비공), 데이터 엔지니어 등 모든 팀원들이 협업해야 하는 스포츠에요. 드라이버는 가장 마지막으로 시합에 나서는 사람에 불과해요. 레이싱 출전에 앞서 차를 만드는 일이 굉장한 작업이죠. 미케닉은 드라이버 운전 방식에 맞게 차량을 정비해요. 시합 전까지 드라이버와 차량 상태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 받아요. 아무리 능력있는 드라이버라도 차량 정비가 본인 스타일에 맞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어요. 데이터 엔지니어는 레이싱 데이터를 분석해요. 주행 기록을 보면서 고칠 점을 개선하도록 조언하죠. 서로 팀워크가 좋아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본업은 대학 교수 

연구 발표하는 이 교수. /이은정 교수 제공.

-본캐 ‘이은정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요?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주로 연구 논문을 작성합니다. 재무관리와 증권투자론, 선물옵션 등 파생상품론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드라이버’라는 부캐를 만나고 달라진 게 있나요?


“교수는 논문 작성을 많이 해요. 학생들이나 다른 교수들과 공저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혼자 쓰죠. 혼자 외롭게 작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에요. 하지만 모터스포츠는 팀 스포츠에요. 드라이버와 미케닉, 데이터 엔지니어 등 모든 팀원들이 협업해야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어요. 팀워크가 매우 중요해요. 처음 카레이싱을 시작할 때만 해도 혼자하는 업무에 익숙했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요. 하지만 팀 스포츠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이해심을 높일 수 있게 됐어요.” 


-본캐와 부캐, 시간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본업과 레이싱을 뺀 모든 일을 줄였어요. 사적인 모임을 많이 줄였죠.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외부 활동과 모임이 줄어 제가 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요?


“제 본업인 연구를 충실히 하는 게 최우선적인 목표입니다. 레이서로서는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단기적인 계획은 현재 출전 중인 슈퍼 6000클래스에 집중하려고 해요. 장기적으론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해외 레이스에도 출전해보고 싶어요. 12시간 정도 진행하는 내구 레이스에 여러 드라이버와 팀을 이뤄 함께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글 CCBB 이은

2021.07.1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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