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만 있다…제주 몰려간 25만명은 모를 진짜 '비밀 명소'
그림 같은 삼나무숲을 품은 제주도 이승악(이승이오름). 인적이 드물어 숲을 독차지한 듯한 사진을 남길 수 있다. |
작년 한 해 제주도를 찾은 방문객은 1200만명에 달했다. 코로나 확산에도 전국에서 여행자가 몰려들었다. 이번 설 연휴에도 대략 25만명이 제주도를 찾았단다. 유명 관광지나 맛집마다 긴 줄이 늘어섰다. 한라산 설경을 보기 위한 탐방 예약 경쟁도 명절 귀성길 예약 전쟁 못지않았다. 성판악 코스(하루 정원 1000명)와 관음사 코스(하루 정원 500명) 모두 일찌감치 2월 마감이 끝난 상태다.
기대 반 걱정 반. 지금 제주도 여행길에는 어쩔 수 없는 염려가 뒤따른다. 사람이 너무 몰려서다. 코로나 시대의 휴양지이자 피난처로 사랑받고 있지만, 최근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기왕 떠나는 제주도 여행이라면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즐길 수 있는 비대면 여행지를 찾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다. 시작은 소위 ‘핫플레이스’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조금만 시야를 돌리면 보다 한적하고 안전하게 여행지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제주도는 크고 누빌 곳이 많다.
비밀의 숲속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이름난 숲은 누가 뭐래도 한라산 동쪽 자락의 사려니숲이다. 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입구에서 붉은오름으로 이어지는 10㎞ 길이의 사려니숲길은 연간 탐방객이 30만명에 이른다. 주말이나 연휴면 주차장부터 긴 행렬이 이어진다.
장대한 삼나무와 편백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사려니숲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사실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귀포시 남원읍 이승악(이승이오름) 자락의 숲도 비견할 만큼 아름답다. 누런 소들이 태평하게 풀을 뜯고 있는 신례리 마을 목장 뒤편에 그윽한 숲이 숨어 있다. 오름 둘레를 한 바퀴 도는 2.5㎞ 길이의 오솔길 주변으로 사스레피나무‧조록나무‧곰솔 등 다양한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승악 등산로 앞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나와 10여 분 더 들어가면 한라산둘레길 ‘수악길(돈내코~수악~이승악~사려니오름, 16.7㎞)’로 접어든다. 그 길목 초입에 그림 같은 삼나무 숲길이 있다. 삼나무숲의 매력은 그 특유의 매끈하고 가지런한 멋에 있다.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 곁에 서면 그림 같은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인적이 드물어 숲을 독차지한 사진을 수백장 찍고 나올 수 있다. 삼나무숲에 눈이 쌓인 날은 그윽한 멋이 더할 테다. 이승악은 아직 육지까지 그 명성이 닿지 않은 비밀의 장소다. 숲길을 거니는 동안 산보하는 주민과 노루를 마주쳤을 뿐 관광객은 보지 못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마을에서 야외 승마를 체험할 수 있다. 너른 초원과 울창한 편백숲을 1시간가량 오간다. |
사려니오름 동쪽 의귀리 마을에서는 제주마와 숲을 거닌다. 의귀리 마을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옷귀마테마타운이 일일 승마 체험(1시간 30분, 8만원)을 진행한다. 초보자도 30분가량 교육을 받으면 직접 말을 이끌고 야외로 나갈 수 있다. 베테랑 조교들이 울창한 편백 숲과 탁 트인 초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겨준다. 옷귀마테마타운 오석훈 대표는 “체험자의 절반이 20~30대 젊은 연인”이라고 귀띔했다. 넷플릭스 ‘킹덤’ 시리즈의 팬이라면 숲의 풍경이 낯설지 않다. ‘킹덤: 아신전’에서 밀렵꾼들이 호랑이를 쫓는 장면을 의귀리 편백숲에서 촬영했다. 하루 최대 30명까지만 체험자를 받는다. 예약이 필수다.
무인도를 거닐다
차귀도는 한번에 55명만 허락하는 무인도다. 차귀도 등대 쪽에서 내려다본 쌍둥이바위. 멀찌감치 수월봉의 모습이 보인다. |
제주도 서쪽 한경면 고산리 끝자락의 당산봉과 수월봉은 빼어난 바다 전망으로 이름난 장소다. 어느 곳에 오르든, 누구나 고산리 앞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에 포커스를 맞추게 된다. 이 그림 같은 피사체가 차귀도다.
차귀도는 바닷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며 태어난 수성화산체다. 크게 죽도와 와도로 나뉘는데,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42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바다 위에 얌전히 누운 것처럼 보이는 차귀도는 가까이 보면 전혀 다른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분출하지 않은 마그마가 돌기둥처럼 서 있는 장군바위, 비상하는 독수리를 닮은 독수리바위(지실이섬) 등 기기묘묘한 생김새의 바위들이 죽도 앞바다에 펼쳐져 있다. 먼 옛날 화산폭발의 생생한 흔적이다.
차귀도를 즐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섬에 드는 것이다. 고산리 자구내포구(차귀도포구)에서 차귀도 본섬인 죽도로 들어가는 유람선(왕복 1만6000원)을 탈 수 있다. 10분이면 섬에 닿는다. 유람선 관계자는 “2년 전만 해도 55인승 유람선이 오전 9시 30분부터 매시 30분마다 사람들을 실어 날랐지만, 요즘은 하루 2회 정도만 운항한다”며 “최소 인원(20명)을 못 채워 배를 안 띄우는 날도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단체 여행객이 사라지며 탑승객이 크게 감소한 탓이다. 덕분에 차귀도를 찾은 여행자의 만족도는 크게 올라갔다. 차귀도에 머물 수 있는 1시간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섬 곳곳을 보다 여유롭게 누빌 수 있게 되어서다.
차귀도는 전체 면적은 0.16㎢(약 4만8400평)에 불과하지만, 제주도 부속 섬 중에서 가장 큰 무인도다. 차귀도를 한 바퀴 도는 4.1㎞ 길이의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섬 남쪽 끄트머리의 장군바위 전망대가 가장 전망 좋은 장소다. 붉은빛이 도는 화산 송이 절벽과 장군바위, 그리고 멀찍이 수월봉과 산방산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차귀도의 정수리쯤 되는 볼레기언덕 위에 고산리 주민들이 세운 아담한 등대가 있다. 등대 앞에 서면 차귀도의 억새 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구내포구 옆 해안절벽. 최근 '동굴 인생사진'로 입소문이 나고 있는 장소다. 거친 갯바위를 따라 진입해야 해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수월봉 초입에서 자구내포구까지 이어지는 1㎞ 길이의 해안 길은 일명 ‘엉알길’로 통한다. ‘벼랑 아래 길’을 의미하는 제주말이다. 화산재층이 켜켜이 포개져 있는 해안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차량통행이 금지돼 있어 오붓하게 걷기 좋다. 자구내포구 방파제 옆 해안절벽은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포토존으로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아치형 절벽 아래서 차귀도와 바다를 배경으로 이른바 ‘동굴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다.
자연이 빚은 하늘공원
제주도 서귀포 표선면 백약이오름. 정상에 거대한 원형 굼부리가 있다. 거닐기 좋은 하늘길이다. 멀찍이 한라산이 보인다. |
한겨울 한라산은 제주도에서 가장 뜨거운 명소다. 눈꽃산행 등산객의 예약 경쟁이 치열해서다. 눈높이를 조금 낮추면 한가로이 제주도의 풍경을 누릴 수 있다. 제주도는 오름 천국이다. 크고 작은 오름이 360여 개에 달한다.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의 백약이오름(357m).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전망은 경쟁력이 충분하다. 용눈이오름‧동거문오름‧다랑쉬오름 같은 걸출한 오름을 가까이 두고 있어, 인파가 몰리는 일도 드물다.
대부분의 여행 서적이 백약이오름을 다룰 때 난이도를 ‘하’로 적는다. 그만큼 길이 쉽다. 오름 입구에서 나무 계단을 따라 30여 분만 오르면 어느 덧 정상부에 이른다. 치마나 단화 차림의 관광객, 어린 아이도 단숨에 오를 수 있다. 스틱이나 등산화는 필요 없다.
백약이오름에서 본 성산일출봉과 1124번 도로. |
백약이오름은 자연이 빚은 하늘공원이나 다름없다. 성산일출봉처럼 머리 위에 거대한 굼부리(분화구)를 얹고 있는데, 이 굼부리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만 또 30분이 족히 걸린다. 굼부리를 돌며 주변의 다양한 오름을 내다볼 수 있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모든 풍경이 파노라마로 다가온다. 서쪽으로는 막대한 몸집의 한라산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오름이 곡선을 그리며 물결친다. 동쪽으로는 성산일출봉과 바다의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백약이오름과 이웃한 비치미오름(344m)은 분위기가 또 다르다. 빽빽한 편백숲과 솔숲을 올라 정상으로 향한다.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정상이 주는 해방감이 대단하다. 개오름‧민오름‧성불오름‧돌리미오름 등의 크고 작은 오름들이 사방으로 둥지를 틀고 있다. 억새가 춤추는 정상부 평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멍·물멍·숲멍이 아니라 ‘오름멍 때리기’를 한참 하다 언덕을 내려왔다.
제주도=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