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근육 있고 살림 못하면 안되나요…노는 언니들의 반란

박세리 등 여성 스포츠 스타 한자리 모여

“평생 운동만…MT도 처음” 예능원석 발견

평균 나이 66세 ‘같이 삽시다’ 허당미 풀풀

매운맛 톡 쏘는 ‘여은파’도 영역 확장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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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을 했어요?”


지난 4일 첫 방송 된 E채널 ‘노는언니’에서 박세리가 제작진에게 던진 질문이다. 지난 25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한 ‘골프 여제’지만 여자 선수만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강호동(씨름)ㆍ서장훈(농구)ㆍ안정환(축구) 등 스포츠 스타 출신 예능인은 많았지만 “여자 선수들은 왜 노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고. 26년간 펜싱 선수로 활약한 남현희 역시 “여자 선수가 출연하는 예능도 있길 바랐는데 기회가 생겨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결혼=계약불가” 차별과 싸워온 선수들


다양한 종목과 연령대의 선수들이 모인 ‘노는언니’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평생 운동밖에 몰랐던 언니들이 처음으로 다른 종목 선수들을 만나 어울리는 모습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훈련하느라 수학여행이나 MT 한 번 가본 적이 없다는 이들이 부상 위험과 식단 조절 등의 스트레스를 잊고 낯선 자유를 만끽했다. 특히 현역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흥국생명 배구단에서 각각 레프트와 세터를 맡고 있는 ‘배구 여신’ 쌍둥이 자매 이재영ㆍ이다영 선수와 경북도청 수영팀의 ‘여자 마동석’ 정유인 선수는 남다른 예능감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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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답게 놀 때도 남다른 승부욕을 보인다. 2회에 장성규, 유세윤, 황광희 등 남성 연예인 게스트가 등장하자 ’언니들끼리 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의견이 쇄도했다. [사진 E채널]

“여자 피겨는 고등학교 1~2학년이 전성기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은퇴를 생각한다”(곽민정), “결혼한 수영 선배는 거의 없다. 결혼하면 계약도 안된다”(정유인), “출산 후 복귀한 펜싱 선수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 잘하고 싶었다”(남현희) 등 여자 선수로서 받아온 차별과 편견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MBC ‘나 혼자 산다’ 등 기존 예능 프로그램에서 박세리나 김연경(배구)이 출연할 때 ‘리치 언니’ ‘플렉스’ 같은 면모를 부각한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황금어장’(MBC) ‘한끼줍쇼’(JTBC) 등을 거쳐 티캐스트 E채널로 이적한 방현영 CP는 “새로운 인류를 발굴한 느낌이다. 노는 것을 표방하고 있지만 경험의 폭을 다양하게 넓혀나가는 것이 목표”라며 “향후 새로운 스포츠 스타도 합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자라고, 늙었다고 다 살림 잘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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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언니’가 스포테이너로 여성 예능의 영역을 확장했다면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실버세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영란ㆍ문숙ㆍ혜은이 등 출연진 평균 연령은 66세지만 이들이 모여 사는 모습은 이제 막 홀로서기에 나선 사회초년생에 가깝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베테랑 배우 혹은 가수들이 남편 빚 갚기 위해 바삐 뛰어다니느라 살림과는 거리가 멀었던 주부 0단, 주방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요리 초보 등의 면모를 보여주며 웃음과 연민을 동시에 자아낸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관찰 예능의 대상이 다양화되면서 기존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있다”고 짚었다. 그는 “일하는 여성이 살림을 못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가사노동이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여성의 몫이 되는 것은 부당하다. 여성도 얼마든지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결혼, 이혼, 비혼 등으로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라이프스타일도 변화하고 있다”며 “40~50대 중년 여성 중에는 나도 더 나이 들면 친구들과 저렇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다”고 밝혔다.



“화끈한 ‘여은파’가 ‘나혼산’보다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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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예능인이 주축이 된 프로그램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도가 가능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5년만 해도 여성 예능인을 불러주는 곳이 없어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직접 만들어야 했지만 이듬해 ‘언니들의 슬램덩크’(KBS2)와 ‘비디오스타’(MBC에브리원)를 시작으로 ‘까칠남녀’(EBS), ‘뜨거운 사이다’(온스타일), ‘밥블레스유’(올리브)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면서 변화의 토대가 마련됐다. 공 평론가는 “2018년 이영자, 2019년 박나래 등 여성 방송연예대상(MBC) 수상자가 잇따라 탄생한 데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플랫폼 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는 것도 여성 예능의 길을 터줬다. 웹예능 ‘시켜서한다! 오늘부터 운동뚱’ 김민경의 활약이 본편인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보다 주목받고 있는 것처럼 지난달 시작한 ‘여은파(여자들의 은밀한 파티)’의 기세도 무섭다. ‘나 혼자 산다’에서 얻은 부캐 조지나(박나래), 사만다(한혜진), 마리아(화사)를 앞세운 웹예능으로 본방송에선 할 수 없었던 ‘매운맛’ 예능을 선보인다. 새벽에 한강에 주차된 차들을 보고 “흔들리는 차 있는지 봐요. 습기 차 있으면 백빵”이라며 19금 농담도 서슴지 않는 덕에 어설픈 러브라인에 집착하는 본방보다 훨씬 재밌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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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의 중심축이 1인 가구로 옮겨온 것도 여성 예능의 영역 확장에 한몫했다.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육아 예능이나 SBS ‘동상이몽 2 - 너는 내 운명’, TV조선 ‘아내의 맛’ 등 부부 예능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황 평론가는 “tvN ‘온앤오프’만 봐도 여성의 취미가 한층 다양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엄정화는 킥복싱, 소유는 서핑을 하지 않냐”며 “김민경의 튼튼한 허벅지나 정유인의 다부진 어깨 등 신체적으로 강인한 여성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대중문화에서 보다 다양한 주체를 보고 싶어하는 욕망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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