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이보다 도발적, F4보다 귀여운 ‘구미호뎐’ 러시아산 여우

민경원의 심스틸러

[민경원의 심스틸러]

동물원서 학대받다 금수저 거듭난 김용지

이동욱·김범 사이서도 눈에 띄는 달콤살벌

모델시절부터 “국적·성별 알 수 없는 매력”

‘미스터 션샤인’ ‘더 킹’ 이어 잠재력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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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이다. 귀엽다. 그리고 미쳤다.’


tvN 수목드라마 ‘구미호뎐’에 등장하는 기유리(김용지) 역에 대한 설명이다. 겉보기엔 잘나가는 모즈 백화점 이사로 우아하고 기품 있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속은 영락없는 여우. 그것도 러시아에서 밀수돼 지방 동물원에서 학대받으며 자라다 사람의 탈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직 ‘여우티’를 벗지 못한 신입이다.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종적을 찾아볼 수 없는 외래종이지만 백두대간을 지키는 산신 출신 이연(이동욱)과 인간과 구미호 사이에서 태어난 이랑(김범) 등 쟁쟁한 구미호들 틈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도깨비’(2016~2017)의 저승이보다 도발적이고 ‘꽃보다 남자’(2009) F4 소이정 선배보다 귀여운 매력이 통한 것이다.


일찌감치 인간 세상에 정착한 다른 구미호들과 달리 야생동물의 습성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람 앞에서 꼬리를 숨기는 것을 까먹을 만큼 순진하기도 하고, 밥 주는 손은 일단 물고 볼 만큼 주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자신을 학대하던 사육사를 찢어버리고 자유를 선사해준 이랑에게는 한없이 순한 양이지만, 수의사 구신주(황희)에게는 “안락사 같은 거 시키면 안락하지 못하게 죽게 될 것”이라며 늑대처럼 쏘아붙이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궁리하고 타협하기보다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직진하는 것. 덕분에 그는 ‘달콤’과 ‘살벌’을 오가며 인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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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용지(29)는 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러시아산 여우 역을 찰떡같이 소화한다. 푸른빛이 감도는 렌즈는 이국적인 느낌을 더했고, 한곳에 갇히지 않은 사고방식은 자유분방함을 안겨줬다. 2015년 모델로 먼저 데뷔 이후 가장 많이 들었다는 “국적과 성별을 잘 모르겠다”는 말과 꼭 들어맞는 배역을 만난 셈이다. 2018년 배우로 첫발을내디딘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타로를 보는 묘령의 여인 호타루 역을 맡아 일본인 혹은 혼혈로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캐나다에서 3년간 유학했던 그는 과거 잡지 인터뷰에서 “모델 일을 하면서 세 보이는 작업을 많이 해서 강한 이미지가 생긴 것 같다”며 “인상이 강하기보다는 개성이 강한 얼굴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우연한 선택이 쌓인 결과다. 유학 시절 새로운 작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요리 공부를 시작한 그는 귀국 후에도 이어가길 원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어릴 적부터 관심 있던 연극으로 눈을 돌린 케이스다.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한 그는 연출을 전공했지만 사진과 친구들 작업을 도와주다가 모델 일을 하게 됐고, 광고와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면서 영상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궁금한 것은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끈 것이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재미있게 일하는 게 좋아서” 소속사 없이 활동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2017년 이병헌ㆍ한지민ㆍ김고은 등이 소속된 BH엔터테인먼트에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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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부터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대작을 만난 것이 부담될 법도 했지만 그는 되려 도전을 즐기는 쪽이었다. “외적으로 신비하게 생겼으며 말을 하지 못하는 점성술사” 호타루에 부합하는 김용지를 첫 미팅에 캐스팅한 이응복 PD는 “서툴지만 훈련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연기”에 만족감을 표했고, 그 대범함에 반한 김은숙 작가는 차기작 ‘더 킹: 영원의 군주’에도 잇따라 기용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건물주이자 카페 사장인 명나리로, 대한제국에서는 황실 공보관 명승아로 1인 2역을 매끄럽게 소화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오매불망 구동매(유연석) 곁을 지키는 비련의 여인이었다면, ‘더 킹’에서는 황실 근위대장 조영(우도환) 덕질로 시작해 연인으로 발전하면서 발랄한 매력을 뽐냈다.


덕분에 지난해 출연한 ‘모두의 거짓말’과 ‘왓쳐’ 편집본 영상도 인기를 끌고 있다. 진실을 좇는 바른일보 기자부터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사기꾼까지 ‘이랑은 모르는 기유리의 과거’ ‘러시아산 여우의 과거’ 등으로 화제를 모으는 것이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를 향한 기대감도 커졌다. 불과 다섯 작품 만에 주목할 만한 신예로 거듭나면서 향후 주연급으로 역할이 커지면 또 어떤 얼굴로 나타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왕이면 남주를 쫓아다니며 헌신하는 역할이 아닌 자립심 투철한 여성으로서 면모를 보고 싶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도전정신,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우는 용감함과 순발력 등 그가 지닌 장점이 더 발휘되지 않을까. 부디 오래도록 현실에 적응하되 길들지 않는 야생동물의 습성을 간직할 수 있기를.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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