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구 40%가 노비라는데···노비는 '노예'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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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한 김덕령 장군에게는 왜적과의 싸움 외에도 유명한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장인이 도망간 노비들을 잡으러 갔다가 살해됐다는 사연을 듣고는 신혼 첫날밤 홀로 쇠방망이를 들고 노비들의 은신처로 찾아가 복수를 합니다. 또 그들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장모에게 가져다줬으니, '백년손님'이라는 사위가 장가온 첫날부터 큰 선물을 안긴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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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극 '추노'의 한 장면 [사진 KBS]

이렇게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일을 추노(推奴)라고 했습니다. KBS 드라마 ‘추노’를 통해서도 잘 알려졌죠. 실제로 조선에선 노비가 도망치고, 이를 잡아들이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심지어 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대단히 많은 숫자지요.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노비를 유지했을까요. 또 왜 이렇게 많은 노비들은 도망을 다녔을까요. 지금부터 조선의 노비제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삼국~고려시대 노비는 인구의 10% 이내


노비는 남성인 노(奴)와 여성인 비(婢)를 합친 단어입니다.


조선시대 노비는 국가 기관에 묶인 공(公)노비와 일반 개인에게 속박된 사(私)노비로 나뉩니다. 또 노비가 노동의 대가를 바치는 형태에 따라 납공노비(納貢奴婢)와 입역노비(立役奴婢)로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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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오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 중창(中倉)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촌락에 대한 기록문서 [중앙포토]

입역노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주인의 명령에 따라 노동력을 바치는 노비인 반면에 납공노비는 1년에 정해진 액수의 현물을 바치는 노비였습니다. 그래서 납공노비는 주인집이 아니라 따로 주거지를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에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서두에 조선시대엔 인구의 약 40%가 노비였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통일신라시대인 695년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인근) 4개 촌락을 조사한 문서를 보면 460명의 인구 중 28명이 노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6% 남짓 되는 것이죠.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인 1391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받은 식읍(食邑)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162명 중 노비는 7명으로 약 4.3%에 불과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100년 후엔 인구의 약 40% 정도가 노비로 바뀐 것이죠. 즉, 노비 인구가 크게 팽창한 것은 조선 왕조부터입니다.


양천교혼으로 노비를 늘린 퇴계 이황


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가장 큰 요인은 양천교혼(良賤交婚)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엔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중 한 명만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됐고, 노비와 양인의 결혼 자체도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노비였던 이들만 대물림됐기 때문에 크게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것이 조선이 들어서면서 엄격했던 양천교혼의 금기가 차츰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비를 가진 양반 입장에선 노비와 노비를 결혼시키는 것보다는 노비와 양인을 결혼시키는 것이 노비를 늘리기가 쉬웠기 때문에 이를 적극 권장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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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이 노비들의 양천교혼을 유도한 것은 성리학의 대학자로 알려진 퇴계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금(范金)과 범운(范雲) 등을 불러다가 믿을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는, 생업을 의탁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시집을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도산전서(陶山全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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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역시 300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린 지방 지주였습니다. 그는 생전에 학문 못지 않게 재산 증식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대부 중 한 명이었죠.


노비를 줄이려는 왕과 늘리려는 사대부


그런데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노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일부 왕들은 노비 숫자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태종입니다. 태종은 양인 남성과 여성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양인의 자격을 주도록 했습니다. 이를 종부법(從父法)이라고 합니다. 당시 양반들 중에선 여성 노비를 첩으로 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같은 조치는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늘리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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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비가 줄자 양반 관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죠. 이들은 종부법의 실시 때문에 ‘여성 노비들이 마음대로 양인 남성에게 시집을 가며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구실을 내세워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태종이 이 법을 만든지 18년이 지난 세종 14년(1432년) 종부법이 페지됐습니다. 그러니까 세종은 장영실에게는 '은혜'를 베풀었지만 노비 전체로 보자면 원망스러운 임금이 될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후 1485년,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조선의 노비 수는 다시 급증하게 됩니다. 즉, 병역과 세금을 담당할 양인의 숫자는 다시 감소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1669년 현종 때 이를 수정하자는 목소리가 일어납니다.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남성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양인으로 하자는 것이죠. 즉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입니다. 이 제도는 당시 치열했던 붕당 정치에 따라 운명이 왔다갔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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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법안을 찬성했던 것은 서인ㆍ노론이고, 반대했던 것은 남인입니다. 그래서 각 정파의 부침에 따라 종모법이 시행됐다가 폐지됐다가 하는 것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다가 영조 때인 1731년 종모법이 확정됐고, 이는 이후 불변의 법령으로 굳어졌습니다.


이후 순조 1년인 1801년엔 공노비가 해방됐고, 1886년엔 노비세습제가, 1894년엔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 노비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노비제의 유산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었습니다.


조선에서 유난히 노비 숫자가 증가하고, 또 양반 관료들이 이를 결사적으로 막았던 것은 고려말부터 증가했던 대규모 농장을 유지하는데 노비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퇴계 이황의 경우만 해도 자녀들에게 약 36만평 가량의 농토를 남긴 지방 지주였습니다.


지난주 소개한 미국 흑인 노예제는 면화나 담배 같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도입하면서 시작됐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조선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려 후기 원나라를 통해 모내기 등 선진농법이 도입되면서 농작물 생산력이 높아졌고, 권력충은 대토지 소유와 노비 확보에 많은 열을 올리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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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비제가 유독 비판받는 이유는?


사실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한 나라입니다.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사례와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또, 15세기 이전에 노비가 사라진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유별난 사례입니다. 물론 다른 민족을 노비로 두면 이보다 낫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높은 문명 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이 현대를 목전에 둔 19세기까지 이런 제도를 유지했다는 점은 분명 의외의 대목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도 노비가 있긴 했습니다만 중국의 경우엔 송나라 때 법으로 철폐됐고, 일본도 전국시대를 거치며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이후에도 노비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채무 관계라든지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적인 영역에 속했고, 국가 차원에서 노비제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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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몽골 간섭기엔 고려 정계의 실력자였던 활리길사(闊里吉思, 고르기스)라는 몽골 관리가 노비제 철폐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세계 제국을 다스리던 몽골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려의 노비제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막아선 것은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이것은 조상 대대로의 풍속입니다. 천한 무리가 양인이 되도록 허락한다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사직이 위태롭게 됩니다. 쿠빌라이칸은 고려의 풍속을 존중해주기로 했으니 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해 결국 무산됐습니다.


한편 조선의 노비가 노예냐, 아니면 노예와 다른 존재였냐를 두고도 학계에선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이 문제는 서양 학자들과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 시각이 다릅니다.


제임스 팔레 미 워싱턴대 교수는 “인구의 30%가 노예라는 점에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Slavery Society)”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 학자들은 노비가 양인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일정량의 현물만 바치면 되는 납공노비가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흑인노예나 혹은 중국과 일본에 있었던 노예보다는 자유로운 존재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렇더라도 양반 관료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강화 유지된 노비제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 이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성군으로 평가하는 세종이나 정조도 넘기 어려운 난제이기도 했습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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